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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이삭 Oct 02. 2024

엄마의 손을 잡다 (1화)

2024년 6월 말, 엄마와 함께 8박 9일간 동유럽 여행을 떠났다.

생각지도 않았던, 순전히 나의 충동적인 결정으로만 시작된 여행에서 

우리는 조금은 가까워져 돌아왔다. 이 글은 그 시간들에 대한 기록이다.




 프라하 시내를 본격적으로 둘러보는 시간. 우리는 다시 가이드 뒤를 졸졸 따랐다. 이 지역의 역사와 건축물이 가지고 있는 재미있는 스토리를 듣는 것은 즐거웠다. 마냥 작은 도시인 줄 알았더니 몇 걸음 떼면 무언가 나오고 또 몇 걸음 떼면 무언가가 나왔다. 


 걷다가 옆 건물을 보니 벽에 라이너 마리아 릴케 동판 기념물이 붙어있었다. (*릴케의 두상 조각 아래로 설명이 쓰여 있는데, 당시에는 해석할 수 없어 후에 검색해 보니 릴케가 1882-1886년 초등학교를 다녔던 곳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조금 더 걸으니 그 유명한 화약탑이 나왔다. 프라하 여행 책에 꼭 등장하는 화약탑.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예전에 화약 창고 역할을 했다고 한다. 주변에 깨끗한 건물에 비해 유독 검은색 빛깔을 띠고 있는 이 탑은 고딕양식의 화려하고 삐죽삐죽한 디자인으로 만들어졌는데, 프라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나누는 기준점 역할을 한단다. 우리가 이곳을 통과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구시가지 투어가 시작되는 것이다.


 가이드님은 그동안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하셨을까, 이걸 어떻게 다 외우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식이 대단하셨다. 걸음을 옮기면서 설명 듣는 것도 바쁜데, 여기저기 구석구석 보시라 해서 꼼꼼히 챙겨 볼 것이 많았다. 설명을 듣고, 몇 초간 감상에 젖고, 사진 한 장 찍으면 곧장 이동해야 하는데, 시간이 빠뜻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사진을 찍고 돌아보면 엄마가 항상 옆에 없었다. 또 어디로 사라졌나 찾아보면 어느새 저 앞에 있는 가이드님 옆에 착 붙어서 입을 벌리고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다른 일행들을 보면 부부는 부부끼리, 모녀는 모녀끼리, 모자는 모자끼리 팔짱도 끼고 걸음을 맞춰 걷는데, 엄마는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유치원생은 선생님만 잘 따라가면 된다 생각하는 것처럼. 딸이 어디에 있든 일단 나는 선생님을 따라간다는 것처럼. 그러다 어떤 때는 뭘 그렇게 보는지 무리에서 혼자 떨어져 덩그러니 서 있는 경우도 있었다. 까딱하다 길 잃어버리겠다 싶었다. 


 "좀 천천히 가. 그렇게 혼자 가면 길 잃어버려."

 "내가 애냐, 알아서 따라가는데, 뭐" 너는 정말 별 걱정을 다한다는 듯이 엄마는 '흥' 하고 고개를 돌렸다. 나는 엄마의 옷자락을 꼭 움켜쥐었다.


 우리는 널찍한 구시가지 광장으로 이동했다. 틴 성모 마리아 성당, 성 니콜라스 교회, 구시청사가 광장을 둘러싸고 있었고, 한 켠엔 체코의 종교 개혁자로 알려진 얀 후스의 동상이 커다랗게 세워져 있었다. 


 우리는 구시청사 벽에 붙은 천문시계 앞으로 이동했다.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광장에서 이런 천문시계를 종종 본다. 족히 몇 백 년이 되는 시간 동안 거기서 움직였을 시계다. 이곳의 시계는 1410년 만들어졌고, 현재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작동하는 것이라 한다. 


 정각을 알리기 몇 분 전부터 사람들이 그 앞에 구름 떼 같이 몰려들었다. 땡 하고 정각이 되면 펼쳐지는 작은 공연을 보기 위해서다.


 시계는 위, 아래로 크게 2개가 붙어 있었다. 먼저, 위에 있는 시계를 설명하면, 그것은 아래 것보다 훨씬 복잡했다. 둥근 원을 따라 로마 숫자로 24시간이 표시되어 있는데, 바깥 테두리에는 또 시간을 나타내는 옛 체코의 기호가 표시 돼있다. 큰 원 안에는 또 하나의 원이 있다. 이 원의 테두리를 보면 황도 12궁 별자리 기호가 차례로 표시되어 있다. 전체 시계판 바탕엔 하늘색, 빨간색, 검은색 이렇게 색깔이 구분되어 있는데, 이것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새벽시간, 해 뜨는 시간, 해가 지는 시간 또 밤이 됨을 알려주는 것이라 했다. 시계 침엔 태양과 달이 붙어있다. 전체를 보면 한 시계 안에 하나의 우주가 담겨있는 셈이다.


 아래 시계는 그보다 단순했다. 동그란 원의 테두리를 따라 농경 생활 모습이 12개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씨를 뿌리고, 밭을 갈고, 수확을 하고. 1년의 각 계절마다 농사철에 볼 수 있는 농부의 모습이 순서대로 그려져 있는 것이다. 이건 월을 상징하는 달력과도 같은 개념이라고 한다. 그 안에 12개의 별자리 그림이 있다. 윗 시계에 표시된 간단한 기호와는 달리 사람과 동물 형상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복잡한 윗 시계를 지식인들이나 높은 계급의 사람들이 주로 본다면, 아래 시계는 당시 글을 모르는 이들이 쉽게 볼 수 있도록 만든 것이었다.


 시계들 위를 보면 양 옆에 인형들이 붙어있다. 왼쪽 2개, 오른쪽 2개. 


 공연이 시작되면 복잡한 윗 시계에 붙은 인형들에 주목해야 한다. 각 인형은 쾌락, 허영, 탐욕, 죽음을 상징한다. 그중 오른쪽에 붙어있는 해골 인형은 정각이 되면 종을 치는데, 다른 인형들이 두려운 듯 고개를 마구 흔든다.


 그럼 또 그 위에 있는 2개의 작은 창문을 바라보아야 한다. 닫혀있던 2개의 창문의 문이 열리면서 예수의 12제자가 순서대로 나타난다.  이들은 돌아가면서 얼굴을 내밀고 아래 서 있는 사람들을 조용히 바라본다. 한 번씩 밖을 내려 보면 다시 문이 닫히는데, 그럼 또 그 위를 봐야 한다. 그곳엔 황금색 수탉 한 마리가 있다. 이 수탉이 울면 공연이 끝이 난다. 


 1분도 채 안 되는 짧은 공연이지만, 이 공연은 세상사의 철학을 담고 있다.  인간은 부질없는 것들을 추구하며 살아가지만, 모두 결국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일 뿐이라는 것. 아래를 내려다보는 12 사도는 마치 이런 인간들에게 신앙을 통해 항상 깨우치고 성찰하며 살라고 말하는 것 같다. 황금수탉이 우는 것은 새 아침을 알리는 것이고 이는 또다시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을 알린다. 단순한 퍼포먼스가 아니다.  (*기억나는 대로 적었는데, 의미가 맞는지 모르겠다.)


 시계를 바라보는 나에게 '어디를 보면 되냐'라고 엄마가 물었다. 공연 순서에 따라 손가락을 들어 하나씩 짚어주었다. 그리고 가이드 설명을 다시 반복해 알려주었다.


 좀 더 걸어서 카를교로 이동했다. 블타바 강을 연결하는 너무나도 유명한 이 다리. 중세시대로 들어간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다리에 서서 프라하 성을 배경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머나먼 시간 속으로 빠져드는 듯했다. 

 

 다리 양쪽으로는 성인들의 조각상, 예수 그리스도의 조각상들이 길게 늘어 세워져 있다. 중간쯤을 걸으면 소원을 비는 성상도 나온다. 가이드님은 이 다리에 소원 비는 곳이 2곳 있는데, 사람들이 잘못 알고 다른 곳에 가서 소원을 빈다고 했다. 반드시 이곳, 황금빛 성인상이 있는 곳에서 소원을 빌어야 이루어진다고 했다. 나는 여행을 하다가 소원이 이루어주는 동상, 바퀴 등을 만나면 꼭 소원을 꼭 빈다. 엄마에게 자유 시간을 받으면 꼭 여기에 오자고 말했다. 내 마음엔 항상 빌고 싶은 소원들이 있었으니까.


 카를교 아래를 내려가서 또 하나 들러야 하는 곳이 있었다. 바로, 비틀스 존 레넌의 벽이다. 영국도 아니고 뜬금없이 여기 왜?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이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체코가 공산당 치하에 있던 시절, 당이 팝 음악을 듣는 것을 금지했는데 당시 존 레논의 음악이 청년들에게 많은 감명을 주었고, 이들이 초상화와 가사 일부를 벽에 그려 넣었다고 한다. 그 후, 이곳은 청년들이 자유와 저항을 노래하는 곳으로 변모했는데, 현재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역사적 명소이자 유명한 포토존이 되었다.


 사람들이 벽 앞에 얼마나 많이 모여 있던지, 존 레논의 모습이 많은 그라피티와 그림에 가려져 있었지만, 그래도 상관없는 것 같았다. 나와 엄마도 이곳에서 사진을 남기기로 했다. 우리의 사진사 역할은 성을 같이 둘러본 젊은 부부가 해주었다.


 "각각 다른 포즈, 4개 생각해 두세요!"


 사진 찍는 걸 영 어색해하는 나는 자세를 할 때마다 멀뚱멀뚱 서 있는 편인데, 그걸 보던 부부는 엄마와 나에게 어떻게 찍으면 좋을지 알려주고, 자세를 조정해주기도 했다. 어떤 포즈를 할까 하다가 우리는 제일 먼저 하트를 크게 그려보았다. 그리고 팔도 다리도 만세 하듯 크게 벌려보았다. 


 "우리 손 잡장~" 엄마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특유의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애교를 부렸다. 나는 엄마와 마주 보고 손을 잡았다. 


 "손잡고 다리 한쪽을 이렇게 뒤로 들어서 올려." 엄마는 내 말대로 다리 한 짝을 밖으로 들어 올리며 포즈를 취했다. 엄마는 계속 '히히' 거리며 웃었다. 사진 같이 찍는 게 뭐가 그렇게 신나고 좋은 건지 궁금할 정도로.


 젊은 부부에게서 휴대폰을 건네받아 사진을 보니 꽤나 마음에 들었다. 파랗고 자유분방한 그라피티 배경에 우리 두 사람이 딱 어울리게 보였다. 표정도 옷차림도.


 "나 이거 사진 카톡으로 보내줘." 엄마가 말했다. 

 "알았어. 이따 보내줄게"

 "꼭 보내줘. 이걸로 프사 바꿀래." 엄마는 당장이고 바꾸고 싶다며 나를 재촉했다. 영락없는 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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