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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의림 Aug 25. 2023

우리의 결혼은 평등할 수 있을까 (3)

조금은 특별했던 혼인신고


순백의 드레스나 버진로드, 대형 결혼식에 대한 로망이 없었다. 어릴 적 어른이 된 내 모습을 자주 상상해보곤 했고, 그 상상 속에는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은 나의 모습은 들어있었지만, 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장에 입장하는 내 모습은 없었다.


Y와의 연애 초기에 20대 후반의 나이로 로스쿨 진학을 준비하고 있었고 로스쿨에 진학하면 또 수 해 공부할 것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Y에게 결혼식을 안 하거나 아주 작은 규모로 하고 싶다고 얘기했다. 이벤트를 일일이 챙기고 시각적 쇼잉을 하는 데 나 이상으로 관심이 없는 Y도 나와 같은 마음이라고 했다. 다만, 우리는 '기존에 뿌린 돈도 있고 앞으로 뿌릴 돈도 많을 테니 일반적인 결혼식을 해서 우리가 정해놓은 일정정도 이상의 수익을 올릴 수 있다면 결혼식을 하자.'라며, 아주 현실적인 기준에 관한 합의를 보았다.


내가 로스쿨에 진학한 후 본격적으로 결혼 일정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결혼식을 할 경우 경제적 손익이 어떻게 될지도 따져보았다. 계산 결과, 우리가 합의한 기준점을 못 넘길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하여, 애초에 마음먹었던 대로 식을 올리지 않기로 하였다. 다만, 혼인신고일을 결혼일로 정하고 혼인신고서에 증인으로 서명해줄 친구 4인과 조촐하게 식사를 하기로 했다.


위와 같이 결정하고, 혼인신고를 하기로 한 날로부터 2개월이 채 남지 않았던 날, 결혼한 친구 커플과 Y와 함께 양꼬치와 맥주를 먹고 마시며 우리의 결혼 계획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리는 자녀 둘 낳으면 하나는 아빠 성, 하나는 엄마 성을 따르게 할 예정"이라고 얘기하였는데, 친구 커플은 "좋은 생각이다. 근데, 혼인신고할 때 한 쪽 성을 따르기로 결정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나와 Y는 그때 처음으로 혼인신고시에 자녀의 성을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관련 기사나 자료를 리서치해보았는데, '자녀 출생시에 자녀의 성을 결정하도록 하는 입법안이 학계나 정부 등에서 이미 제안이 되어 있는 상태였지만, 여전히 제안 단계에 있었을 뿐 혼인신고시 자녀의 성을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어릴적부터 부의 성을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제도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선뜻 Y에게 "내 성으로 하자"고 이야기할 수 없었다. 마음 속 깊이 '대를 잇는다는 것 자체가 낡은 개념인데, 아이가 누구 성을 따르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라는 마음도 있었다. 근데 그렇다고 가부장제에 근간을 둔 부성주의를 고분고분 따르고 싶지도 않았다.


Y와 혼인신고시 '자녀의 성'에 관하여 어떻게 체크할 것인지 논의를 시작했던 날, 나는 "고민이 된다. 다만, 난 내 신념(ex. 가부장제에 균열을 내는 것)을 내 삶 안에서 구현하고 싶다는 바람이 있긴 하다."라고 말했고, Y는 이 말을 듣자마자 "그렇다면, 모의 성본을 따르기로 하자. 다만, 현 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보이니 네가 법률가가 되면 바꾸기 위한 노력을 해줬으면 좋겠다. 빨리 바뀌면 첫 자녀는 우리가 처음에 약속했던 대로 내 성으로 하자."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혼인신고서에 "자녀의 성과 본을 모의 성과 본으로 하시겠습니까?"라는 문항에 "예"라고 답하였고, "아니오"라고 체크하는 경우에는 필요 없는 '추가 서약서'를 작성했다(구청에서 이 서약서를 찾아내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서약서를 차기 위해 우왕좌왕하는 시간 빼고는 혼인신고를 하는 데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우리의 작은 균열내기는 이렇게 시작됐다.


문재인 정부는 '자의 성을 출생신고시'에 정하도록 하는 것을 국정과제로 내세웠으나, 우리가 혼인신고를 한 때로부터 약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도는 변경되지 아니하였고, 이 정부는 그와 같은 로드맵을 사실상 폐기하였다.


그리고 지난 4월 말, 우리의 첫 자녀가 태어났고, 우리의 애초의 약속과 다르게 나의 성을 따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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