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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Apr 05. 2023

10년 만의 모교 방문

사냥 안 배웁니다. 탑에 올라가지 않습니다.

멜버른에서 지내면서 바로바로 글을 써서 올리고 싶었지만 상황이 마땅치 않았다. 집에서는 조카 재롱떠는 거 보느라 시간이 없었고 그 외의 시간은 몇 년 만에 만난 친구들과 만나서 밀린 수다 떠느라 계속 미뤄다. 그렇게 순식간에 한 달이 지났고, 귀국한 지 또한 한 달이 되었다. 멜버른에서의 일들은 차차 작성하겠지만, 여행 마지막 날 10년 만에 방문한 모교에 대한 감정을 먼저 글로 남겨놓고 싶었다.


귀국 전 며칠간은 공항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친구네에서 머물렀다. 친구는 며칠간 휴가를 내고 구석구석 맛집들로 데리고 다녀줬지만 출국날에는 어쩔 수 없이 출근했다. 비행기 시간도 익일 새벽이기에 시간은 충분했고, 친구 퇴근시간까지 나 홀로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마침 친구가 사는 곳은 내가 중고등학생 때 수도 없이 지나치던 방앗간 같은 곳이었다. 비록 대규모 쇼핑센터가 들어서고 아파트도 많아지면서 낯설게 느껴졌지만, 하교하고 교복 입은 채로 들리던 도서실과 카페 Gloria Jeans는 예전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추억에 잠겨 동네를 둘러보다가 15분 거리에 있는 모교 방문을 즉흥적으로 결정했다.


학교 이름은 Huntingtower로, 나름 상위권의 학교지만 규모가 워낙 작았어서 그런지 유학생들 사이에선 크게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내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유학생은 전교생 통틀어서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현지인 사이에서조차 사냥 배우는 곳이냐고, 타워에 올라가서 보초 서냐며 놀림받곤 했지만, VCE(빅토리아주의 수능과 같은 입시제도) 성적도 높았고, 수영 시합에도, 음악 경연에서도 모두 상을 휩쓸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꾼들이 많이 있다.


내가 12학년(고3) 때 우리 학년 수는 총 70 여 명으로 한 수업에 20명을 넘기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친구들의 부모님이 학교 선생님으로, 행정 직원으로 일하는 분들이 많았어서 선생님들과 사이는 더욱 친구처럼 가까웠다. 만 18세가 지나 법적인 성인이 되었기에 동등한 어른으로 대우해 주는 선생님들도 있었고, 어떤 친구들은 부모님께 '엄마', '아빠'라는 호칭 대신 이름을 부르기도 했다.



 Huntingtower 가는 길. 역에서 내려서 조용한 주택가를 걷다보면 후문이 나온다.


설치된 태블릿 PC에 등록하면 이렇게 스티커를 만들어준다. 굉장히 아래에서 찍히기 때문에 투턱을 넘어선 쓰리턱까지 만들어진다. 야호 신난다.

원래 계획은 조용히 혼자서 학교를 둘러보고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치원생부터 다니는 학교다 보니 외부인이 돌아다니는 것에 굉장히 민감하기에 방문객 등록을 위해 행정실로 갔다. 거기서 마주친 분이 Mr. Kitchingman이었다. 이 분 역시 아들과 딸이 Huntingtower를 졸업했으며 아들이 누군지 어렴풋이 떠오르기도 했다. 내가 졸업한 년도를 말씀드리니 학생회장이었던 친구의 이름을 언급하며 서로 기억을 맞춰봤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새로 지어진 곳을 보여주겠다며 투어를 시켜줬다.


졸업한 지 10년도 넘었으니, Mr. Kitchingman을 편히 Rob이라고 부르며 학교 다닐 때를 회상하고 추억을 나누며 돌아다녔다. 어른의 이름을 친구처럼 부르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지 조금은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방문한 날이 마침 Camp Week이라서 학교에 사람이 많이 없었지만 오히려 더 좋았다. 괜히 기웃거리면서 학생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고, 선생님들도 대부분 은퇴하셨다고 해서 어차피 만나 뵐 수 없었다. 사전에 계획하지도 않았던 방문이라 작은 선물 하나 없었기에 차라리 사람이 없는 게 마음이 편했다. 그리고 뭐 대단한 선배라고 괜히 인사시키고 그러는 게 낯부끄럽게 느껴질 것 같았다. 언젠간 학교에서 연설 한 번 해달라고 초청받는 그럼 위치에 올라설 수 있는 만큼의 능력을 갖출 수 있길...

Huntingtower 정문과 후문. 기차역에서 걸어가면 후문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다행히 열려있었다.



우선 가장 큰 변화는 작고 아담했던 강당이 2층 규모의 빌딩으로 새롭게 지어졌다. 졸업식은 근처 대학교 강당에서 진행해야 할 만큼 전교생을 모두 수요 할 수 없었는데 현재는 가능하다고 한다. 그리고 지역 큰 행사가 있을 때 장소대관을 할 만큼 규모뿐만 아니라 조명, 음향 등의 시설도 수준 높았다.


(왼쪽부터) 퍼포밍아츠센터 외관, 로비, 내부


Rob과 대화하느라 모든 장소들을 사진으로 찍진 않았지만, 지난 10년간 학교가 얼마나 많은 변화를 겪었는지 알 수 있었다. 창의융합형 인재 배출을 위해 풋볼경기장 한편에 재생에너지만 사용하고 이를 연구하는 작은 공간도 있었다. 12학년의 커먼룸도 우리 때보다 훨씬 좋아졌다. 우린 거의 고장 난 전자레인지 하나가 학교에서 제공해 준 게 다였고, 친구가 부모님 몰래 가져온 토스트기 한 개만 있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물병이나 접시 모두 화장실에서 씻었던 우리와 달리 지금은 전용 조리공간, 작은 마당과 농구코트도 있었다. 정말 '라떼는...'이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올 정도로 훨씬 쾌적한 공간으로 변해있었다. 18개월 된 조카를 빨리 웨이팅 리스트에 올려둬야......


그리고 내가 학교 다닐 때 플루트를 연주했다고 하니 음악 건물에도 데려갔다. 당시 모든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던 Mrs. Bramble은 은퇴하셨고 개인레슨만 가끔 하신다고 한다. 그리고 새로 온 지휘자분은 바순 전공으로, 현악기 전공자였던 Mrs. Bramble때와는 다르게 브라스와 우드윈드의 비중이 커지고 있다는 얘기에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Senior Orchestra, Middle School Orchestra, Concert Band 이렇게 세 곳의 팀원이었기에 연습을 위해서 일주일에 3번은 늘 30분씩 일찍 등교해야 했다. 그리고 합주공간을 보고 있자니 마치 그때로 돌아간듯한 기분마저 느꼈다. 아침잠 5분이 소중했던 그때 30분이란 시간은 체감상 너무 컸지만, 덕분에 9학년부터 3년간 Music Scholarship을 받아 학비의 부담을 조금 줄일 수 있었다.


오케스트라 합주실. 교내 행사가 있을 땐 벽면 창을 모두 개방했고, 사람들이 잔디에 앉아서 연주를 감상했다.


그리고 너무 신기하게도 마침 내가 방문한 시간에 플루트 개인레슨이 진행 중이었고, 선생님도 10년 전 날 가르쳤던 동일한 분이셨다. 레슨 받던 학생에게 양해를 구한 뒤, 선생님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8년간 연주했지만 10년을 놓고 있던 플루트를 다시 시작해 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AMEB라고 악기 급수 시험이 있다. 플루트는 8급이 아마추어 연주자 중 가장 높은 등급이었고, 나는 4급을 따고 5급 준비 중에 개인레슨을 그만둔 것 같다. 아니다, 5급 땄었나? 굉장히 헷갈린다. 그래서 중급 이상의 실력이었기에 꾸준히 할걸이라는 후회도 좀 밀려왔지만, 개인레슨비와 급수시험을 보러 갈 때마다 드는 비용이 부담스럽긴 했다. 4급 이상부터는 별개의 이론시험도 통과해야 했고, 접수비용, 피아노 반주자 페이(시험 당일과 리허설), 악기 관리비 등 생각보다 많은 지출에 비해 얻는 만족감은 크지 않았던 것 같다. 


멜버른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확실히 국내 학생들보다 더 많은 기회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플루트 외에도 여름엔 배구와 축구팀에서, 겨울엔 필드하키 팀원으로 매주 다른 학교와의 대항전이 열렸다. 그리고 전교생은 입학과 동시에 네 개의 '하우스' 중 하나에 소속된다. 하우스끼리 수영 시합도 하고, 체육대회, 음악 경연 등 다양한 연례행사들이 있다. 과거로 돌아간다면 더 열정적으로 임했을 것 같다.



(왼쪽부터) 교내 수영장, 하키 필드, 체육관을 배경으로한 픽업존 필름사진. 인스타그램 @_u__oo_u__ 에서 필름 사진 더 볼 수 있어요. 한 번 놀러오세요 :)


마지막으로 수영장을 둘러보러 체육관에 들어선 순간 정말 반가운 분과 마주쳤다. 나는 한눈에 누군지 알아차렸다. Mrs. Anstee, 같은 반 남학생의 엄마이자 모든 학생들에게 따듯하게 대해준 행정직 선생님이다. 체육관으로 근무지를 옮긴 Mrs. Anstee의 사무실 벽면에는 아들, 딸 사진과 학교 행사 사진들로 가득했다. 많은 사진 중 가장 눈에 띈 사진은 농구 유니폼을 입은 다섯 명의 턱수염 가득한 아저씨들과 그중 한 명에게 소중히 안겨있던 갓난아기였다. 급격히 늙어버린 모습에 경악을 했지만 5명 모두 내 동창으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한 명은 Mrs. Anstee의 아들). 이 친구들은 졸업하고서도 계속 학교 소속으로 농구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설마 했지만, 아기를 안고 있던 친구는 아빠가 된 것이 맞았다. 대체 왜 저렇게 턱수염을 기르냐고 Mrs. Anstee한테 여쭤봤더니 본인도 너무 이해가 안 된다며 사진을 한 번 째려봤다. 아들이 면도하고 멀끔하게 다니는 걸 원하는 건 만국 공통인가 보다.


아빠가 된 친구는 범죄학을 전공하고 소년원에서 근무 중이라고 하며, 고등학교 선생님이 된 친구, 영국에 있는 회사로 이직한 친구 등 여러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대부분 7년 이상의 시니어급 경력을 쌓아가며 진정한 독립을 이뤄나간 친구들이 많았다.



이렇게 학교를 돌아다니다 보니 새삼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것이 피부에 와닿았다. 보편적으로 한국 또래들보다 외국 친구들이 더 일찍 독립을 하고 가정을 꾸려서 그런지 새삼 조급해지기도 했다.


작년에만 청첩장을 9개 정도 받았다. 하지만 모두 나보다 나이가 많은 언니, 오빠들의 결혼식이어서 그저 축하하는 마음뿐이었다. 결혼을 꼭 해야 한다는 주의도 아닌지라, 나를 그들과 비교하거나 불안해하진 않았다. 그러나 나와 동갑이라면 또 얘기가 달라진다. 단순히 결혼 여부를 떠나, 계속 제자리걸음하고 있는 나에 비해서 적극적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친구들을 보니 내가 너무 안일하게 살아왔음을 반성하게 되었다.


모두 각자의 페이스가 있다고는 하지만, 평균적인 연령대에 맞는 사회적 위치가 있다. 그리고 마음 아프지만, 냉정하게 내 현실을 봤을 땐 한참 뒤처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이게 전부는 아니지만 확실히 자극은 되었다. 그간 개인적인 일들로 필요 이상으로 무기력하게 지냈던 것 같고, 한 번 주저앉아버리니 다시 시동을 거는 것조차 막막하긴 하다. 그래도 한 달간 멜버른에서 지내면서 조카의 순수함도 보고, 열심히 각자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도 만나면서 기분을 환기시킬 수 있어서 좋았다. 통장 잔고는 더 아슬아슬해졌지만, 그만큼 더 절실하게 살아가겠지. 10년 뒤에는 좀 더 떳떳하고 멋진 졸업생이 될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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