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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북동 탕웨이 Aug 02. 2023

돌이켜보니 갭이어

부지런할 이유가 없는 아름다운 시간을 보냈다

회사 일이 없어지니 졸릴 때 자고, 눈이 떠지면 일어났다. 목이 마르면 마시고, 배가 고프면 먹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한낮의 한적한 카페에서 좋아하는 커피를 마시고, 케이크를 먹고, 소파에 앉아 다리를 편 채로 아무 때나 책을 꺼내 보고, 드라마를 보면 하루가 금방 갔다. 일렉트로닉 기타에 입문했고 피아노를 쳤다.


이게 바로 한량의 생활이란 말인가? 적이 없어 불안해 할 겨를도 없이 여름과 가을이 금방 지나갔다.


친구가 집 밖에서 꺼내 바람 쏘여 주려고 카페에 데려가 준 카페에서


생산하지 않고 소비하며 보내는 여러 달 보내다 보니, 통장 잔고는 가파르게 기울어졌다. 우아함을 잃지 않고 나 자신을 잘 먹이고 재우기 위해서는 대책이 필요했기에 이력서를 업데이트하고, 빈 스프레드시트를 열었다. 먼저 연락해 주거나 연이 닿은 회사들과 커피챗을 했다.


디지털노매드로 살며 일할 수 있는 좋은 오퍼를 받기도 했으나, 뭔가 다시 열심히 도전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없는 상태로 일터로 돌아가면 안 되겠다 싶었다. 이도저도 아닌 마음을 갖고 어딘가에 조인하고 싶지 않았다.


거절을 하면서도 이게 맞는 건가? 몇 번을 고민했는지 모른다. 여러모로 나를 위해 채용 담당자를 비롯해 많은 분들께서 마음을 써주셨는데, 일이 주는 성취보다 중요한 뭔가가 있다는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그게 뭔지 알고 싶었다. 국면 전환이 필요할 때쯤에, 여행이 국경이 막 열린 태국으로 떠났다.


Laem Hin Pier로 가는 페리 안에서 본 풍경


낮에는 수영을 하고, 선베드에 비스듬히 누워 해가 지는 걸 하염없이 바라봤다. 따뜻한 곳에 있으니 웅크려져 있던 마음이 햇볕에 마르는 듯했다. 건들건들 걷다 보면 해가 졌다.


코로나로 못 만났던 친구와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요즘 관심사는 무엇인지,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 어디 가서 뭐 하고 놀지에 관해서 치열하게 토론했다. 원래 계획은 한 열흘 머물다 오는 거였는데, 빨리 돌아갈 이유도 없고 해서 있다 보니... 한 달이 지나 있었다. 평화로웠다.


쉬다 보니 한 가지 명확해진 게 있다. 나는 일로써 나의 쓸모를 증명하며 살아온 그간의 삶을 피곤하고 고단하다 여기지만 사랑한다. 유유자적한 삶을 지향하지만, 치열한 삶에 대한 열망이 있다.


푸껫에서 싱가포르를 거쳐 돌아오는 밤 비행기에서, 뭔진 몰라도 스스로를 믿고 삶에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를 계속 찾아나가는 실험을 계속해봐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앞으로도 계속, 살면서 무엇이 중요한지 찾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바쁘다는 이유로, 어렵다는 이유로, 찾으려고 하지 않는 노력을 게을리하지는 않고 싶지 않다고 다짐했다. 이 마음이 부디 계속되길.


영화 같은 데서 보면, 갑자기 주인공들이 갭 이어를 가지곤 하던데... 갭 이어라는 게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내겐 방의 벽지 무늬를 하염없이 보고, 가만히 앉아 멍 때리며, 에메랄드빛 바다를 보고 흘러가는 구름을 멍하니 바라보며 순간순간에 집중하는 시간이 갭 이어였다.


잠시 하던 걸 멈췄더니,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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