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택트

끝을 알지라도

by 레이

명작과 망작을 오가는 감독보다는 수작을 꾸준히 만드는 감독을 더 좋아하는데, 최근 몇년 사이 데뷔해 망작 없이 수작을 내오고 있는 감독이 드니 빌뇌브다. <듄> 시리즈를 연출하면서 거장의 반열에 올랐는데, 그 전에 만든 작품들도 일정 수준 이상의 작품성을 담보하는 능력자 감독이었다. 빌뇌브 감독의 작품 대부분을 좋아하지만 가장 기억에 오래 남는 작품은 <컨택트>다. 원제는 <Arrival>, 도착이라는 뜻인데 한국에 수입되면서 컨택트라는 다소 평이한 제목으로 바뀌었다. 심지어 97년작인 <콘택트>와 구분하기 위해 철자는 <컨택트>로 바꾸는 대범함(?)마저 보여줬음에도 한국 제목을 좋아하지 않는 영화팬이 대다수고 나도 그중 하나다. 제목에 관한 논란과는 별개로 작품성에는 별 논란이 없다. 나와 마블 영화만 대부분 같이 봐서 내가 마블 메이트라 부르는 친구도 <컨택트>는 감명깊게 봤다고 했을 정도니까.


<컨택트>는 시간 여행의 딜레마를 아름답게 무마(?)하는 작품인데, 외계인 헵타포드의 언어를 배우며 미래를 볼 수 있게 된 루이스는 중국 대통령의 핸드폰 번호를 몰랐지만 미래에 알게 되기 때문에 전화를 걸 수 있게 된다. 일반적인 시간여행 영화에서는 설정 오류로 여겨지는 부분인데 <컨택트>를 보고 나면 이 영화에서만큼은 이런 설정 오류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엄청난 내용같지만 사실 영화 전체에서는 그닥 중요한 부분도 아닐 뿐더러 미래를 알게 된 루이스가 내리는 어떤 선택이 훨씬 중요하니까. 영화를 볼 때는 이런 문제의 소지마저 영화롭게 녹여내는 감독의 솜씨에 찬탄을 했었다. 원형의 언어를 기반으로 한 원형의 이야기라니, 원작소설을 쓴 테드 창의 능력도 대단하지만 단편소설을 바탕으로 영화 언어로 이렇게 연출해 낸 빌뇌브 감독의 능력에 경악했다.


영화 자체도 재밌게 봤지만 리버풀에 오고 나서 유튜브를 보다가 이동진 평론가의 <컨택트> 해설을 우연히 발견한 적이 있었다. 좋아하는 영화기도 하고 이동진 해설은 믿고 듣는 편이라 지친 날 휴식하듯 해설을 들어봤다. 이동진 평론가의 해설 가운데 유독 내 귀에 꽂혔던 말은 루이스에게 있어 루이스가 내린 선택은 결코 마이너스의 선택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루이스는 자신에게 닥칠 미래를 알았고, 그 미래가 가져다줄 슬픔도 알고 있었지만 미래를 바꾸는 대신 주어진 운명을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루이스는 그 때 네가 가져다줄 행복과 슬픔을 모두 받아들이겠다며 수도승 같은 말을 하는데, 영화를 볼 당시에는 루이스의 초연한 태도에 집중했었다. 이동진 평론가는 이 장면을 두고 루이스가 내린 선택은 그 끝에서 만날 슬픔이 아니라 과정에서 겪을 행복이 더 크다고 생각했기에 가능했던 거라고 해설했다. 그 말이 오랫동안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리버풀에 오기 전에, 나는 내 석사 학위가 내 삶을 구원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공부가 쉽지 않을 것도 알았고, 낯선 땅에 적응하는 게 마냥 즐겁지만은 않을 것도 알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석사 학위가 있다고 해서 내 미래가 탄탄대로가 될 거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었다. 어쩌면 나는 진급과 그동안 벌어들일 수 있는 수입을 포기하고 손해가 될 수도 있는 결정을 내렸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유학을 가지 않으면 언젠가 후회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나는 수많은 실패를 겪었고, 그 가운데에는 그렇게 실패할 거였다면 시작도 하지 않는 게 나았으리라는 선택도 있었지만 내가 시도하지 않았다면 평생 회한이 되었을 선택을 내렸다. 내가 루이스처럼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석사 학위를 마친 후의 미래에 대해 마냥 낙관적인 생각을 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과정에서 내가 많은 것을 배울 걸 알았고, 설령 1년간의 석사 생활의 끝이 초라한 귀국이 된다 할지라도 그럴 가치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를 보는 사람들은 현재의 나에 집중하기 때문에 내가 뭐든지 척척 해내는 엘리트 인생을 살아왔을 거라고 짐작하곤 했다. 대기업에서 현재 가장 핫한 개발자라는 타이틀로 직장 생활을 하고, 늦었다면 늦은 나이에 영국으로 석사 과정을 오는 대담한 선택을 하고. 지금은 피부도 좋은 편이라 만나는 사람마다 어쩜 그렇게 피부가 좋냐고 물어보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 과정을 물어보지는 않았다. 나는 그림을 그리다가 부족한 재능에 슬퍼하며 그만뒀고, 학교 폭력의 피해자였고, 피부병으로 10대를 고통스럽게 보냈고, 외고를 가고 싶었지만 역시 실패했고, 대학 입시로도 마음고생을 했다. 교환학생을 가서는 뒷통수를 맞기도 했고, 취업 준비에 3년 가까운 시간을 쏟으며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 겨우 취업이 되어서는 코딩 공부를 하다가 울기도 했고, 남들 다 하는 진급을 누락당했고, 전배당한 부서에서 사내 괴롭힘도 겪었다. 나처럼 좋은 대학을 나와서 대기업에 취직할 수 있다면 어떤 고통을 겪더라도 같은 결과를 얻고 싶다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과정이 주는 고통을 함께 알려준다면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하다. 솔직히 말하면 아무것도 모르던 8살의 나에게 이 모든 걸 알려주고 그래도 이 인생을 살겠냐고 물어보면 그렇다고 할지 모르겠으니까. 하지만 루이스라면 그 모든 과정과 결과가 주는 기쁨과 슬픔을 모두 받아들이겠다고 대답하겠지.


내 인생의 부정적인 면만 썼지만, 돌이켜보면 그 고통을 통해 내가 얻은 것도 많았다. 나는 그림을 그만뒀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더 풍부한 시각을 갖게 됐고,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줄 알게 됐고, 지금은 피부 미인이라는 말을 듣는다(아토피성 피부를 타고난 사람 중 일부는 성인이 되면서 피부병이 사라지고, 아토피성 피부염을 제외하면 별다른 피부 트러블을 겪지 않는다고 한다). 외고를 준비하면서 수학과 영어를 열심히 공부해둔 덕에 고등학교 때 편하게 보낸 시간도 많았다. 대학 입시로 마음고생을 하긴 했어도 입학한 학교에서 정말 많은 것들을 얻고 배웠다. 지금도 대학 동문들은 나에게 큰 힘이 되어주고 있고, 특히 유학을 오면서 알게 된 직딩유학 3인에게는 고마운 점이 많다. 교환학생을 가서 힘든 일도 많았지만 일어를 할 줄 알게 됐고, 세계 각국에 친구가 생겼고 인간관계에 조금은 자신감이 붙기도 했다. 일어를 하는 덕분에 사자와도 친구가 되기도 했고. 취업 준비로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운좋게 선구자가 됐고 코딩 공부로 고생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은 덕에 결국 개발자라는 타이틀을 달게 됐다. 전배당하면서 비록 진급도 누락되고 사내 괴롭힘도 겪었지만, 세상에 정말 이런 사람이 존재하는구나 싶은 사수도 만났다. 인생이 주는 기쁨에 비해 슬픔이 더 깊게 받아들여지는 게 인간의 생존 기제지만, 동시에 지난 기억을 미화시키는 것 또한 인간의 특성이기도 하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루이스는 극중 중국의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중국어로 그를 설득한다. 루이스가 하는 말은 번역되지 않기 때문에 영화를 볼 때는 무슨 말인지 알지 못했다. 영화를 보고 찾아봐서 지금은 루이스가 한 말이 무엇인지 알지만 그 뜻이 중요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중요한 건 헵타포드의 언어를 통해 인생의 진리를 깨닫게 된 루이스가 단 몇마디의 언어로 설득에 성공했다는 거니까. 어쩌면 인생이란 의외로 우리가 그 순간에는 핵심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중요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리버풀에서 힘든 인공지능과 데이터 사이언스 공부를 할 때는 하나라도 놓칠까봐 조마조마해하고, 시험의 한 문제에 집착했었다. 돌이켜 보면 석사 과정을 통해 내가 배운 건 공학의 구조였다. 세부사항은 어차피 일하면서 그때그때 찾아보면 될 일이지만 전체적인 공학의 구조는 한 번이라도 공부하지 않으면 익힐 수 없는 것이었다. <컨택트>를 오래 전에 봤음에도 논문을 거의 다 쓰고, 석사 과정이 마무리되어가는 지금에야 나는 빌뇌브 감독이 루이스를 통해 관객에게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다. 마치 루이스가 너의 인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속삭이며 안아주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언젠가 큐레이터가 결과가 예상되어서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일이 있다고 했었다. 그 말을 들을 때는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다고 생각해서 더 말을 얹지 않았는데, <컨택트>의 해설을 듣고 나서는 언젠가 말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픈 결과를 미리 안다고 해서 그 과정에서 만날 수 있는 많은 행복을 놓칠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고. 나도 아직 어떻게 하는지 모르지만, 루이스처럼 삶이 주는 슬픔과 기쁨을 모두 인정하고 끌어안아 보자고.


*<컨택트> 이미지 출처는 네이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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