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에 대한 내 기억은 온통 결핍과 상처로 가득 차 있다. 마음을 터놓을 친구도 애정 어린 조언을 해 줄 어른도 주위에 없었다. 한창 잘 자고 잘 먹어야 할 성장기에 여러 날 밤을 답이 없는 고민으로 눈물범벅이 되어 잠을 설쳤고 눈치 보느라 양껏 먹지도 못했다. 부모님이 부부싸움을 하는 날에는 여기저기 부서지거나 흐트러진 세간을 치우기에 급급했다. 차라리 남동생처럼 슬며시 밖에 나가서 놀다 올 걸 그랬다. 어린 마음에 어려운 가정형편이 너무 싫었고, 술만 드시면 폭언과 폭행을 일삼는 아버지를 많이 원망했었다.
중, 고등학교 시절 학교가 멀어 지각할까 봐 늘 마음 졸이며 만원 버스에 시달렸다. 책가방은 어찌나 무거운지. 다른 부모님들은 자녀 통학거리 감안해서 학교 가까이로 이사를 가기도 한다는데, 가부장적인 아버지는 본인 일터 가까운 곳에 살고 싶어 하셨다. IMF 금융위기 때 아버지 사업이 궁지에 몰려 가세가 완전 기울었다. 돌이켜보면 아버지 인생에서 경제적으로 그나마 형편이 괜찮았던 시기는 겨우 몇 년에 불과했다. 학원은 안 보내 주셔도 학교는 보내 주셨고, 비싼 음식은 안 사주셨어도 세 끼 굶지는 않았으니, 감사해야지. 덕분에, 무사히 대학교 졸업해서 취직도 하고 결혼도 하고, 이제는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그렇게 술과 담배를 좋아하시던 아버지가 얼마 전 일흔을 앞두고 췌장암 판정을 받으셨다. 일전에, “야야…요즘 소화가 안되고 체중이 자꾸 줄어든다.”하시며 불편함을 호소하셨는데 “연세가 있으셔서 그렇죠.”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바람에 병원을 늦게 찾았다는 사실에 자책했다. 좀 더 새겨 들었어야 했는데, 더 빨리 병원에 모시고 갔어야 했는데, 후회가 밀려왔다. 아버지는 “이대로 죽으면 그만이지!”, 말씀은 그렇게 하시면서도 항암치료도 열심히 받으시고 췌장암에 좋다는 음식들을 챙기신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 주말에 집 근처 도서관에 공부하러 간 적이 있는데 필통을 깜빡하고 집에 두고 오는 바람에 전화를 했더니, 아버지께서 쏜살같이 가져다주셨던 기억이 난다. 대학 입학시험을 치르고 바라던 대로 지방의 국립대에 합격했을 때, 이 세상 누구보다 기뻐하셨던 분이 바로 아버지셨다. 맏딸이 착실하게 공부 잘하는 걸 주위에 자랑거리로 삼으시곤 했다.
가만히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보면 당신도 넉넉지 않은 형편에 자식 셋 키우시느라 가장으로서의 무게감을 감당하기에 버겁기도 고달프기도 하셨으리라. 술과 담배로 잠시나마 시름을 더셨을 거라고 짐작이 된다. 지금의 내 나이 즈음 당시의 아버지를 떠올리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호통을 치시고 무서울 게 없는 듯 기운이 세셨는데, 이제 내 앞의 칠십 노인은 50kg도 안 나갈 정도로 수척해져 뼈만 앙상히 남았다. 혹여나 항암치료에 차질이 생기거나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아버지를 잃을까 봐 덜컥 겁이 났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식구들 중에 가장 서럽게 울 사람은 바로 나일 거라는 확신이 든다.
결혼하고 회사 다니랴 아이 키우랴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뵙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최근에는 특별한 용건이 없어도 일부러 전화를 드리곤 한다. 전화기 너머 내 목소리를 반기시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번 주말에는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전복죽이랑 소고기죽 끓여서 아들 녀석 데리고 친정에 가야겠다. 조만간 막내 여동생이 결혼을 앞두고 있다. 예식장에서 신부 입장할 때 동생 손 꼭 잡고 옆에 계셔 주시길 간절히 바란다. 여태껏 마흔이 넘도록 아버지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이제는 말해야겠다. 더 늦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