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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DA Nov 02. 2021

다시 만나 하고픈 이야기는 없다

1101_회사작당

  글쓰기 모임을 하고 있다. 매주 하나의 주제를 뽑아 각자 써와서 월요일에 나눠 읽는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일정 분량 이상의 글을 써내지 못한다. 글의 길이란 단순히 시간을 들인다고 해서 그에 비례하지 않는다. 그 크기에 걸맞는 뼈대를 세울 줄 알아야 하고 이를 위한 연습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의 글이 관목이 아닌 교목 쯤은 되어 적어도 몇 장은 채울 수 있도록 습작 삼아 이것저것 쓰려 시작한 모임이다. 


  글이라는 테두리 밖으로 잠시 나와서 내게 할당된 글감을 다시 살펴본다. 이번 주는 ‘다시 만나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주제로 써야 한다. 주제를 보고나면 대략적으로 어느 방향으로 글을 이어나가면 되겠다는 감이 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예상밖의 일이었다. 원래는 이 주제라면 그럭저럭 어렵지 않게 화제를 뽑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누구를 앞에 세워두고 기나긴 고백을 읊어야 하나. 부모님, 하나 뿐인 언니, 한때의 연인들, 친구들. 차례로 짚어보지만 콕 집어 하고픈 말은 없다. 무엇이 나를 가로막고 있기라도 한듯, 연상이 이어지지 못하고 뚝 끊어지고 만다. 내가 그렇게 완전무결한 삶은 산 것도 아닌데 어째서 어떤 말도 꺼낼 수 없는 것일까. 글을 쓸 수가 없다. 마감은 내일까지, 위기에 봉착했다. 글을 쓰겠다 마음 먹은 사람이라면 어떤 주제가 제시되어도 이리저리 잘 엮어 내보일 수 있어야 하지 않은가. 자괴감이 든다.


  별 수 없이 역으로 파헤쳐보기로 했다. 왜 이 주제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 전에 자책할 시간을 조금 더 할애해도 되는지 미리 양해를 구한다. 사실 안 구하고 그냥 해버릴 것이다. 아무도 안 말리니 상관 없다.


  한심하도다. 자신이 겪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조금도 말을 덧댈 수 없는 빈약한 상상력이여.

  이 정도면 됐다. 다시 본래 이야기로 돌아가자. 


  로마 가톨릭교도의 고해성사는 성당 안에서도 고해소에서, 사제와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 은밀히 이루어진다. 다른 성도들은 그 내용을 엿들어서는 안 되며 사제 역시 당연하게도 고해성사 가운데 이루어진 일들에 대해서는 함구해야 한다. 빛이 드는 곳에서는 차마 꺼낼 수 없고, 사람의 눈에서 뿜어져나오는 안광만으로도 불타버릴 것 같은 죄책감에 얼굴을 마주할 수 없는 죄를 고하기 위해 고해소는 그렇게나 좁고 어둡게 꾸며진 것이 아닐까 한다. 언젠가 신이 따스한 빛으로 자신을 감싸줄 그날을 기다리며 지금은 잠시 어둠 속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단지 상상만 해보라고 마련한 자리인데도 입을 굳게 다무는 것은 활자가 기록되는 이 문서창이 너무나 밝기 때문이다. 전자화되어 광섬유를 통해 퍼져나갈 준비를 마친 점멸신호가 두렵다. 여지껏 만난 모든 사람들에게 이러저러한 잘못을 저질러 왔음을 기꺼이 털어놓기가 어렵다. 얼마나 꺼려지는지 무슨 말을 할지 생각도 할 수 없게 무의식적으로 막아선다. 나의 의식은 그 본체는 볼 수 없는 가운데 그저 비친 그림자의 크기로 공포의 위력을 가늠해볼 따름이다.


  어느 만남과 이별이든 더 나은 선택지는 반드시 존재한다. 그말인즉슨 우리는 늘 어딘가 아쉬운 선택지를 고르며 앞, 뒤, 좌우로 서성인다. 나의 경우 매순간의 실수들은 부끄러움이 되어 머릿속에 새겨지고, 한가득 채울 정도로 빼곡해지면 수치를 견딜 수 없어 관계를 종료하고 말았다. 상세한 이유는 저마다 달랐지만 뼈대는 비슷한 형태로 조직되어 종말은 결국 예외 없이 비슷했다. 인연의 끝에는 언제나 나의 습이 작용했다.


  다시는 만날 수 없을 만큼의 수치와 회한을 묻어둔 자리는 결코 빛이 바래는 일 없이 선명하게 흔적을 남겨두었다. ‘김 아무개 여기에 묻히다 20XX~20XX’따위의 표석들이 눈에 선히 그려진다. 아직은 그 밑을 파헤쳐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 밑을 파서 무럭무럭 자란 괴물을 똑똑히 들여다보아야만 똑같은 실수가 일어나지 않으리란 것을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고 있다. 절대자의 광명으로 나를 휘두르는 공포의 악취를 가시게 할 작업은 여생에 해결해야 할 과제들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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