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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다리 준 Dec 08. 2021

어나더룸(Another Room)

시드니 중심가에 위치한 하이드 공원(Hyde Park)은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공원이다. 런던에 있는 동명의 공원 이름을 따서 지은 때가 1810년이니 벌써 200년이 훌쩍 넘은 유서 깊은 공원이라 하겠다. 시내 중심부에 있어 주민들의 휴식 공간이자 여행자들의 관광 명소로도 유명하지만 국가적으로 의미가 큰 안작 메모리얼(Anzac Memorial)이 공원 안에 자리하고 있다.


안작 메모리얼은 호주와 뉴질랜드의 전몰자[1]들을 추모하기 위한 전쟁 기념관이다. 호주에는 이곳 외에도 캔버라의 호주 국립 전쟁 기념관(Australian War Memorial), 멜버른에 있는 있는 멜버른 전쟁 기념관(Shrine of Remembrance) 등 전쟁에서 희생된 군인들을 기리기 위한 장소를 볼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섬이자 가장 작은 대륙인 호주.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전쟁과는 거리가 멀 것처럼 보이지만 1, 2차 세계 대전은 물론 우리가 흔히 6.25라고 부르는 한국 전쟁에도 참전한 나라이다. 알고 보면 미국과 영국에 이어 가장 많은 17,000여 명의 병력을 파병하여 한국군에 큰 도움을 준 고마운 나라이다.


이런 희생과 고마움을 잊지 않기 위해서일까. 2017년, 2018년에는 안작 메모리얼에서 한국전 전시회가 열리기도 했다. 2021년에는 안작 메모리얼의 학예사인 브래드 마레나(Brad Manera)의 기획으로 주시드니 한국문화원에서 ‘가평 전투 70주년 기념전(1951, the critical year of the Korean War)’을 열기도 했다.


가평 전투는 호주군이 포함된 영국 연방군이 당시 중공군에 맞서 서울 탈환을 저지한 전투로 한국 전쟁에 있어서도 큰 의미를 갖는 장면이다. 그런 뜻깊은 이유 때문일까. 가평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길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가평 전투에 참가했던 호주 참전용사들이 돌아와 길이나 다리, 공원 등에 가평(Kapyong)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참전 용사들이 많이 거주했던 장소에 해당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시드니의 경우 벨로즈(Belrose) 지역에 가평길(Kapyong St.)이 있고 심지어 그 바로 옆에는 부산 플레이스(Pusan Place)와 부산 보호구역(Pusan Reserve) 같이 한국 지명이 들어간 장소들도 볼 수 있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 때문일까. 지자체끼리의 자매결연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특히 대한민국 서울과 시드니가 있는 뉴 사우스 웨일즈 주는 2011년 자매결연을 한 후 지속적으로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 외에도 15개에 달하는 지자체가 호주의 각 도시와 결연을 맺으며 교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은 호주 전체 교역의 4.5%를 차지하며 호주의 교역국가 순위에서 4위를 차지한다. 2020년 기준 총 교역액만도 248억 9600만 달러에 달한다.

한국과 호주는 알게 모르게 역사, 문화, 경제적으로 끈끈하게 이어진 나라인 것이다.




20 - 30대에게 호주는 이런 역사적인 이유보다 워킹홀리데이를 통해 많이 익숙해진 나라이다. 대부분의 다른 나라는 몇 백 명에서 많아도 몇 천명 수준으로 인원 제한이 있는데 반해 모집 인원에 제한이 없고 신청도 언제든 할 수 있기 때문에 대학생들이 휴학하고 다녀오기에도 부담이 없고 나이만 괜찮다면 취업 후나 퇴직 후에도 마음만 먹으면 떠날 수 있는 멀지만 가까운 나라이다.


2019년 기준 워킹홀리데이 참가 인원수가 38,245명인데, 그중 호주로 떠난 인원만 19,310명이다. 워킹홀리데이 협정을 맺은 23개국 중 단연 1위일 뿐만 아니라 전체 워킹홀리데이 참가자 수에서 50.5%를 차지하는 높은 수치이다.


매년 몇 만 명씩 호주를 경험하다 보니 자연스레 호주에 정착을 원하는 사람들도 생기게 마련이다. 지난 20년간 교민의 수가 부쩍 늘어나 전체 교민의 수는 약 18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중 시드니 교민의 수는 약 10명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독보적으로 많은 수의 교민이 정착한 도시이다.


이전에 소개한 바와 같이 멜버른에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로스터리인 ACOFFEE가 있다. 약 2만 5천 명의 교민이 살고 있는 멜버른에도 한국인이 운영하는 로스터리가 있는데 시드니에 한국인이 하는 로스터리가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홍찬호 대표가 운영하는 놈코어 커피(Normcore Coffee)는 앞서 소개한 하이드 공원에서 온다면 걸어서 5분도 걸리지 않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조금 과장을 보탠다면 고개만 쭉 빼서 보면 카페에서도 공원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깝다.


공원 바로 옆의 빌딩 숲에 둘러싸여 조용히 숨어있으면서 회색 보도블록과 건물 사이에서 굳이 화려하게 꾸며 눈길을 사로잡지도 않는다. 바쁜 일상에 쫓기거나, 휴대폰에 정신이 팔린 채 걸어가다 보면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만 같은 수수한 모습이다.


하지만 스태프들의 면면과 수상 경력을 훑어보다 보면 커피 업계의 슈퍼스타들이 빠짐없이 라인업한 것만 같다. 로스팅은 물론 브루잉, 에어로프레스에 라테 아트까지 각종 대회에서 상을 휩쓴 기록을 보면 어떤 주문이라도 훌륭하게 처리할 것만 같은 믿음이 든다.


이런 근거 있는 자신감의 발현일까. 놈코어 커피의 슬로건은 댐 굿 커피(Damn Good Coffee)로 끝내주기 맛있는 커피라는 뜻이다. 그 이름을 본뜬 대표 블랜드인 댐 굿 블랜드(DAMN GOOD BLEND)를 맛보면 슬로건을 기막히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커피 맛이 묵직하다 보면 자칫 쓴 맛이 나거나 텁텁해질 수도 있는데, 부드러운 맛이 살아있어 절묘한 균형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시드니에 총 3곳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는 놈코어 커피는 서울 연남동에 있는 어나더룸(Another Room)을 통해서도 그 맛을 알리고 있다.


연남동에서 마시는 놈코어 커피는 브랜드 이름을 생각해보면 굉장히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놈코어(Normcore)는 Normal과 Hardcore를 합성하여 만든 단어인데, 유니크하지만 편안한 커피를 다루고자 하는 의미라고 한다. 평범한 주택가 사이사이에 특별하고 독특한 가게들이 숨어있는 연남동. 그 안에 자리한 주택에 둥지를 틀고 커피를 만드는 어나더룸은 놈코어 커피를 마시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조합이 아닐까.


어나더룸은 일반 주택을 개조한 건물의 2층에 자리하고 있다. 창 밖으로도 공간이 있어 야외 좌석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내부에는 커피를 만드는 바 카운터를 둘러싸듯 테이블이 놓여 있다. 이 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자리가 있는데 바 카운터 뒤쪽에 있는 자리이다. 일반적으로 직원이 아닌 다음에야 바 뒤쪽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바 뒤에서 바리스타들이 일하는 모습을 볼 일도 없다. 그런데 어나더룸의 바 카운터 뒤쪽에는 바 길이만큼 앉을 수 있는 긴 의자가 마련되어 있다. 마치 오픈 키친처럼, 아니 오픈 키친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바 뒤쪽까지 고객이 들어올 수 있게 열어놓은 것이다.


바 뒤쪽의 의자에 앉으려 하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아마 한 번도 그런 자리를 본 적이 없어서일 수도 있고 괜스레 뒤에 앉아있다가 민폐를 끼치면 어쩌나 싶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생각보다 너무 가까운 거리가 부담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기회가 된다면 꼭 한 번 앉아보시길. 바리스타가 보는 시선으로 카페를 바라볼 수 있는 꽤나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될 테니까.


대표인 김수철 바리스타는 호주 멜버른에 있는 ACOFFEE를 포함한 여러 카페에서 경험을 쌓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어나더룸의 호스피탈리티 역시 호주의 여느 카페들처럼 친근하다. 오픈 바 형태이다 보니 바리스타들과 편안히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다. 한두 번만 방문해도 금방 얼굴을 알아보는 덕분에 단골 카페를 하나 더 만든 듯 들뜬 마음이 들기도 한다.


기분 좋게 커피를 주문하고 자리를 잡아도 좋지만 이왕이면 커피를 들고 나와 거리를 걸어보자. 소위 연트럴 파크라고 불리는 경의선 숲길까지 걸어서 5분이면 갈 수 있다. 길게 쭉 뻗어있는 매력적인 공원을 걸으며 어나더룸의 놈코어 커피를 홀짝이면 굳이 시드니까지 가지 않아도 여행지를 거닐 듯 발걸음이 가벼워질 것이다.


[1] 전장에서 싸우다 죽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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