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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나 May 19. 2022

딸, 딸, 딸, 딸, 아들 중 둘째 딸

나는 딸, 딸, 딸, 딸, 아들 중 둘째 딸이다.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라고 했지만 그 시절 엄마, 아빠는 아들 있는 집이 부러웠나 보다. 1970년대를 시작으로 80년대를 거치며 우리 집은 오 남매가 되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나는 학교에서 부모의 다산을 부끄러워해야 했다. 선생님들이 학생 앞에서 대놓고 무식하여 자식을 많이 낳은 거라 말하던 시기였다. 배운 선생님들의 계몽 의식도 구식이 되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2000년대 들어서며 자녀 출산에 대한 나라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다산을 장려하는 표어와 공익광고가 늘어나며 나의 부끄러움은 흔적도 없이 증발되었다.  

 “아빠, 혼자는 싫어요. 엄마 저도 동생을 갖고 싶어요.”

“아기들의 웃음소리, 대한민국 희망소리”

“두 자녀는 행복, 세 자녀는 희망”

언제는 자식을 적게 낳으라 하더니 이젠 돈까지 주면서 아이를 낳으라 난리다. 정부는 그 시대의 옳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말을 했다. 나의 엄마, 아빠가 시대 요구에 발을 맞추지 못했듯 요즘 부모들도 나라 정책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모습이다. 

2020년 12월, 대구 사는 엄마의 서울 병원 진료 예약 일이 다가왔다. 양쪽 무릎 인공관절 수술 경과를 확인받기 위한 병원 방문이다. 당시 코로나로 상황이 좋지 않아 병원 진료 날짜를 미루려 했지만 여러 가지 검사 예약과 맞물려 그냥 진행하기로 했다. 엄마는 대구에서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온다고 했다. 마음 같아서는 대구로 모시러 가고 싶은데 큰 아이 기말고사도 있고 여섯 살 딸을 데리고 서울에서 대구까지 운전하며 다녀오는 것이 쉽지 않다고 판단했다. 엄마는 대구에서 서울로 오는 고속버스에는 승객이 많다며 여동생이 사는 시골 마을에 가서 고속버스를 타고 오겠다고 했다. 

우리는 오 남매가 아니던가. 셋째 딸인 여동생과 내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만나기로 했다. 일요일 아침부터 동생은 엄마를 태우고 열심히 서울 방향으로 올라왔다. 양평 휴게소(서울 방향)에서 만나 엄마를 내 차에 태워 서울 집으로 왔고 동생은 혼자서 자신의 집으로 내려갔다. 난 왕복 2시간 운전을 했고 동생은 4시간 넘게 운전했다. 미안하고 고마웠다. 

다음날 아침 일찍 병원 진료를 본 후 다시 셋째 여동생과 휴게소에서 만났다. 나보다 배 넘는 운전시간을 기꺼이 감내하는 동생이 고마웠다. 나에겐 여섯 살 딸이 있고, 동생은 고등학생, 초등학교 고학년 아이들이 있다는 것이 동생이 좀 더 올라오는 이유다. 나는 알고 있다. 상황이 허락되어도 모든 사람이 동생처럼 행동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휴게소에 미리 도착한 동생은 화장실을 다녀오며 엄마와 내가 마실 따뜻한 음료도 함께 건넸다. 늘 넉넉한 마음을 베푸는 사람이 셋째 여동생이다. 맘의 여유는 늘 나보다 언니다.

 

시대 요구에 불응했던 엄마, 아빠 덕에 우리 오 남매는 노인이 된 부모를 돌보는 것이 조금 덜 부담스럽다. 경제적, 시간적, 육체적, 심적인 어려움을 모두 나눌 수 있다. 조금 더 가진 사람이 베푼다. 그리고 베푸는 입장과 받는 입장이 가끔 바뀐다. 서로 힘이 된다.

오 남매라서 부끄러웠던 시절로부터 20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우리 가족은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대가족이 되었다. 딸이 많기에 결혼 후 온 가족이 모이는 것에 대한 부담도 적다. 사람이 모이면 필히 발생하는 가사노동의 증가에 덜 민감하기 때문이다. 때론 언니가 동생이 되고, 동생이 언니가 되는 순간들을 맞이한다. 난 딸, 딸, 딸, 딸, 아들의 둘째 딸이라서 좋다.

 

 

 엄마의 서울 병원 방문은 여전히 진행형이며 코로나는 그 어느 때보다 극성인 2022년 3월. 자식 부담을 덜어주고 싶은 마음이 코로나를 향한 두려움보다 더 커진 엄마는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 병원을 다닌다. 자식들 마음도 느슨해지긴 마찬가지다. 서울 병원 진료를 보고 조용한 시골 동네로 내려간 엄마가 감기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셋째랑 전화 통화 후 여동생은 엄마를 찾아가 자가 검사를 해드렸다. 양성이 나왔다. 엄마는 병원 다녀간 이후 만난 사람이 몇 없기에 당연히 감기라고 여기며 혼자 며칠을 앓았던 것 같다. 대구 집에 계신 아빠에게는 굳이 엄마의 확진 소식을 알리진 않았다. 

엄마는 서울병원 진료 후 일부러 사람 많은 대구행 고속버스를 타지 않고 한적한 시골행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갔었다. 이제 와서 뒷좌석에 앉았던 사람이 기침을 많이 했었다는 엄마의 말에 마음이 무겁다. 하지만 이 무거운 마음을 너무 오래 갖고 가지 않으려 한다. 엄마는 회복되었고 부모가 자식을 돌보는 것에도 실수가 있듯 자식도 부모를 보살피는 데 한계가 있다. 딸, 딸, 딸, 딸, 아들 중 둘째 딸은 엄마를 모셔다 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에 수화기를 들었다 놓았다 했다. 엄마는 이미 다른 자식들에 많은 전화를 받았을 것이다. 내 불편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자꾸 전화해 엄마를 귀찮게 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 망설였다. 

‘엄마, 미안해. 내가 모셔다드려야 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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