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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기자 Feb 27. 2023

술자리까지 예절을 따지십니까

심지어 예의와 전혀 상관없는 주도(酒道)


아래 글과 무관한 술자리 풍경


'내가 누군지 알아?'


얼마 전 술자리에서 쉽게 보기 힘든 장면을 1열에서 직관했다. 여러 기자와 한 기관에서 나온 관계자들이 함께 한 저녁 식사 자리였다. 여기서 말하는 '그 기관'은 국내를 대표하는 여러 엘리트 집단 가운데 하나로, 적나라하게 드러내지만 않을 뿐 자의식과 권위문화가 대단한 그런 곳이다.


모두들 술을 많이 마셨고 거나하게 취해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왔을 무렵. 그 기관의 한 관리자가 작은 소란을 일으켰다. 자신보다 나이도 한참 어리고 직급도 한참 낮아 보이는 한 동석자가 같은 테이블에 앉았음에도 자리를 10분 이상 비웠다는 게 그 이유였다. 술에 취한 그는 '나를 무시하느냐'라고 생각해 예의가 부족(?)한 그에게 당장 눈앞에서 사라질 것을 권유(?)했다.


자리를 오래 비웠다는 그 사람은 늦은 시간에 업무상 전화통화를 하며 담배도 곁들여 피우느라 가게 밖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그분'을 무시할 생각은, 글쎄 아마 추호도 없었으리라. 그럼에도 그분은 술자리 예절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이에게 짜증과 한탄, 적개심 등을 감추지 않았다. 기저에는 계급처럼 철저히 나뉘는 권위의식이 깔려 있었으리라 미루어 짐작해 본다.




기자 생활을 하다 보니 아무래도 저녁 자리가 다른 직종에 비해 많고, 마주하는 상대방은 나보다 적어도 열 살, 대개는 스무 살은 많은 '어르신'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지 않은 분들도 많지만 술자리 예절, 이른바 주도(酒道)를 따지거나 적어도 마음속으로 헤아려보는 이들도 적지는 않다. '술자리에서 자리를 오랫동안 비워선 안 된다. 이는 상대방을 무시하는 행위다'는 술자리 예절(?)도 정말 오랜만에 떠올려 보게 됐다.


회사 전체 회식이나 기관들과의 만남 자리에서 건배사는 아직도 국룰에 속하는 '기본'이다. 스타트업이나 IT 등 젊은 업계는 물론이고 금융업이나 공기업에 다니는 친구들에게 이런 걸 얘기하면 "에이, 요즘 세상에 누가"하는 반응이 나온다. 믿기 어렵겠지만 아직도 많은 언론사에서는 '건배사 몇 바퀴 돌았다'로 그날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를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브런치 글과 무관한 회식의 풍경 중 하나


아직도 그런 사회에 살고 있다 보니, 어느 정도의 술자리 예절은 생존과 직결되기도 한다. 술을 마실 줄 아는데, 첫 잔 원샷을 하지 않는다? 비난의 화살이 날아와 꽂히기만 기다리는 과녁이 되기를 자처하는 꼴이다. 코로나19 이후 비위생적이라는 이유로(그전에도 비위생적이었던 건 매한가지다.) 사라졌던 술을 한잔 마시고 술잔을 건네는 문화. 스멀스멀 피어오려는데 제발 좀 콱 짓밟아줬으면 좋겠다.


건배를 할 때는 자신의 윗사람보다 높은 위치에서 잔을 부딪히지 않는다, 술을 따라 줄 때에는 술잔의 상표를 오른손으로 가리고 따른다, 소맥을 제조할 때에도 두 손으로 공손히 따른다, 윗사람부터 먼저 잔을 따른다, 회식 자리 테이블의 가장 안쪽 좌석부터 윗사람을 안내한다 등등등. 


아무리 동방예의지국이라 할지라도 좀 너무하지 않은가. 물론 술은 많이 마셨을 때 남녀노소 불문하고 실수가 나오는 법이라 동방예의지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어느 곳에도 술자리 예절은 존재한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한국 회식 문화 대표 술자리 예절이 과연 '절주'와 관련이 있나. 아랫사람은 술잔도 아래에서 부딪힌다, 술병의 상표를 손으로 꼭 가려야만 한다 같은 원칙들은 실용성은 물론 관념적인 측면에서도 아무런 효용이 없어 보인다.


요즘 회식 문화의 단골 이야깃거리는 '요새 MZ들은~'으로 시작된다. 후배 직원이나 나이가 적은 아랫세대 사람들과 즐겁게 어울리고 싶은 마음을 에둘러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선 우선 위에선 '주도'라 부르지만, 밑에선 '꼰대문화' '가혹행위'라고 부르는 쓸데없는 겉치레들을 먼저 걷어내야 할 거다. 그런 의미에서 건배사 좀 그만합시다!! 건배사 없이도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할 말은 다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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