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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밤 Apr 28. 2022

쉽사리 품은 믿음 뒤에

배신의 맛


 “사람을 믿었다가 속았을 때처럼 억울한 적은 없고, 억울한 것처럼 고약한 느낌은 없기 때문에 누구든지 어떡하든지 그 억울한 느낌만은 되풀이해서 당하지 않으려 든다. 다시 속기 싫어서 다시 속지 않는 방법의 하나로 만나는 모든 것을 일단 불신부터 하고 보는 방법은 매우 약은 삶의 방법 같지만 실은 가장 미련한 방법일 수도 있겠다.

믿었다가 속은 것도 배신당한 것에 해당하겠지만 못 믿었던 것이 실상은 믿을 만한 거였다는 것 역시 배신당한 것일 수밖에 없겠고 배신의 확률은 후자의 경우가 훨씬 높을 것이다. “


- 박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세상은 온통 믿음을 전제로 이루어져 있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 달리던 차가 정지하고 나를 갑자기 덮치지 않으리라는 믿음, 주문한 음식에 들어가면 안 될 것이 들어가 나의 내장기관을 해치지 않으리라는 믿음, 수면내시경 후에 결국은 나를 다시 깨어나게 할 것이라는 믿음, 기관에 들어간 내 아이가 몸과 마음을 다치지 않고 별 탈 없이 지내다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 열거하자면 몇 날 밤을 지새워도 모자랄 믿음으로 도배된 세상이다.


그런데 어째 살다 보면 믿음이 깨어져 그 파편이 가슴에 박히는 일들이 부지기수다. 유난히 사람 사이에서 더 그렇다. 믿었는데 배신당했을 때의 상처는 한번 다친 곳을 또 다치는 누적되는 고통을 몰고 온다. 결국엔 다친 기억이 생생한 그곳을 또 다치면 어쩌나 하는 불안과 예민한 긴장을 나도 모르게 장착하게 된다.


스무 살 대학에 합격하고 미리 방문할 일이 있어 캠퍼스에 간 날이었다. 교내를 혼자 걷고 있었는데 아마도 재학생 선배였을 낯선 여학생이 다가와 옆으로 따라붙어 말을 건넸다. 종교 동아리에 초대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당시 그 종교에 관심이 있지는 않았지만 언 몸이 다 녹을 만큼 따스하게 웃어주는 대학이라는 곳에서의 최초의 관계라는 반가움이었을까. 아니면 우연히 길에서 다가온 이도 아니고 같은 학교 안에 있는 사람이니 믿어도 된다고 정당화한 것일까. 판단할 새도 없이 그녀가 웃어주니 나도 웃으며 다음 주 화요일에 교내서점 앞에서 몇 시에 만나자는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고 알겠다고 해버렸다.

아직 시린 늦겨울 바람이 불던 약속된 그날, 나타나지 않는 그녀를 두 시간여는 족히 두리번거리고 몸을 비벼가며 기다렸지만 결국 그녀를 만날 수는 없었다. 삐삐에서 휴대전화로 이동되던 시점에서 아직 그것을 소유하기 전이었고, 삐삐 번호 자체도 교환하지 않았던 것 같다. 왜 나타나지 않느냐며 따져 물을 방도도 없이 하염없이 기다린 기억만 남아있는 것을 보면. 문득 기억의 조작인지 언제 오느냐며 공중전화기에서 음성사서함을 남기던 모습이 스치기도 하지만 아무튼 그녀는 오지 않았고 나는 허탈했다. 신입생의 설렘을 앗아가 버린 회색빛의 스산한 날이었다.


경기도 외곽 어느 시골 깊은 산 중턱 집에서부터 버스정류장까지 40분을 걸어 버스를 타고 도심으로 나가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도착하는 그 길을 나는 혹시라도 그녀가 기다리지 않도록 늦지 않으려 부지런히 종종 대며 갔던 터였다. 차갑고 건조한 느낌으로 남은 그날의 하루짜리 배신감은 금세 잊어버린 듯했건만 20년이 지난 지금도 유난히 선명하다. 그렇게 바람을 맞고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가며 곱씹어 볼수록 화가 났지만 그 화는 결국 너무 쉽게 처음 본 사람을 믿어버리고 그와의 약속을 지키려 노력한 나에게 돌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로도 나는 속내를 알 수 없는 누군가를 다시 믿었고, 또 순간순간 배신당했고 만만해 보인 나를 원망하기를 반복했다. 그날은 그저 배신과 자책의 작은 서막이었을 뿐이었다.


그런 지난한 과정을 거쳐오며 이제 와 문득 드는 생각들은 쓰고 짜고, 지독한 그 배신의 맛들이 결국 나를 조금씩 지켜내는 방법을 깨닫게 해주고 있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나로 인해 그 어떤 아쉬움과 서운함을 조금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은 내 미련과 오만과 착각이 배신의 파편이라도 맞지 않고서는 도무지 떨쳐버릴 것 같지 않았나 보다. 이제는 믿어야 할 것과 믿음을 보류해야 할 것, 애초에 믿음의 ㅁ자도 붙이지 말아야 할 것 등이 어느 정도 구분이 되어가는 중간 수준은 되니 말이다.

쉽사리 품은 믿음 뒤에 배신의 다양한 맛을 보다 보니 최소한의 면역력을 갖춘 정도로는 단단해지게 만들어주고 있구나 싶다. 나를 키운 보약의 고마운 쓴 맛, 그래도 더는 맛보고 싶지는 않은 그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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