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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기자 Apr 19. 2023

단어들이 발산하는 신비로운 이야기

안희연, <단어의 집>


가장 비문학적인 단어들에서 가장 문학적인 순간을 길어 올리는 ‘단어 생활자’ 안희연의 따뜻한 허밍


대다수에게 생소할 법한 단어들을 오밀조밀 뜯어보며 단어의 질감을 표현해내는 작가의 모습이 너무나도 좋았던 책. 작가는 하나하나의 단어들이 발산하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기운을 우리에게 소개한다. 작가가 삶을 어떻게 마주하고 어떤 식으로 걸어나가는 지도 알면서 또 배울 수 있었던 책. 아래에는 기억에 남았던 문구들을 옮겨 적었다. 옮기면서 다시 읽으니 또 한 번 '몽글몽글'한 기분을 느꼈다.




# 삽수

식물의 가지, 줄기, 잎 따위를 자르거나 꺾어 흙 속에 꽂아 뿌리내리게 하는 일.


윤동주 시인은 '별 세는 밤'이 아니라 '별 헤는 밤'이라는 시를 썼다. 그전까진 헤아린다는 말이 크게 다가오지 않았는데 시를 읽고 처음으로 생각해 보게 됐다. 세는 것과 헤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 수량을 센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세는 것은 따져 묻고 판 단하는 일이라면 헤아림 속에는 가늠하고 생각하는 과정이 있다. '헤다'는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 듯이 힘과 의지, 애씀이 수반되는 말이다. 


얘들아, 그러니 우리도 매사 헤아리며 살자. 몇 년 전 한 대안학교 학생들과 윤동주문학관 시인의 언덕을 찾았을 때 나름 크디큰 진심을 담아 꺼낸 말이었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선생님 우리 점심 뭐 먹어요”였고 몇몇은 그마저도 심드렁하다는 듯 휴대폰만 들여다보았지. 우리는 모두 신의 삽수들이란다, 너의 천사의 눈은 무엇이니. 그런 얘기는 시작도 못했다. 삽수요? 욕이 에요? 너희들 낄낄거렸을 거 다 안다. 그날, 안으로 삼킨 말은 이것이었다. 그래 이 삽수들아, 그래도 헤아리며 살자. 나타나고 드러나는, 저 모든 의미와 무의미 하나하나까지 다.


# 휘도

광원(光源)의 밝은 정도(程度)를 나타내는 양(量).


그의 수상 소감에는 놀라운 지점이 있었다. 그는 "상을 받게 되어 영광입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비올라에 있어 위대한 날이에요”라고 말했는데 두 표현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영광스러움과 위대함이라는 단어의 어감이나 의미 자체도 다르지만 그보다는 그러한 영예를 누구의 몫으로 돌리느냐에 있어 확연한 차이가 감지되기 때문이 다. 그는 영광의 주체를 자기 자신이 아닌 비올라에 게로 돌렸다. 위대하다면 그건 내가 아니라, 나의 연주가 아니라, 이 모든 것에 앞서 존재하는 비올라의 위대함이라는 듯이.


그 말은 그가 비올라와 맺어온 관계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나는 너를 악기로서 소유하는 것이 아니란다. 우리는 동등하고, 나란하며, 무엇보다 오랜 시간을 함께해왔지. 고작 한마디 말일 뿐이지만 그 가 비올라를 대하는 태도, 비올라와 함께해온 시간 전체를 느낄 수 있었다고 말하면 너무 과장일까.


고작이나 겨우 같은 말은 의외로 힘이 세다. 도리어 나는 그가 좋은 음악 가인 이유를 거기서 찾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에 비하면 '나는'으로 시작하는 문장은 얼마나 벽돌 같고 성벽 같은가. 나를 보기 위해서는 거울을 볼 게 아니라 당신을 더 자세히 들여다봐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당신의 절대성, 당신의 있음, 당신의 자 리가 있어 출현하고 지탱되는 내가 있다는 것. 내가 당신을 '통해서' 존재한다는 발상은 우리의 삶을, 관계를, 미래를, 어떻게 회전시킬 수 있을까.


'휘도'라는 단어에서 그 답을 찾아보기로 한다. 물리학에서 쓰이는 조도와 휘도는 명백히 다른 개념이다. 빛이 얼마나 도달하는가, 그 물리량을 가늠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조도는 특정 면적에 직접 도달한 빛의 양을 일컫는데 반해 휘도는 그렇게 도달한 빛이 반사되어 우리 눈에 얼마나 들어오는지를 측정하는 개념이다. 결국 휘도는 필연적으로 한 번의 굴절을 거치는 셈이다.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



# 플뢰레

펜싱에서, 몸통만을 공격 대상으로 하고 찌르기만 사용하는 종목.


펜싱의 종류나 자세한 경기 방법을 속속들이 알 진 못하지만 이거 하나는 안다. 펜싱에 쓰이는 검 '플뢰레'만큼은 완전한 매혹의 대상이라는 것. 검술에 숙달되지 않은 기사들이 연습 중에 날카로운 칼 때문에 귀가 잘리고 실명을 하는 경우가 많아 (으악!) 고 안된 검. 날 끝이 둥글고 칼날을 없앤 검, 플뢰레.


칼은 칼이니까 어쩔 수 없이 공격에 일조하더라도 상처를 최소화할 수 있다니 얼마나 멋진가! 내가 갖고 싶은 무기도 그런 무기인 것 같다. 날카롭되, 폭력에 가담하지 않는. 이왕이면 가장 깊고 캄캄한 고독을 찌를 수 있는.


가끔은 안이 너무 무르고 어두워 내가 들고 있는 것이 플라스틱 칼인지 대파 줄기인지 구둣주걱인지 모르겠는 순간이 자주 찾아오지만 그래도 손에 쥘 무언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울 때가 있다. 가끔은 시도 칼이 되어준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진짜로 말이다.


# 덧장

전에 담가 놓은 간장에 새로 메주를 넣어 숙성시킨 간장.


지는 것은 주로 분노와 닿아 있고 비기는 것은 자족과 닿아 있다. 순간 자족을 지족이라고 쓸 뻔했는데 지족도 틀린 말은 아닐 것 이다. 욕심내지 않고 분수를 지키며 살면 자동적으 로 얻어지는 편안함이 안분지족의 본질일 테니까. 이기는 경우? 물론 없다. 애초에 삶과의 싸움이란 이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결국 내가 살아가면서 보다 성실하게 기록해야 할 것은 숱한 '실패담' 사이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비김의 순간들'이 아닐까. 한 발 뒤로 물러나 바라보니 이런 일들이 새롭게 다가온다. 술 만드는 공정에서 품질을 높이기 위해 '밑술'에 '덧술'을 섞는 행위. 한 번(1차 공정)으로 그치지 않고 밑술에다 곡물과 누룩 을 첨가하는 2차 공정을 거치면 술맛은 더욱 깊어지고 상품 가치도 높아진다. 


어느 유명 종갓집 장맛의 비결도 다름 아닌 '덧장'이란다. 오래되어 수분이 날 아간 된장이나 간장에 새 장을 뒤섞는 덧장을 하면 맛과 향은 물론 영양가도 높아진다. 따지고 보면 참 단순한 방법이 아닐 수 없다. 뒤섞음! 그게 다 아닌 가. 이를 삶에도 적용해본다면 어떨까. 지는 순간과 비기는 순간을 적절히 뒤섞으며 살 수 있다면 그 하루하루들, 그럭저럭 견딜 만한 인생 아닐까.


인생이라니! 그런 낡아빠진 단어를 입에 올렸다 는 사실 때문에 또 진 기분이 든다. 그래도 이렇게 개 똥밭에서 뒹구는 걸 보면 나는 신의 피조물임이 틀 림없다. 신의 일과가 '시치미 떼고 있음'인지는 모르 겠으나 어이, 거기 구름 위에 앉아 있는 당신! 내가 매일 지기만 하는 것 같아 보여도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덧술, 덧장 그런 훌륭한 기법도 알고 있다구! 비긴 일의 목록을 차곡차곡 성실히 채워가는 것만으 로도 금화로 가득한 복주머니를 가진 것 같다구!



# 꼭두


꼭두는 상여를 장식하는 나무 조각상을 이르는 말로, 이승과 저승, 꿈과 현실을 잇는 존재다. 망자에게 길을 안내 하고,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영혼을 위로하는 역할 을 한다. 꼭두는 언제나 선두에 있다. 꼭두새벽이 아 주 이른 새벽을 부르는 말이듯이 꼭두는 언제나 맨 앞에서 길을 내고 불가능한 문을 열며 나아간다.


선두라는 말에는 겁과 용기가 공평하게 들어 있 다. 꼭두도 실은 겁이 나는데 매 순간 겁보다 용기의 크기를 키우며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 장수(將帥)는 태생이 장수인 것이 아니라 매 순간 결심하기에 장수 인 것이라는 나의 시 선생님의 말씀을 기억한다. 나 는 그 말을, 자신감은 영원히 생기지 않을 것 같으니 대신 믿음의 크기를 키워보자는 말로 바꿔 읽는다.


# 선택은 테니스 경기가 아니다


선택은 테니스 경기가 아니어서 아무리 좋은 라켓으로 공을 쳐 넘긴들 반대편에서 돌아오는 공은 없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던지고 또 던져도, 사라진 공은 사라진 공일 뿐이다. 결혼을 결심하고, 이사할 집을 고르고, 반려 화분을 들이고, 스스로 세상을 등진 친구를 보러 가기 위해 기차를 탈 것인가 비행기를 탈 것인가를 고민하는 순간에도 우리는 누구나 라켓 을 든 혼자다. 언제나 밤은 쉽게도 왔고.


# 적과

나무를 보호하고 좋은 과실을 얻기 위하여 너무 많이 달린 과실을 솎아 내는 일.


꽃망울이나 꽃을 솎아 따줘야 한 다. 꽃뿐 아니라 열매를 솎아내야 할 때도 있는데 꽃 을 따면 적화, 열매를 따면 적과라 부른다. 꽃이야 열 매를 위해서라고 위안 삼는다지만 열매를 버리는 마 음은 오죽할까 싶다. 물론 좋은 상품을 얻기 위해서 는 필요한 과정일 테고 남기거나 버릴 과실을 정하 는 기준도 있겠지만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어디 있겠는가. 애지중지 키운 가축들을 살처분하거나 헐값이 된 꽃값 때문에 부득불 꽃 더 미 위에 올라 전지가위를 들고 장미 목을 잘라내야 했을 농장주의 얼굴을 상상하면 마음이 새카맣게 타 들어간다.


이것을 위해 저것을 포기하는 일이 삶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포기에도 여러 방식이 있을 것이 다. 열매라는 과욕 때문에 이파리를 부숴뜨리는 일 은 없도록, 파괴, 파쇄, 폐기보다는 감내, 수용, 인정 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포기는 없을까.


블라이기센


# 블라이기센


'블라이기센(Bleigießen)'이라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12월 31일 밤이 되면, 납을 녹여 그림 자의 형태나 굳은 모양을 보고 한 해의 운을 점치 는 것이다. 마트에 가면 블라이기센 키트(kit)를 팔기 도 하는데 1~2유로면 구입이 가능하단다. 내가 녹인 납이 권총, 칼, 토끼, 그 밖에 어떤 모양을 하게 될지 는 알 수 없다. 그리고 그 모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 해석하기 나름일 것이다. 다만 그 작은 의식을 통 해 각자가 살아낼 일 년의 모양을 예감해보는 것이 겠다. 그 순간 무형의 삶은 깜빡, 하고 빛난다. 얘야, 삶이란 흘러가버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손에 잡히기도 한단다. 지금 여기 네 손안에 분명하게 들 려 있잖니,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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