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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Jan 17. 2022

이름만 구찌에서 진정한 구찌로

파트리치아가 마우리치오에게 돌려주면서 파멸시킨 그 이름

<하우스 오브 구찌>는 제목 그대로 구찌 가문의 흥망성쇠를 다루고 있지만 중심이 되는 인물은 결혼으로 구찌 가문에 입성한 파트리치아 레지아니(레이디 가가 분)다. 로돌포 구찌(제레미 아이언스 분)의 아들 마우리치오(아담 드라이버 분)와의 결혼으로 파트리치아는 구찌라는 이름을 후천적으로 획득한다. 하지만 영화 내내 파트리치아의 풀네임을 호명할 때 누구도 파트리치아 구찌라 하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 법원에서조차 판사는 법적으로 이혼 상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파트리치아를 호명할 때 파트리치아 레지아니라는 결혼 전 이름을 사용한다. 그리고 구찌라는 이름을 너무나 염원했던 파트리치아는 바로 이름을 정정한다. 파트리치아 레지아니가 아닌 파트리치아 구찌라고. 반면 마우리치오는 서사 초반 자신의 성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파트리치아에게도 "나는 이름만 구찌야"라고 말하며 패션에는 관심도 두지 않고 변호사 공부에 전념했던 마우리치오는 파트리치아를 만나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영화 후반부가 되면 마우리치오는 전반부에 등장했던 마우리치오와는 전혀 다른 인물처럼 보인다. 구찌 가문의 유산을 독식하고 사치를 즐기며 패션쇼를 관람하는 마우리치오는 구찌 가문의 일원으로서 행동하지만 이는 본인조차 진정한 구찌로 인정하지 않았던 파트리치아를 연상시킨다.


<하우스 오브 구찌>는 마우리치오 구찌가 아내인 파트리치아를 만나 결혼하고 끝내 살인청부로 사망하기까지의 기간을 다루면서 초점을 파트리치아에게 맞추지만 서사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를 겪는 인물은 마우리치오다. 자신의 성이 갖는 파급력에 대해 무관심했던 마우리치오는 파티에서 자신의 이름을 묻는 파트리치아에게 아무렇지 않게 풀네임을 알려주고 파트리치아와 엮이기 시작한다(실제로는 마우리치오가 파트리치아에게 먼저 접근했다고 하는데 영화는 파트리치아의 욕망을 묘사하는 데 치중하며 파트리치아가 마우리치오를 유혹한 것으로 각색했다). 이 장면은 중반부 구찌 패션쇼에 참석한 마우리치오가 디자이너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길 꺼려하는 장면과 확연하게 대조된다. 파트리치아를 알고 구찌라는 성이 가진 힘을 알게 된 마우리치오는 이제 쉽사리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다. 마우리치오가 변화하기 시작한 시점은 정확히 이 시점부터다. 파트리치아는 마우리치오를 이용해 욕망을 채우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마우리치오에게 욕망의 즐거움을 알려주게 되고, 결국 이는 관계의 파국을 불러오게 된다. 마우리치오는 이름이 가진 힘은 깨달았지만 사용하는 방법은 잘 알지 못했다. 결국 파트리치아의 계략대로 구찌 가문은 흩어지고 구찌의 힘을 독식한 마우리치오가 사망하며 구찌 그룹의 임원진에 구찌 가문의 일원이 모두 사라지면서 구찌 그룹은 가족 기업이라는 정체성을 잃고 만다. 파트리치아는 마우리치오에 대해 잘 알면서도 동시에 그가 변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서사의 주인공은 파트리치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마우리치오의 궤적을 따라갈 뿐이다.



현대 사회에서조차 일반적으로 가문의 성이 남성을 통해 전해지기에 여성인 파트리치아는 필연적으로 구찌 가문에서는 약자가 될 수밖에 없다. 파트리치아가 다른 여성들과 달랐던 점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부차적으로 성을 얻는 대신 성을 얻기 위해 사랑을 이용했다는 점이다. 후천적으로 획득한 타이틀이 된 파트리치아의 성은 딸에게 전해졌지만 결국 구찌 가문은 가업을 잃는다. 구찌 가문이 구찌 사업을 잃게 된 데 가장 큰 원인은 로돌포 이후로 패션에 재능을 가진 가문의 일원이 없었기 때문이 가장 크지만 가문이 각자도생으로 하나로 뭉치지 못한 것도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패션에는 영 관심이 없던 마우리치오는 파트리치아와 결혼하며 변호사가 되길 택했고 로돌포는 그런 아들과 절연하며 1차적인 원인을 만든다. 거기다 로돌포는 동생인 알도(알 파치노 분)와 사업의 방향이 전혀 달랐고 타협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패션에 재능은 없지만 애정은 많은 알도의 아들이자 로돌포의 조카인 파올로(자레드 레토 분)는 가문의 누구와도 건강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고 그 결과 자신에게 애정을 보여주는 파트리치아의 덫에 걸려들고 만다. 희한할 만큼 파멸에 기여한 구찌 가문의 일원은 전부 남자인데 로돌포는 마우리치오에게서 딸이 태어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이 집안에는 여자가 더 필요하다고 표현하며 애정을 드러낸다. 이는 간접적으로 구찌 가문조차 남성 구성원들이 가문의 몰락에 기여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마우리치오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 구찌 가문의 파멸은 예정된 것이었으며 파트리치아의 입성으로 보다 극적으로 빠르게 진행되었을 뿐이다.


서로 포용하거나 관심을 가지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마우리치오는 상당히 구찌스러운 인물로 보이지만 영화 초반부에서만 해도 마우리치오는 독일계 어머니의 혈통이 더 강하다고 믿는다. 모계 혈통에 대한 믿음을 보였던 마우리치오는 부계 혈통이 주는 힘을 체감하자 자기 자신을 바꿔가면서 부계 혈통에 맞추려고 하고, 후천적으로 구찌 혈통을 획득한 파트리치아에게 넌 진짜 구찌가 아니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하우스 오브 구찌>는 파트리치아의 욕망에 초점을 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마우리치오의 변화 과정을 보여주고 몰락하기까지의 과정을 묘사한다. 다만 평면적인 파트리치아의 캐릭터가 레이디 가가의 강렬한 연기를 만나 스크린에서 튀어오르는 바람에 관객은 파트리치아의 욕망에 더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우스 오브 구찌>는 제목 그대로 구찌 가문을 다룬 작품이고, 그 안에서 가장 무섭도록 변화하는 인물은 마우리치오이며 그가 '이름만 구찌'에서 진정한 구찌 가문의 일원이 되어 파멸하기까지가 서사의 전부다. 마우리치오의 죽음 이후 파트리치아가 어떻게 발각되어 재판정까지 가게 되었는지 영화는 전혀 관심이 없다. 마우리치오가 죽던 날의 정경으로부터 시작한 이야기가 수미쌍관의 구조로 마우리치오의 죽음으로 문을 닫는다는 것만 봐도 영화가 진정 이야기하고자 했던 인물은 마우리치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찌 가문을 몰락시키고 죽음을 촉발한 인물은 파트리치아가 아닌 마우리치오 그 자신임을 영화는 간접적으로 보여주지만 관객의 눈에는 파트리치아의 욕망만이 강렬하게 비친다는 점에서 약간의 아쉬움이 묻어난다(안하던 짓 하지 마세요).



결국 구찌라는 이름은 파멸과 몰락의 이름으로 남게 되고, 서사에서 구찌 성을 선천적으로든 후천적으로든 획득한 인물들은 모두 비참한 결말을 맞이한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구찌 성을 얻지 못한 이들은 서사에서 모두 생존한다. 이름만 구찌라던 마우리치오가 성(姓)에 집착하지 않았다면 마우리치오는 죽지 않아도 됐을지 모른다. 서사 중간중간 구찌의 시발점이 등장인물의 대사로 드러나는데 구찌 브랜드를 창립한 선조들은 고된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거친 노동을 하며 가죽에 대한 감각을 익히고 이를 토대로 사업을 발전시켜 나갔던 이들은 구찌 가문의 부가 축적됨에 따라 거만해진 후손의 대에서 몰락을 맞이하고 미국의 남부 텍사스 출신의 젊은 디자이너 톰 포드에게 이름의 영광을 넘긴다. 톰 포드는 구찌의 수석 디자이너로서 브랜드의 영광을 되살리고 젊은 이미지를 돌려주었지만 구찌의 성을 가져가진 않았다. 영화의 제목이 <하우스 오브 구찌>(구찌 가문)인 데는 결국 영화가 주목하고자 한 것이 파트리치아가 아닌 구찌 가문의 몰락이었음을 시사한다. 가족 기업이 브랜드의 정체성이었던 구찌는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 기업의 임원진 가운데 구찌 가문이 한 명도 없다는 자막으로 진정 구찌 가문이 패션 브랜드로 통용되던 영광을 잃고 가문의 부에 상관없이 진정으로 추락했음을 알려준다.


결국 집안과 절연하겠다던 마우리치오가 아무 생각없이 사회의 관습대로 아내와 아이에게 자신의 성을 넘겼을 때 모든 비극이 시작된 것일지 모른다. 마우리치오가 파트리치아에게 구찌 대신 레지아니라는 성을 따르고 아이에게도 레지아니라는 성을 물려줌으로써 온전히 구찌와 절연할 것을 선언했다면 구찌 가문을 둘러싼 모든 이들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아직까지 자녀의 성에 부계 혈통을 부여하는 것이 기본값인 한국 사회에서 <하우스 오브 구찌>는 성이 가진 위력과 허무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이야기다. 파트리치아는 구찌 가문이 가진 부만이 아닌 구찌라는 성이 가진 사회적인 위상을 함께 원했다. 부계 혈통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에서 외부인으로 여겨지는 가문을 추락시키는 <하우스 오브 구찌>는 어쩌면 성을 물려주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논의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될지 모른다.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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