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넓은 집으로 이사 왔다. 컴퓨터 두 대는 자연스럽게 거실 벽 한 면에 두었다. 중학생이 된 두 아들이 게임의 늪에 서서히 빠지던 시기였고 사춘기 호기심에 이상한 동영상에라도 빠질까 싶어 아이들 방에 컴퓨터를 둘 수는 없었다. 아이들 소유의 휴대폰이나 태블릿이 없었던 시기라 애들은 게임이나 동영상을 보려고 거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컴퓨터 사용은 자연스럽게 가족들 모두에게 노출되었다. 나도 다른 부모들처럼 아이들 게임 시간을 관리했었다. 사용 시간을 정해놓고 게임을 시작하지만 시간 내 끝나는 날은 거의 없다. 어쩌다 정해진 시간 내 게임 판이 끝나더라도 아이들은 나 몰래 한 판 더 시작하여 결국 정해진 시간에 깔끔히 게임을 끝내는 날은 없었다. 십 분, 이십 분, 아니 가끔 한 시간씩 질질 끄는 것에 난 짜증을 넘어 화가 치밀었고 언제부턴가 난 부모가 아니라 교도관이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아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집에서 내가 아무리 열심히 게임 시간을 관리해도 아이들은 엄마를 속이며 PC방을 다녔다. 엄마에게 좋은 아들이고 싶은 형제는 엄마를 안심시키기 위해 나날이 거짓말이 늘었다. 아이들의 게임 시간이 늘어나는 것보다 내 자식이 끊임없이 엄마를 속이는 것에 익숙해진다는 사실이 슬펐다. 나도 아이들도 만족스럽지 않은 모자관계다. 아이들은 사춘기가 한창이었고 일이 년 아이들과 부딪히다 보니 깨달음이 생겼다. 중학교 시기는 아이들이 시행착오를 맘껏 누리는 시기라고 내 맘을 내려놓기로 했다. 부모 맘이 물건도 아니고 생각처럼 쉽게 내려지지는 않았다. 내가 정한 게임 관리 시간도 풀어주고 학원 선택도 아이들에게 맡겼다. 아이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게임에 빠졌다. 두 아들이 학교에 가고, 학원 숙제를 하며 결석 없이 학원에 가는 것에 만족하는 날들이었다. 시험날 아침에도, 저녁에도 게임을 하는 아이들. 내 불안이 커지는 날에는 게임중독이라며 아이를 몰아세웠다. 금세 후회하고 믿지 못해 미안하다며 아이에게 사과해야 했다. 이 구역 미친년은 늘 나였다. 너희 문제가 아니라 내 불안이 문제라고 변명했다. 그 이후로도 불안은 자주 고개를 내밀었지만 게임에 관해서는 나보다 이해 폭이 넓은 남편이 날 다독였다. 우리는 언젠가 아이들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시기가 오기를 기다렸다. 말이 좋아 기다린 것이지 어쩌면 영원히 안 올까 봐 겁이 났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 무력했다.
당시 인생 선배의 조언이 귀에 들어왔다. 아이들이 게임을 하는 이유는 현실보다 재밌기 때문이라고 했다. 매우 중요한 포인트로 받아들였다. 내가 아이들을 달달 볶을수록 아이들은 게임 속으로 깊이 들어갔다. 게임 중인 아이들에게 과일을 깎아 갖다 주고 눈 나빠진다며 쉬엄쉬엄하라고 쿨한 엄마 코스프레를 했다. 어깨도 주물러 주고 게임 판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밥을 차렸다. 내 속은 열불이 났지만 아이들을 말린다고 말려지는 시기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두 아들은 천상천하 유아독존 사춘기 시기를 겪고 있었고 부딪히면 나만 힘들어졌다. 아이들과의 관계 딱 그것 하나만 챙겨서 사춘기를 통과하고 싶었다. 집에서 맘껏 게임을 할 수 있으니 아이들은 엄마를 속이며 굳이 게임방을 찾지 않았다. 물론 나도 게임방 출입을 허락했고 이왕이면 담배 연기 적은 곳에 가라 했다. 아이들 거짓말은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과하게 빠져있는 날은 나도 눈치를 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예전보다 엄마의 게임 잔소리가 줄어드니 이제 아이들 스스로 엄마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게임을 너무 많이 한 날은 머쓱해하거나 미안해했다. 이후로도 두 아들의 게임은 꽤 오래 지속되었다.
아이들과의 관계가 괜찮은 상태니 어떤 날은 나에게 자신들 속을 털어놓는다. 게임을 하다 보면 현타가 온다고 했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나 싶기도 하고 예전보다 게임이 재미없다고 했다. 어떤 날은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한다. 물론 그 대가를 충분히 치른 후였고 그 이후로도 게임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게임에 깊이 빠졌다 나온 두 아들 중 한 아이는 이제 공부를 해보겠다면 게임 계정을 삭제했다. 가끔 게임 동영상을 보며 즐기기는 하지만 더 이상 게임에 참여하지는 않는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아이가 가끔 게임을 한다 해도 이 정도는 애교로 넘어갈 수 있다. 이 녀석은 게임 세상보다 현실 세계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다른 한 아이는 여전히 게임을 즐긴다. 공부는 적절히 자기가 만족할 만큼 한다. 공부, 게임, 수면 모두 자기 의지와 계획에 의해 이루어진다. 엄마가 개입할 수 있는 스케줄은 오직 밥 먹는 시간과 메뉴다. 이 아이는 여전히 현실이 재미없다고 한다. 학교 졸업하고 산에 들어가서 책이나 읽으며 살고 싶단다. 아들에게 배부른 소리라고 말하지 않았다. 아이가 정말 원하는 삶일 수도 있으니까. 이 아이는 엄마가 잔소리하기 전에 눈치껏 공부 시작하고 잔소리하기 전에 눈치껏 게임을 끝낸다. 이 아이가 휴대폰으로 이런저런 게임을 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하지만 굳이 간섭하지 않는다. 아이가 겪고 지나가야 하는 시간이라 생각한다. 아무튼 각자 다른 이유로 거실 컴퓨터에서 게임을 하는 두 아들의 시간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두 아들의 PC 게임으로 인해 내가 느끼던 스트레스가 없어진 지 몇 달이 지났다.
가을바람이 분다. 슬슬 가구 배치를 바꿀 시기다. 오늘은 어디를 바꿔볼까 머리를 굴리다 거실 컴퓨터에 시선이 꽂혔다. 더 이상 거실에 컴퓨터를 둘 이유가 없다. 드디어 아이들의 컴퓨터 사용을 감독할 이유가 없어졌다. 이런 날이 오기도 하는구나!
아이들보다 오히려 내가 글 쓴다고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얼마 전 일곱 살 막내딸 잠자리 독립을 시키겠다고 굳게 마음먹었지만 매일 새벽 안방으로 건너오는 딸을 보며 맘을 접었다. 아직은 때가 아닌 걸로 판단하고 딸아이 방을 놀이방으로 바꾸기로 했다. 아이 스스로 잠자리 독립을 한다고 할 때 다시 시작해야겠다. 일단 거실에 있는 컴퓨터를 막내딸 방으로 옮겼다. 이제 거실은 온전한 휴식 공간이 되었다. 책장과 소파, 그리고 초록 식물만 남았다. 난 부모, 학부모, 교도관(?)을 살짝 거쳐 다시 부모로 돌아왔다. 오늘은 두 아들을 키우는 과정 중 특별한 날이다. 아들의 게임이 도대체 언제 나의 고민거리가 되지 않을까 궁금했는데 그런 날이 나에게도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