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가지 사랑의 언어>를 읽고
우리 부부가 결혼 한 지 19년째를 맞고 있다니 놀랍다. 서로 날을 세우고 격하게 싸웠던 시기가 있다.
대목 시장통같이 정신없는 응급실에서 남편을 만났다. 서로 일하는 모습을 보며 설렜고, 관심이 사랑으로 이어졌다. 분명 사랑에 빠져 결혼했지만 그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했다. 사랑을 지키기 위해 의지를 갖고 노력해야 하는 시기는 예상보다 훨씬 빨리 찾아왔다. 그 노력(결혼 전 알았더라면 아마 난 비혼이 되었을 것이다.)으로 부부 사이를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는 우리 스스로가 얼마나 대견한지 모른다. 나만 노력한 것은 아니다. 남편과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졌던 두 아들까지 격랑의 세월이 있었다. 기대하고, 실망하고, 싸우고, 화해하고, 다시 기대로 시작하여 반복되는 싸움에 서로 지쳐가던 시기에 책을 읽어서라도 답을 찾으려 했다. 그곳에서조차 답을 찾지 못하면 결혼 생활이 곧 끝날 것 같았다. 당시 남편이라는 사람을 이해하고 싶어 이런저런 심리학 관련 책들을 찾아봤다. 비슷한 자기 계발서 책까지. <30년 만의 휴식>, <청소부 밥>, <쿠션>. 특별히 세 권의 책이 기억에 남는다. 변화는 남편이 아니라 나에게서 시작되었을 때 결혼생활의 변화도 시작되었다.
평생 있을 부부 싸움의 양이 정해져 있다면 결혼 후 7년 안에 99.99999%는 쓴 것 같다. 치열하게 싸우고 나니 우리에게도 평화의 시기가 왔다. 지금은 서로가 언짢은 표정만 지어도 한 쪽이 참아 주거나 서로가 싫어할 만한 말과 행동은 아예 하지 않는다. 나에게 부부관계 개선을 위한 책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지난달(6월) 독서모임 선정도서가 <5가지 사랑의 언어>였다. 제목, 출판사에서 풍기는 뉘앙스에 사랑이 넘쳐 오히려 거부감이 든다. 요즘의 나는 선뜻 손이 가지 않을 책이다. 목차만 봐도 책 내용이 짐작 가는 책 맞다. 하지만 독서모임 장점 중 하나는 혼자라면 읽지 않을 책을 읽게 된다는 점이다. 책은 읽는 시기에 따라 눈에 보이는 것도, 이해하는 폭도 달라지기에 기꺼이 읽어보마 마음먹었다. 모임이 5일 앞으로 다가왔는데도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 손도 대지 않았다. 마음속 저항이 있다는 말이다. 그 저항을 이겨내는 것, 거기서 변화의 균열이 만들어진다. 모임을 코앞에 두고 완독한 <5가지 사랑의 언어>는 예상보다 훨씬 좋았다.
부부 상담 사례를 중심으로 쓴 책인데 남편과 아내가 서로의 언어를 알아차리고 상대방이 원하는 방법의 언어를 사용해야 만족스러운 결혼 생활이 유지된다는 내용이다. 수많은 사례를 분석해서 부부 사이에서 원하는 언어를 다섯 가지로 분류하였다.
#1. 인정하는 말
#2. 함께하는 시간
#3. 선물
#4. 봉사
#5. 스킨십
상대방이 중요하게 느끼는 사랑의 언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서로를 외롭게 한다. 나같이 인정하는 말을 중요하게 느끼는 마누라에게 남편이 큰맘 먹고 내민 선물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음식이 맛있다'. '당신이 이 일을 해결하다니 대단하네.' 이런 말들이 훨씬 나를 기쁘게 한다. 내가 전업주부가 힘들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직장에서는 환자와 동료, 상사에게 자주 인정받는데 집안일과 육아는 기본값처럼 당연히 해내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으니 내 존재를 인정하는 말을 들을 기회가 적다. 그러니 집보다는 밖이 더 즐거웠다.
함께하는 시간과 스킨십이 사랑의 언어인 남편은 내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집안 청소를 깨끗이 하고 음식을 맛있게 차려낸다고 내 사랑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남편은 배달음식을 시켜 먹더라도 함께 사진 찍으러 다니고 손을 잡고 걷는 시간에서 더 행복을 느낀다. 결혼 초 저녁 식탁에서 아이에게 화를 내는 남편에게(그땐 그게 밥상머리 교육인 줄 알았나 보다) 난 필요 이상으로 화를 냈다. 마치 내가 정성껏 만든 무대를 남편이 망친 기분이었다. 인정받고 싶었던 저녁 식탁이 엉망진창이 되는 게 끔찍이도 싫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남편은 바쁜 직장일에도 잠시 짬을 내 함께 저녁식사를 하러 왔던 것이다. 그게 남편이 가족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아이들에게 아빠로서 훈육할 시간도 식사 시간밖에 없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훈육보다는 그냥 맛있게 먹어주는 것이 더 도움이 되었겠지만.
자의 30, 타의 70으로 책장을 넘기게 되었지만 책을 읽는 내내 안정과 무뎌지는 감정 그 어디선가에 서있는 중년의 결혼 생활을 자꾸 되새김질해본다. 요가하는데 거슬려 빼놓았던 커플링을 다시 찾아 손가락에 꼈다. 나이 들면서 손가락에도 살이 쪄 몇 년 전 결혼기념일을 맞이해 커플링을 다시 맞췄다. 요가하며 반지를 빼놓았던 날이 많던 나와는 달리 남편 손가락에는 커플링이 오래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남편 손가락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불편해서 뺐다기보다는 내 손가락을 보고 실망해서 슬며시 뺐을 가능성이 있다. 남편은 감정을 말로 일일이 표현하는 사람이 아니다. 내 손가락에 반지를 다시 끼웠다. 굳이 남편에게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를 보는 듯, 안 보는 듯하면서 서로 사랑받기를 원한다. 나에게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은 사람은 우리 집 세 아이만이 아니다. 서로가 힘들 때마다 찾게 되는 사람, 실망해도 또 기댈 수밖에 없는 사람, 나와는 많이 다르지만 이제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도 나의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어 한다.
지난 6월, 책 완독 후 4명이 구글 미트로 만나 독서모임을 했다. 각자 사랑의 언어를 찾아보고, 배우자의 사랑의 언어를 이야기해본다. 마치 부부 상담 워크숍에 온 것처럼 평소보다 솔직한 내면을 드러냈다. 역시나 독서모임은 또 좋았다. 부부관계에서 확장시켜 모든 인간관계에서 마땅히 적용할 수 있는 책이다. 상대방이 무엇에서 관계의 편안함을 느끼는지 알게 되고 표현해 주면 그 관계는 오래 유지된다. 자식과도, 친구와도, 부모와도.
이 책을 읽고 난 후 주위 몇 사람에게 추천했다. 시기적으로 도움이 될 사람들이 보였다. 내가 겪어 낸 시간들이니까. 그 시간 안에 있을 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으니까. 물론 기꺼이 책이라도 읽어서 관계를 회복하고 싶을 정도의 의지는 있어야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