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 안 배웁니다. 탑에 올라가지 않습니다.
귀국 전 며칠간은 공항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친구네에서 머물렀다. 친구는 며칠간 휴가를 내고 구석구석 맛집들로 데리고 다녀줬지만 출국날에는 어쩔 수 없이 출근했다. 비행기 시간도 익일 새벽이기에 시간은 충분했고, 친구 퇴근시간까지 나 홀로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마침 친구가 사는 곳은 내가 중고등학생 때 수도 없이 지나치던 방앗간 같은 곳이었다. 비록 대규모 쇼핑센터가 들어서고 아파트도 많아지면서 낯설게 느껴졌지만, 하교하고 교복 입은 채로 들리던 도서실과 카페 Gloria Jeans는 예전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추억에 잠겨 동네를 둘러보다가 15분 거리에 있는 모교 방문을 즉흥적으로 결정했다.
Rob과 대화하느라 모든 장소들을 사진으로 찍진 않았지만, 지난 10년간 학교가 얼마나 많은 변화를 겪었는지 알 수 있었다. 창의융합형 인재 배출을 위해 풋볼경기장 한편에 재생에너지만 사용하고 이를 연구하는 작은 공간도 있었다. 12학년의 커먼룸도 우리 때보다 훨씬 좋아졌다. 우린 거의 고장 난 전자레인지 하나가 학교에서 제공해 준 게 다였고, 친구가 부모님 몰래 가져온 토스트기 한 개만 있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물병이나 접시 모두 화장실에서 씻었던 우리와 달리 지금은 전용 조리공간, 작은 마당과 농구코트도 있었다. 정말 '라떼는...'이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올 정도로 훨씬 쾌적한 공간으로 변해있었다. 18개월 된 조카를 빨리 웨이팅 리스트에 올려둬야......
그리고 내가 학교 다닐 때 플루트를 연주했다고 하니 음악 건물에도 데려갔다. 당시 모든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던 Mrs. Bramble은 은퇴하셨고 개인레슨만 가끔 하신다고 한다. 그리고 새로 온 지휘자분은 바순 전공으로, 현악기 전공자였던 Mrs. Bramble때와는 다르게 브라스와 우드윈드의 비중이 커지고 있다는 얘기에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Senior Orchestra, Middle School Orchestra, Concert Band 이렇게 세 곳의 팀원이었기에 연습을 위해서 일주일에 3번은 늘 30분씩 일찍 등교해야 했다. 그리고 합주공간을 보고 있자니 마치 그때로 돌아간듯한 기분마저 느꼈다. 아침잠 5분이 소중했던 그때 30분이란 시간은 체감상 너무 컸지만, 덕분에 9학년부터 3년간 Music Scholarship을 받아 학비의 부담을 조금 줄일 수 있었다.
그리고 너무 신기하게도 마침 내가 방문한 시간에 플루트 개인레슨이 진행 중이었고, 선생님도 10년 전 날 가르쳤던 동일한 분이셨다. 레슨 받던 학생에게 양해를 구한 뒤, 선생님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8년간 연주했지만 10년을 놓고 있던 플루트를 다시 시작해 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AMEB라고 악기 급수 시험이 있다. 플루트는 8급이 아마추어 연주자 중 가장 높은 등급이었고, 나는 4급을 따고 5급 준비 중에 개인레슨을 그만둔 것 같다. 아니다, 5급 땄었나? 굉장히 헷갈린다. 그래서 중급 이상의 실력이었기에 꾸준히 할걸이라는 후회도 좀 밀려왔지만, 개인레슨비와 급수시험을 보러 갈 때마다 드는 비용이 부담스럽긴 했다. 4급 이상부터는 별개의 이론시험도 통과해야 했고, 접수비용, 피아노 반주자 페이(시험 당일과 리허설), 악기 관리비 등 생각보다 많은 지출에 비해 얻는 만족감은 크지 않았던 것 같다.
멜버른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확실히 국내 학생들보다 더 많은 기회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플루트 외에도 여름엔 배구와 축구팀에서, 겨울엔 필드하키 팀원으로 매주 다른 학교와의 대항전이 열렸다. 그리고 전교생은 입학과 동시에 네 개의 '하우스' 중 하나에 소속된다. 하우스끼리 수영 시합도 하고, 체육대회, 음악 경연 등 다양한 연례행사들이 있다. 과거로 돌아간다면 더 열정적으로 임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수영장을 둘러보러 체육관에 들어선 순간 정말 반가운 분과 마주쳤다. 나는 한눈에 누군지 알아차렸다. Mrs. Anstee, 같은 반 남학생의 엄마이자 모든 학생들에게 따듯하게 대해준 행정직 선생님이다. 체육관으로 근무지를 옮긴 Mrs. Anstee의 사무실 벽면에는 아들, 딸 사진과 학교 행사 사진들로 가득했다. 많은 사진 중 가장 눈에 띈 사진은 농구 유니폼을 입은 다섯 명의 턱수염 가득한 아저씨들과 그중 한 명에게 소중히 안겨있던 갓난아기였다. 급격히 늙어버린 모습에 경악을 했지만 5명 모두 내 동창으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한 명은 Mrs. Anstee의 아들). 이 친구들은 졸업하고서도 계속 학교 소속으로 농구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설마 했지만, 아기를 안고 있던 친구는 아빠가 된 것이 맞았다. 대체 왜 저렇게 턱수염을 기르냐고 Mrs. Anstee한테 여쭤봤더니 본인도 너무 이해가 안 된다며 사진을 한 번 째려봤다. 아들이 면도하고 멀끔하게 다니는 걸 원하는 건 만국 공통인가 보다.
아빠가 된 친구는 범죄학을 전공하고 소년원에서 근무 중이라고 하며, 고등학교 선생님이 된 친구, 영국에 있는 회사로 이직한 친구 등 여러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대부분 7년 이상의 시니어급 경력을 쌓아가며 진정한 독립을 이뤄나간 친구들이 많았다.
이렇게 학교를 돌아다니다 보니 새삼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것이 피부에 와닿았다. 보편적으로 한국 또래들보다 외국 친구들이 더 일찍 독립을 하고 가정을 꾸려서 그런지 새삼 조급해지기도 했다.
작년에만 청첩장을 9개 정도 받았다. 하지만 모두 나보다 나이가 많은 언니, 오빠들의 결혼식이어서 그저 축하하는 마음뿐이었다. 결혼을 꼭 해야 한다는 주의도 아닌지라, 나를 그들과 비교하거나 불안해하진 않았다. 그러나 나와 동갑이라면 또 얘기가 달라진다. 단순히 결혼 여부를 떠나, 계속 제자리걸음하고 있는 나에 비해서 적극적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친구들을 보니 내가 너무 안일하게 살아왔음을 반성하게 되었다.
모두 각자의 페이스가 있다고는 하지만, 평균적인 연령대에 맞는 사회적 위치가 있다. 그리고 마음 아프지만, 냉정하게 내 현실을 봤을 땐 한참 뒤처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이게 전부는 아니지만 확실히 자극은 되었다. 그간 개인적인 일들로 필요 이상으로 무기력하게 지냈던 것 같고, 한 번 주저앉아버리니 다시 시동을 거는 것조차 막막하긴 하다. 그래도 한 달간 멜버른에서 지내면서 조카의 순수함도 보고, 열심히 각자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도 만나면서 기분을 환기시킬 수 있어서 좋았다. 통장 잔고는 더 아슬아슬해졌지만, 그만큼 더 절실하게 살아가겠지. 10년 뒤에는 좀 더 떳떳하고 멋진 졸업생이 될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