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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Jul 15. 2020

02 카페 아르바이트

"쏘리 암 낫 코리안" | 단 10분


고상하지만은 않았던 카페 아르바이트


대학교에 입학하고 드디어 로망이었던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프로즌 요거트를 판매하는 곳이지만 커피 메뉴도 다양했고 생과일 스무디에 와플, 머핀 등 메뉴가 다양해서 결코 음식점 아르바이트보다 수월하진 않았다. 프로즌 요거트 베이스를 만들 때 20L 통을 가득  우유와 설탕, 초코파우더나 망고 퓌레 등섞어야 해서 이두근과 삼두근의 자기주장이 강했던 시절이다.




"쏘리 암 낫 코리안"


해외에서 한국사람을 만나면 반갑고 더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영화 부당거래에서 주양 역의 류승범이 외쳤듯이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 아니 권리인 줄 안다.


아직 영어가 서툰 유학생이나 워홀(워킹 홀리데이)이 부동산, 공과금 문제가 생겼을 때 통역을 자처하며 도와줬고, 친구가 없어 외로워하면 잘 맞을 것 같은 사람들을 소개해줬다. 그렇게 누군가는 과한 오지랖이라며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도움이 될 수 있어서 좋았다.


일하던 카페에서도 한국인 손님을 만나면 토핑 하나 더 얹어주기도 했고 주변 관광장소나 맛집을 추천해주기도 했다. 때로는 부모님 연령의 이민자분들은 먼 나라에서 아르바이트하느라 고생한다며 격려를 해주고 사탕이나 초콜릿 같은 걸 건네주시고도 했다. 이런 동포끼리의 따듯한 정이 좋았다.


하루는 한국인 아주머니 다섯 분이 오셔서 샷 추가한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잔에 뜨거운 물과 머그컵 4개를 추가로 부탁하셨고 그 날부터 난 열심히 한국인이 아닌 척을 해야만 했다.


내가 한국인인걸 알게 된 이후로는 과도한 서비스를 요청하셨고 같은 동포끼리 정 없이 구는 거 아니라며 양을 더 요구하는 명령조의 부탁 아닌 부탁을 받는 게 일상이 되었다. 죄송하지만 인원수에 맞게 음료를 주문해달라고 조심스레 말씀을 드려도 호주 물가가 너무 비싸다(카페 메뉴는 한국이 훨씬 더 비싸다..), 방금 점심 먹고 와서 배부르다 등의 이유로 음료 하나에 몇 시간씩 시끄럽게 수다만 떨었다. 시식용으로 뒀던 초콜릿도 순식간에 사라졌개인 테이블로 가져가서는 안 되는 물병을 본인 테이블에 놓고 다른 손님들의 따가운 눈초리도 개의치 않아했다. 내가 아무리 카페 방침을 설명드리고 양해 부탁드려도 학생 엄마라고 생각하고 좀 넘어가 달라며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우리 엄마는 아줌마들처럼 민폐 안 끼쳐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소란 피워서 좋을 것 하나 없어서 이번이 마지막이겠지 하고 넘어갔다.


그 아주머니들은 몇 차례 더 왔지만 더 이상 감당할 수가 없어 외국인 직원에게 대신 주문을 받아달라고 했고 난 사무실에 잠시 들어가 있었다. 외국인 직원이 있을 때는 위에 언급한 진상행동은 하나도 없었고, 어김없이 물병 전체를 테이블에 가져갈 때 직원이 그러면 안된다는 한 마디에 미안하다고 하면서 제자리에 돌려놨다.


기분이 참 씁쓸했다.




10분


내가 일했던 카페 옆엔 스타벅스가 있었고 두 곳 모두 통유리로 되어있고 카운터가 서로 마주 보는 형태로 되어있어서 아르바이트생들끼리 눈인사를 나눌 수도 있었다. 가끔 우리 카페에서 프로즌 요거트를 사가는 스타벅스 아르바이트생이 있었는데 그 친구와는 좀 친해지기도 했다.


항상 비슷한 시간에 마감을 했지만 그날따라 스타벅스는 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다. 그 날은 위에 언급한 진상 아주머니들이 처음 찾아왔었던 날이었고 난 너무 지쳐서 빨리 집에 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평일 오후였기에 손님들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요거트 기계 청소, 커피머신 청소, 다음날 오픈에 필요한 생과일 토핑 채우기 등 마감 업무들을 일찍 시작했고 오후 11시 정각이 되자마자 매장 내 불을 모두 끄고 보안 알림을 켜고 나와서 문을 잠그고 집으로 향했다. 그날 에 무슨 끔찍한 일이 일어났는지는 다음날 출근해서야 알 수 있었다.


다음날 오전에 출근했더니 매니저가 카페 외벽에 설치된 CCTV를 확인하고 있었다. 전날 밤에 이 길에 묻지 마 폭행사건이 일어났고 가해자는 우리 카페를 지나갔다고 한다. 경찰은 이미 가해자를 잡았지만 더 엄격하게 처벌하기 위한 증거품으로 매니저한테 CCTV 확인을 부탁한 것이다.


오후 3시쯤이었던가, 건장한 체격의 경찰관 두 분이 카페에 왔고 매니저가 말해준 것처럼 CCTV 녹화본을 요청했다. 경찰관 두 분께 USB를 넘겨드리기 전에 확인차 함께 영상을 봤다.


흐릿하게 찍힌 중년의 남자가 멍하니 굵은 쇠파이프를 땅에 질질 끌면서 길을 천천히 걷고 있었다. 정말 소름 끼쳤다. 그리고 CCTV에 찍힌 시간은 오후 11시 10분경으로 날 마감이 조금만 늦었으면 나도 저 단단한 쇠파이프에 맞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에 손이 떨렸다. 경찰은 그런 나를 의식한 듯 영상을 얼른 껐고 협조해줘서 고맙다는 표시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리고 범인은 이미 잡혔고 한동안 시티 주변 순찰을 강화할 것이니 걱정 말라고 안심시켜주었다.


나중에 스타벅스 직원이 우리 카페에 와서 얘기해주기를, 평소에는 정시퇴근을 했지만 범행이 일어난 그따라 손님이 많아서 마감이 늦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 머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남자가 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와서 도와달라고 요청바로 문을 잠그고 머리를 지혈해주며 앰뷸런스 올 때까지 함께 있었다고 한다. CCTV에서 본 가해자가 끌고 다니던 쇠파이프에는 피해자의 피가 잔뜩 묻어있었던 것이다.


진상 아주머니들로 힘들고 지쳐서 평소보다 빨리 마감정리를 했고 덕분에 위험 상황에서 벗어났다는 점에 있어서 진상 아주머니들께 감사함을 표하려 한다. 역시 인생은 아이러니가 넘쳐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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