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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Feb 10. 2023

시트콤 같았던 출국 전 일주일

'우당탕탕 그 잡채'

갑자기 결정된 멜버른 여행이라 이것저것 신경 쓸게 많았지만 정말 지난 일주일은 말 그대로 우당탕당 그 자체였다. 미리 계획을 짜고 효율적인 동선으로 움직이는 걸 선호하는 내가 예상밖의 일을 마주하며 허둥지둥 대다 보니 여행의 설렘이 성가심으로 바뀌기 직전이었다.


2월 1일 수요일 저녁, 한참 캐리어에 짐을 넣고 빼면서 무게를 열심히 맞추는 도중, 협탁에 올려둔 다육식물 화분이 엎어졌다. 캐리어가 협탁을 친 것 같지도 않은데... 일 년 넘게 한 번도 쓰러진 적 없다가 하필 구석으로 흙이 흩뿌려져 주변 물건들을 모두 치우고 흙을 다시 화분에 담았다. 그런데 얇디얇은 내 잠옷 상의에 살짝 스쳤는데 그대로 또 저항 없이 쓰러지며 다시 한번 흙 잔치 2차전에 들어갔다. 마치 고양이가 집사 기강 잡으려 툭 하고 친 것처럼 힘없이 쓰러지는 그 광경에 실소를 터트렸다. 그래 한 달간 집 비우기 전에 평소에 잘 청소하지 못한 구석을 치우라고 시위하는 건가... 그렇구나... 애써 좋게 받아들였고 흙도 많이 말라있었어서 물을 주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마음으로 분노를 가라앉혔다. 그러나 앞으로 일어날 일을 다육식물이 미리 경고라도 한 듯, 며칠 후 더 난감한 상황이 펼쳐졌다.


다육식물이 안 예뻐보일 때 1, 2.


토요일 아침, 정말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자고 만족스럽게 일어났다. 알고 보니 늘 굉음을 내던 냉장고가 미세한 소음조차 없었다. 그렇다. 작동이 멈춰있었다. 두꺼비집을 확인해 보니 차단기가 내려가있었고, 수동으로 올릴 수도 없었다. 뭔가 잘못됐음을 깨닫고 곧바로 방재실에 연락했고, 직원분은 냉장고 고장으로 인한 누전사고라고 했다. 냉장고 전원코드를 뽑으니 다시 차단기는 올라갔고 연결된 다른 공간들은 정상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아파트 옵션으로 있던 냉장고여서 AS센터에 연락했지만 역시나 주말에는 근무하지 않았다. 토요일과 일요일, 최소 이틀간은 냉장고를 사용할 수 없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냉장고 청소를 하게 되었다. 여행 가기 전까지 최대한 냉장고를 비우고 있었기에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평소 요리하는 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각종 소스와 밀가루, 전분 등 식품들을 전부 버리기엔 너무 아까워서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우선 발코니가 따로 없는 집이라서 외풍이 많이 들어오고 시원한 공간이 어딜까 생각했을 때, 보일러실이었다. 소스들을 보일러실로 옮겼고 나머지 신선식품들은 모두 음식물 쓰레기가 되었다. 음식물 쓰레기를 한 번에 이렇게 많이 버린 적이 또 있었던가... 총무게가 2.7킬로 정도로 찍혔던 것 같다.


그런데 일요일에 또 다른 시련이 내려졌다. 세탁기 호스에 이염방지 티슈가 빨려 들어가서 물이 안 빠지고 계속 에러가 떴다. 호스 뚫어주려고 밸브를 살짝 열었다가 고여있던 물들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는 바람에 집은 온통 물바다가 되었다. 이번이 벌써 두 번째다. 이염방지 티슈를 안 넣으면 색깔 있는 옷들이 서로 이염되고, 또 넣자니 자꾸 호스에 끼어버리는데 어찌해야 할지 난감하다. 이미 한 번 경험이 있었기에 얼른 걸레들을 다 꺼내서 닦아내고 화장실로 물을 밀어내고 말 그대로 '생쇼'를 했다.


그렇게 본의 아니게 물청소까지 끝내고 물광 뿜뿜 하는 바닥 위에 널브러져 온라인 면세점에서 구매한 상품들이 문제없이 인도장으로 이동됐는지 확인하려 어플에 들어갔다. 그런데 아니 웬걸, 내가 주문한 향수는 주문취소 처리완료 되어있었고 선글라스만 이동완료 되었다고 나왔다. 따로 연락받은 것도 없었고, 어플 알람도 울리지 않았기에 무슨 영문에서 취소된 걸까... 그저 재고부족으로 자동취소가 된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재구매 버튼을 눌러보니 할인율이 줄어들어 가격면에서도 큰 매력이 없어서 구매욕이 확 떨어졌다. 아, 최근에 조부모님 성묘 갔을 때 로또번호 알려달라고 때 썼는데 이런 식으로 요행을 바라지 말고 한 푼 두 푼 아끼라는 계시인 걸까.


그나마 다행인 건 월요일 오전에 바로 냉장고 AS접수를 했으며, 나의 간절한 읍소가 통했던 건지 감사하게도 당일 오후에 바로 기사님이 방문하셨다. 한 시간 좀 안 되는 시간 동안 요리조리 뜯고 고치시더니 다시 차단기가 정상적으로 올라가는 걸 확인 후 시크하게 떠나셨다. 보일러실에 갖다 둔 소스들을 다시 다 냉장고에 넣어두고 마음 편히 최종적으로 짐을 쌀 수 있었다.


이제 정말 더 이상의 문제는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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