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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상적인튀김요리 Mar 21. 2023

사진으로 걷는 올레3코스

제주도민의 언제 포기할지 모르는 올레길 돌파기 (11)

1. 추자도에 다녀온 이후, 다음 올레길에 서는 순간은 꼬박 1년이 걸렸다. 육아를 이유로, 피곤을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었던 올레길. 홀가분함을 느낀다. 운동이 그렇고, 독서가 그렇듯 그게 뭐라고, 용기를 내는 일은 늘 어렵다. 용기를 내고 나면 오히려 기분 좋은 일들이 흠뻑 몰려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걷는 내내 발뒤축과 발바닥이 죄다 까졌다. 용기 내는 일이 그동안 얼마나 무뎠는지 새삼 깨닫는다. 느긋한 표정의 조그만 돌하르방이 괜히 날 타박하는 것 같다.


2. 곳곳이 무밭이다. 줄지어 늘어선 무가 고단했던 겨울을 이겨내고 그 하얀 빛을 드러내었다. 겨울을 이겨낸 무는 단단해 맛이 좋다. 가지런한 무밭에서 알 수 없는 평안을 느낀다.


3. 올레길은 밭담길과 겹쳐져 있다. 캐릭터가 참 귀엽다. 밭담길을 골라 걷는 것도 좋겠다 싶다. 잘 쌓인 밭담은 단단하면서도 유연하다. 언젠가 집을 짓게 된다면 밭담처럼 집의 경계를 쌓고 싶다. 그것은 내 삶의 가치가 될 터였다.



4. 독자봉에 올라 내려다보는 성산. 날씨가 아쉽지만 흐릿한 실루엣의 성산도 충분히 아름답다. 카메라에 담긴 모습은 영 아쉽지만. 독자봉 전망대에선 친구의 아내가 마련해 준 간식과 다른 올레꾼의 간식을 받아 고맙게 먹었다. 불어닥친 감염병으로 나눠 먹는 일조차 망설였던 순간들이 점차 해소되는 기분이다.


5. 정말이지 제주스러운 그리고 자연스러운 연석. 정리되지 않은 연석 곳곳의 너저분함이 마음에 들었다.


6. 우리가 바닷길이 아닌, 산길인 A코스를 택한 이유이기도 했던 김영갑 갤러리. <그 섬에 내가 있었네>를 인상 깊게 읽었던 나는 꼭 이곳에 걸어오고 싶었다. 걸어오는 것이 선생님을 고려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7. 김영갑은 제주를 담은 사진작가다. 그의 일대기와 더불어 제주를 사랑하는 눈으로 담아낸 사진은 감동적이다. 제주 중산간에 고압 송전탑이 들어서는 걸 그토록 안타까워했다던 그는 고맙게도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를 그때 제주의 시시각각을 담아냈다.


8. 김영갑 작가의 작품이 담긴 엽서도 구입했다. 내게 <그 섬에 내가 있었네>를 선물한 친구에게 전해줄 생각이다.


9. 신천 목장 귤피 밭. 귤껍질은 없고, 철조망이 설치된 귤피 밭은 스산했다. 사람들의 숱한 인증 사진에, 이기적인 발걸음에 스산함만 남았을 귤피 밭이 안타까웠다. 몇 해 전, 아내와 함께 왔던 때를 떠올릴 뿐이었다.


10. 이번 올레길의 마지막. 표선 해수욕장. 군 생활을 하던 곳과 가까운 해수욕장이라 감동이 덜하지만 참 좋은 해수욕장임은 확실하다. 바닷물이 적당해 모래사장이 넉넉히 보이는 해수욕장. 이렇게 이번 올레길도 끝. 매달 올레길에 나서기로 용기를 다지며 길과 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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