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만드는 자신만의 의미
한국에는 추석이라는 명절이 있다고 설명해주며 저녁이라도 같이 먹자는 내 제안에 친구가 자신의 집으로 초대를 했다. 실은 나도 내 외국 친구들도 추석(Mid Autumn Festival)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은 아니다. <추석>은 저녁을 같이 먹자는 제안의 오프닝 멘트였을 뿐이다.
오늘 저녁식사의 호스트인 베트남 친구는 베트남에서 직접 가져온 것이라며 본 차이나 접시를 보여준다. 한국이나 베트남 엄마나 기호는 비슷하다며 정말 오래간만에 듣는 본 차이나라는 추억의 단어에 같이 한참이나 웃었다.
하얀 접시 위에 담긴 오븐에서 구워진 구릿빛의 섹시한 자태를 뽐내는 치킨 한 마리, 형형 색색의 야채 볶음 그리고 병아리콩과 레몬 소스로 만든 홈무스. 마지막으로 크리스탈 잔과 칠레산 레드 와인. 식탁은 완벽한 페스티벌이었다.
"우리 건배하기 전에 각자 축하하고 싶은 일이나 고마운 일에 대해 얘기할까?"
추수감사절도 아니고 새해도 아니고 누군가의 좋은 소식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저녁 식사는 아니지만, 먹음직스러운 홈메이드 음식들과 와인 그리고 친구들과 같이 모여 이곳에 함께 있다는 사실에 혼자 감동하고 있었다.
"어제 대학원 수업을 듣는데 갑자기 신기한 기분이 들었어. 책상에 앉아서 교수의 수업을 듣고 필기를 하고 그룹으로 토론을 하는 지금의 내가 너무 기특하고 고마운 거야. 이렇게 이 자리에 오기까지 잘 살아내주고 용기 내 준 날 축하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난 지금 너무 행복해."
그리고 모두 건배를 했다. 크리스탈 잔들이 서로 부딪치는 말간 소리에 크리스마스 축제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창 밖에는 눈이 내리고 거실 한 구석 벽난로에서 누군가는 마쉬멜로우를 굽고 있을 것만 같았다. 에어컨과 선풍기 두대로 집안을 선선한 공기로 채우고 있었지만 저녁임에도 후덥지근한 한낮의 열기가 느껴지는 싱가포르라는 사실을 잠시 잊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심리적인 순간 여행이었다.
오랜 외국 생활에 가족과 함께 보내지 않는 명절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단지 이제 가족이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더욱 큰 결핍과 갈망을 느꼈다. 있어야 할 것이 사라져 버렸다는 상실감과 그래서 더욱 소유하고 싶다는 강한 원함. 어떤 시간과 공간에 함께 있어야 할 우리가 만들어 놓은 기본이라고 정해놓은 형태들에서 벗어났을 때 느껴지는 소외감.
그래서 지금부터는 모든 것들에 내 방식과 형태와 의미를 찾아가기로 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지난 2년간의 나 자신과의 대화는 내가 변할 수 있는 가장 크고 강력한 이유였다. 나 자신과의 대화에 대한 스스로의 인식은 세상과 나 자신, 그리고 세상과 소통하는 스스로를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에 가장 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추석은 오직 가족들과 보내는 날이 아니다. 내가 행복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면 축제가 된다. 무언가 부족함에 집중하지 말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집중하고 감사하자.
나와 네가 다르듯 나의 추석은 그들의 추석과 다르다. 그래도 괜찮다. 그래도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