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홍글씨

[마음 품고 살기 3]

by stamping ink

저녁 9시가 되어도 은별이가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 학원 수업이 끝나고도 한참일 시간인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는 은별이가 걱정되어 지숙은 소파에 앉아 현관문 소리가 들리길 기다렸다.


9시 반, 10시...


즐겨보던 드라마 시간인데 드라마 내용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고 계속 시계만 바라봤다. 지숙은 더는 기다릴 수 없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마음속의 마지노선인 10시가 되자마자 단축번호 2번을 꾸욱 눌렀다. 통화음이 연결되기 시작할 무렵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따라 들어왔다.

"엄마. 나 왔어."

은별이의 말소리를 높이며 다가왔다.

"영어학원에서 단어시험을 봤는데 하나라도 틀리면 안 보내준다는 거야. 농담인 줄 알았는데 정말 한 개라도 틀리면 안 보내주는 거 있지? 원장 선생님이 엄마한테 모두 문자 보냈다던데?"

학원 비상연락처에 남편 휴대폰 번호를 써 두었던 것이 기억났다. 실수로 적어둔 번호를 정정하는 것조차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필 두 달 동안 해외출장 중인 남편이 있는 곳은 깊은 새벽일 테니 스스로 귀찮음에 무덤을 판 것이었다.

"걱정했어."

지숙은 교복을 훌훌 벗고 있는 은별이에게 다가갔다.

"아이..엄마는~ 학원 셔틀로 집 앞까지 다 데려다주고 가끔 늦게 잡아두면 이 시간이었는데 뭘 걱정을 그리했어? 엄마 딸 생각보다 강하다구. 만약 햇살이라면 겁이 많아서 일찍 일찍 들어왔겠지?"


겁이 많은 아이 햇살은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바른 아이였다. 일탈이라는 것을 해 본 적도 없는 어른들이 말하는 착한 아이였다. 병원에는 못 가지만 늘 햇살의 눈을 보며 걱정하는 부모님께 마음을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밝은 척 어두워지려는 두려운 마음을 감추며 살아갔다.

"엄마, 나 조금 있으면 돈 벌 나이잖아. 그때 내가 병원 가서 고치면 돼. 걱정하지 마."

먹고살기 바빠서 잊고 지내다가도 햇살이의 눈을 보면 마음이 무거워지는 부모에게 햇살은 조금이라도 마음을 덜어내려 애를 썼다.


고등학교 2학년의 햇살은 학교에서 진행한 검사에서도 재판정이 나왔다. 이번에 새로 부임하신 보건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들처럼 햇살의 얼버무리는 거짓말에 넘어가지 않았다.

"선생님! 오늘 콘택트렌즈를 한쪽을 못 끼고 왔어요. 그래서 한쪽이 안 보여요."

이 말을 믿는지 귀찮은지 담당들은 잘 보이는 눈의 시력을 안 보이는 눈에도 적어 그냥 넘겼다. 그날도 매년 같은 방법처럼 측정자 앞으로 될 수 있는 대로 바짝 다가서서 아이들이 듣지 못하게 작은 소리로 핑계를 대었다. 하지만 가슴둘레, 체중, 키 등 아이들의 볼멘소리에 질려 버려서였던 찰나였는지 보건 선생님은 햇살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자 반대쪽 가리고!!"

선생님의 언성이 높아졌다. 교실 내에서 측정을 기다리며 수다를 떨던 말 많은 소녀들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찬물을 끼얹은 듯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거!"

소리 나게 지시봉이 시력측정표를 출렁였다. 우물쭈물거리며 보이는 눈을 가린 채 햇살은 보이지 않는 눈으로 측정표인지 무엇인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눈으로 보이는 척을 해야 했다.

"촥촥"

햇살의 들을 수 없는 대답 대신 측정표에 부딪히는 지시봉의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씩씩거리며 보건 선생님은 햇살의 숟가락 모양의 가리개를 집어던졌다.

"야. 대답하기 싫으면 너 병원 가서 검사받아와."

검사 종이가 펄럭이며 바닥에 떨어졌다. 보건 선생님은 옆 줄에 서서 다른 측정을 하는 아이들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옆줄에서 체중 재는 아이들도 성실히 체중을 재기 시작했고, 그 옆줄에서 가슴둘레를 재는 아이들도 가슴을 제대로 내밀어 재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화가 안 풀렸는지 의자를 소리 나게 밀치고는 반장에게 측정 완료 후 기구를 보건실로 옮기라는 지시만 남기고 떠났다.


햇살이가 사는 동네에는 안과라고는 노의사가 진료하는 안과뿐이 없었는데 학교 근처는 번화가여서 안과가 많이 있었다. 수업이 모두 끝나고 햇살은 학교 인근에 있는 안과에 들렀다. 보건 선생님이 떨구고 간 검사지를 공책 사이에 접히지 않게 챙겨 길고 딱딱한 나무의자에 쭈뼛거리며 자리를 잡았다. 간호사는 의료보험증을 챙겨 오지 않은 학생을 되돌려 보내려 했지만 환자가 많지 않던 병원 의사는 진료실로 햇살을 들어오게 했다.


의사가 지시하는 대로 턱을 기계 위에 올리니 의사가 심각하게 햇살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학생. 혹시 빈혈처럼 매일 어지럽지 않았나? 나도 학생 나이의 딸이 있어서 말하는데, 검사비는 많이 들겠지만 부모님이랑 한 번 더 병원에 와 보겠어? 부모님께 와보셔야 할 것 같다고 말씀드리고 꼭 같이 와야 해."


점점 상태가 안 좋아지고 있다는 걸 햇살도 느꼈다. 초점이 맞춰지지 못해 어지러움이 이미 익숙해져 버렸던 때였다. 그래도 의사는 검진표에 시력 칸을 채워 주었다.

좌 0, 우 1.5


그날 햇살은 어린 시절 노의사가 말하던 그때가 왔음을 알게 되었다. 학교에서 집까지 버스로 스무 정거장도 넘는 거리를 걸었다. 해가 뉘엿뉘엿 떨어지고 집으로 올라가는 골목엔 동그란 전구로 된 가로등이 핀 조명을 내려주었다. 그날 깜깜한 밤하늘에 별을 세며 햇살은 집으로 돌아갔다.


"요즘 밤길이라고 하기엔 주변이 너무 밝아서 낮인지 밤인지 모르겠어. 아파트에 경비아저씨도 계속 순찰해주셔서 자주 만나고 10시 정도는 괜찮아."

은별이 되려 지숙에게 10시는 초저녁이라며 괜한 걱정을 한다며 한소리 늘어놨다.

"엄마, 엄마. 근데 우리 클래스에 새로 여자아이가 들어왔는데 외국국적이더라? 눈동자가 아주 파래. 영화 주인공 같더라니까."

파란 눈 아이가 신기했는지 아님 파란 눈 아이가 너무 자연스러운 한국말을 구사하는 게 놀라웠는지 은별이의 학원 경험담을 쉴 새 없었다. 지숙은 마치 은별이와 수업을 같이 듣고 왔던 것처럼 은별이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파란 눈의 아이가 처음에 학원에 와서 입을 떼는 순간 유창한 한국어에 놀랐고, 생각보다 영어에 서툰 것이 너무 신기했던 모양이다.

파란 눈의 아이와 짝이 되어 그 아이의 단어를 같이 봐주다가 함께 남게 되었지만 새로운 친구를 사귀게 되었고 옆 줄에 남자아이들이 장난을 치려할 때 나서서 말렸다며 어깨를 들썩였다. 학교 부회장을 맡고 있어서 책임감이 강한 은별이었다. 지숙은 은별이 어떻게 행동했을지 생각하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너 그러라고 엄마가 태권도 가르친 거 아닌데."

"안 때렸어. 그런 남자애들은 주먹이 아깝다고, 그리고 사실 단어 다 외워갔는데 파란 눈 아이가 처음이라 헤매서 계속 틀리길래 같이 틀려줬어. 혼자 틀리고 집에 못 가면 속상할까 봐. 아. 걔 우리 옆 동에 산다?"

지숙의 키 언저리까지 어느새 온 한별이...

2021 마흐니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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