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프로젝트, 첫 성과
프로젝트 2주차.
1차 편집본이 완성됐다. 90초. 8시간 분량을 90초로 압축하는 데 일주일이 걸렸다.
"클라이언트 피드백 왔어요."
김유진 팀장이 슬랙에 메시지를 올렸다. 다들 긴장한 표정으로 화면을 봤다.
[클라이언트 피드백]
- 전체적으로 좋습니다.
- 다만 제품 클로즈업 샷이 조금 부족한 것 같아요.
- 그리고 엔딩 부분이 좀 밋밋합니다.
- 아, 그리고 모델 얼굴이 나오는 컷을 좀 더 넣어주세요.
- 음악도 다른 걸로 바꿔볼 수 있을까요?
준호 씨가 한숨을 쉬었다.
"전체적으로 좋다면서 왜 이렇게 많아요..."
"클라이언트는 원래 그래요."
내 입에서 자동으로 나온 말이다. 20년 동안 수백 번 겪은 상황이니까.
회의실에 모여서 피드백을 분석했다.
"제품 클로즈업이랑 모델 얼굴 컷을 더 넣으라는 건 알겠는데, 90초에 다 넣으면 빡빡해지지 않을까요?"
소희 씨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편집을 다시 해야 해요. 기존 컷 중에 덜 중요한 거 빼고, 새 컷 넣고."
"어떤 걸 빼야 하죠?"
화면을 보면서 생각했다. 20초 부근에 배경 전환 컷이 있다. 예쁘긴 한데 스토리 전개에 필수는 아니다.
"여기요. 이 전환 컷 2초를 1초로 줄이고, 45초쯤 있는 이 컷도 0.5초 줄여요. 그러면 2.5초가 생겨요. 거기에 제품 클로즈업이랑 모델 컷 넣으면 돼요."
김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엔딩은요?"
"엔딩은... 지금 페이드아웃으로 끝나는데, 그것보다는 제품 샷으로 임팩트 있게 끝내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마지막에 로고 뜨기 전에 제품이 화면 정중앙에 딱 오는 컷으로요."
"그렇게 하면 확실히 기억에 남겠네요."
"네. 90초짜리 영상은 마지막 5초가 제일 중요해요. 사람들이 기억하는 건 끝부분이니까요."
음악 문제가 남았다.
"음악을 바꾸라는 건... 어떤 방향으로요?"
준호 씨가 물었다. 김팀장이 메일을 다시 확인했다.
"좀 더 트렌디한 느낌으로 해달래요. 지금 음악이 너무 무난하대요."
"트렌디한 게 뭔데요..."
소희 씨가 중얼거렸다. 나도 모르겠다. 트렌디. 요즘 20대가 좋아하는 음악이 뭐지?
"소희 씨, 요즘 어떤 음악 들어요?"
"저요? 음... 뉴진스? 르세라핌?"
"그런 느낌으로 가면 될까요?"
"아, 근데 저작권 때문에 그건 못 쓰잖아요. 비슷한 분위기로 찾아봐야..."
소희 씨가 음원 라이브러리를 뒤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찾더니 몇 개를 추렸다.
"이거 어때요?"
재생 버튼을 눌렀다. 경쾌하고 세련된 비트. 확실히 아까 음악보다 젊은 느낌이다.
"좋네요. 이걸로 해볼까요?"
"네!"
소희 씨가 신나서 대답했다. 본인이 찾은 음악이 채택돼서 기분 좋은 모양이다.
수정 작업에 들어갔다.
컷을 다시 배치하고, 새 음악에 맞춰 타이밍을 조절하고. 편집이란 게 결국 이런 거다. 만들고, 보여주고, 피드백 받고, 수정하고. 그 반복.
밤 9시.
"과장님, 이 부분 한번 봐주세요."
준호 씨가 불렀다. 가서 화면을 봤다. 새로 넣은 제품 클로즈업 컷이었다.
"여기 전환이 좀 어색한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영상을 몇 번 돌려봤다. 문제가 뭔지 보였다.
"앞 컷이랑 색온도가 안 맞아서 그래요. 앞 컷은 따뜻한 톤인데 이 컷은 차가운 톤이에요. 색보정 살짝 해주면 자연스러워질 거예요."
"아, 색온도... 그렇네요. 저 그런 거 잘 못 보거든요."
"익숙해지면 보여요. 저도 처음엔 몰랐어요."
준호 씨가 색보정 작업을 시작했다. 옆에서 지켜보다가 살짝 조언을 더했다.
"조금만 더 따뜻하게요. 네, 거기. 멈춰요. 딱 좋아요."
"오, 진짜 자연스러워졌어요. 감사합니다, 과장님."
집에 가니 11시였다.
거실에 불이 꺼져 있다. 다들 잔 모양이다. 살금살금 들어가서 냉장고를 열었다. 남편이 저녁 남겨놨다. 랩에 싸인 밥이랑 반찬들.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여보 고생했어. 데워먹어. - 정우]
배가 고프긴 했는데, 먹기 귀찮았다. 그냥 물만 마시고 씻으러 갔다.
침대에 누우니 남편이 돌아누웠다.
"왔어?"
"응. 깨웠어?"
"아니, 안 잤어. 기다렸어."
"...바보같이 왜 기다려."
"걱정돼서. 밥 먹었어?"
"회사에서 먹었어."
"다행이다. 내일도 늦어?"
"아마... 이번 주까지는 바쁠 것 같아."
남편이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잡았다. 그게 전부였다. 근데 그걸로 충분했다.
프로젝트 3주차.
2차 피드백이 왔다.
[클라이언트 피드백]
- 많이 좋아졌어요!
- 음악 바꾼 거 마음에 들어요.
- 엔딩도 임팩트 있어졌네요.
- 근데 한 가지만요, 15초 버전도 만들어주실 수 있나요? 인스타 광고용으로요.
...15초 버전?
"이거 원래 계약에 없던 건데요?"
준호 씨가 말했다. 맞다. 90초짜리 하나 만들기로 했는데.
김팀장이 전화를 했다. 클라이언트와 통화하는 게 들렸다. 한참 얘기하더니 돌아왔다.
"15초 버전 추가요. 추가 비용 협의했어요."
"그럼 해야죠, 뭐."
내가 말했다. 일이 늘어난 건 짜증나지만, 돈 받고 하는 거면 할 만하다. 코러스미디어에서는 이런 거 공짜로 해줬는데. 여기는 다르네.
"15초면... 90초에서 핵심만 뽑아야겠네요."
"제가 해볼게요."
소희 씨가 손을 들었다. 의욕이 넘친다.
"좋아요. 소희 씨가 초안 잡고, 제가 감수할게요."
소희 씨가 만든 15초 초안을 봤다.
나쁘지 않았다. 근데 뭔가 아쉬웠다. 15초인데 정보가 너무 많았다.
"소희 씨, 15초 영상의 핵심이 뭘까요?"
"음... 제품 보여주는 거요?"
"맞아요. 근데 이 영상, 제품 나오는 게 몇 초예요?"
소희 씨가 세어봤다.
"...5초요."
"15초 중에 5초. 너무 적지 않아요?"
"아... 모델 컷이 너무 많았네요."
"네. 90초에서는 모델 컷이 중요했는데, 15초에서는 제품이 주인공이에요. 모델은 제품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이고요."
소희 씨가 메모했다. 진지한 표정이다.
"다시 해볼게요."
"네. 천천히 해요. 급하게 하면 또 처음부터 해야 해요."
마감 이틀 전.
90초 버전 최종본, 15초 버전 최종본이 완성됐다. 클라이언트에게 보냈다.
기다리는 시간이 제일 긴장된다. 오케이 나올까, 또 수정 요청이 올까.
두 시간 뒤, 답장이 왔다.
[클라이언트]
완벽합니다! 이대로 진행해주세요.
특히 엔딩 부분이 정말 마음에 들어요.
15초 버전도 깔끔하네요.
감사합니다!
"됐다!"
소희 씨가 소리쳤다. 준호 씨가 기지개를 켜며 웃었다. 김팀장도 안도한 표정이다.
"수고하셨어요, 다들."
내가 말했다. 3주간의 전쟁이 끝났다.
퇴근길.
오랜만에 6시에 퇴근한다. 해가 아직 안 졌다. 이 느낌이 좋다.
핸드폰이 울렸다. 김팀장이다.
"과장님, 잠깐 통화 돼요?"
"네, 말씀하세요."
"아까 클라이언트한테 전화 왔었어요. 이번 프로젝트 너무 좋았다고요. 특히 편집 퀄리티가 확 올라갔다고."
"다들 열심히 해서 그렇죠."
"아니요, 과장님 역할이 컸어요. 준호 씨랑 소희 씨가 그러더라고요. 과장님한테 많이 배웠다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래, 이런 거였지. 내가 일하고 싶었던 이유. 돈도 중요하지만, 인정받는 느낌. 내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느낌.
"감사합니다, 팀장님."
"감사는요. 다음 프로젝트도 잘 부탁드려요."
집에 도착하니 6시 반이다.
현관문을 여는데 시우가 뛰어나왔다.
"엄마! 오늘 일찍 왔네?"
"응, 프로젝트 끝났어."
"대박. 그럼 오늘 저녁 뭐 해줘?"
"...내가 왜 해줘?"
"엄마가 일찍 왔으니까!"
논리가 이상한데 반박이 안 된다.
"뭐 먹고 싶은데?"
"제육볶음!"
시준이가 방에서 나왔다.
"제육볶음 하면 나도 먹을 건데."
"당연히 너도 먹는 거지."
"...밥 많이 해."
사춘기 아들의 '밥 많이 해'는 '기대하고 있어'라는 뜻이다.
남편이 부엌에서 나왔다.
"어, 벌써 왔어? 내가 저녁 하려고 했는데."
"괜찮아. 오늘은 내가 할게. 프로젝트 끝나서 기분 좋아."
"잘 됐어?"
"응. 클라이언트가 완벽하대."
남편이 웃었다.
"역시 우리 금이. 축하해."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에 섰다. 칼을 들고 양파를 썰었다. 오랜만에 이 시간에 저녁을 만든다. 이게 6시 퇴근의 맛이구나.
코러스미디어에서 20년, 크리에이티브웍스에서 한 달.
아직 갈 길이 멀다. 근데 첫 발자국은 뗀 것 같다.
90초짜리 영상, 3주간의 야근, 그리고 '완벽합니다'라는 한마디.
나쁘지 않은 시작이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