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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마이 Dec 14. 2021

나는 우리 오빠를 좋아한다


보통의 여동생들이 오빠를 '엄마 아들, 호적 메이트'라고 부르지만(심지어 부르지도 않고 연락도 하지 않는 남매도 있지만) 나는 오빠를 '애호박'이라는 귀여운 별명으로 부르고 오빠도 나를 '깝순이'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초등학생 땐 등굣길에 엘리베이터도 같이 타기 싫다고 먼저 타고 슝 가버리던, 학교에서 눈 마주쳐도 인사도 안 하고 쌩 지나치던 오빠가 어느샌가 나보다 훨씬 먼저 철이 들어버리고 억울한 일을 겪어도 혼자 울고 참는 바보가 되어 있었다.



얼마  함께 치맥을 하다가 우리가 중학생  동두천으로 이사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고향이었던 부천에서 오래된 친구들을 두고 갑작스레 떠나와 어린 마음이  아물기도 전에, 전학  학교 아이들에게 괴롭힘 아닌 괴롭힘을 당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진 같은 것도 아니고 시골 양아치들이고 너무 우스워서 웃음이  나는 애들인데. 지금은 얼굴도 이름도  기억  나는데. 나는  시절 집에 도착하면 매일같이 서러운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엄마는 내가 집에 들어오면  어떤 표정으로 눈물을 흘릴지 걱정이  하교시간만 되면 심장이 철렁했었다고. 그런 엄마를 보면서 오빠는 ‘내가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다. 동생 챙겨야겠구나.’ 생각했다고 한다. 자기도 고작 중학생이면서. 평소 같으면 거짓말 아니냐고 웃었을 테지만, 기억을 더듬어보니 같은 학교였던 오빠는 덩치 크고 무섭게 생긴 자신의 친구들에게  동생이 쟤고 쟤한테 잘해주라 당부해뒀었고 복도에서 덩치  오빠들이 “쎄미 안녕~ 쎄미 뭐해~”하고 지나가는   든든했었다.

돌이켜보면  이야기를 가장 오래도록 들어주는 사람은 엄마도 아빠도 아닌 오빠였다. 시시콜콜한 연애사도, 진로에 대한 고민도, 친구와 다툰 이야기도, 억울함에 관한 토로까지도 모두 받아내고 현명한 답을 주는 사람이다. 우리의 대화를 누군가 엿본다면 우문현답의 좋은 예시라고 생각할 정도로.

 


오늘은 갑자기 “힘들수록 성장한다 뭘 하든 파이팅이다”라는 응원 카톡이 와있었다. “지금은 과정이고 기죽지 말아라. 실패해도 되고 다른 거 해도 되니까”라는 말도 덧붙여서. 내가 요즘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얼마나 불안해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잘 아는 사람. “내가 별 거 아닌 사람이란 걸 깨달은 뒤로 사는 게 너무 무섭다”는 답장을 보내고는 “다들 대단해서 그러고 사냐? 별 거 없어도 스스로를 믿고 뭐라도 하는 거지. 네가 널 놔버리면 끝인 거지. 맞네. 네가 널 별 거 없다고 생각하면 별 거 없는 거지 뭐.”하는 따끔한 소리를 들었다. “너 대단해, 네가 왜 별 거 없어”식의 대답보다 훨씬 의미 있었다. 카톡을 주고받다가 눈물이 왈칵 쏟아져서 길에서 커피를 들고 엉엉 울었다.

여느 가족이 그렇듯 다투기도 하지만 각자의 마음 한편에 서로에 대한 깊은 애정과 선을 넘지 않으려는 의지가 있기에 금세 관계가 풀어지곤 한다. 그래서일까? 주말이면 집에 오는 오빠가 시키는 심부름들이 귀찮지 않다. 불 좀 꺼줘라, 옷 골라줘, 신발 골라줘, 밥 차려놔 줘. 그런 사소한 것들을 해줄 수 있어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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