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ulblue Feb 11. 2023

슬램덩크에서 가장 운이 좋은 남자

라스트 댄스 변덕규

자신의 힘만으로 해낼 수 있는 것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때로는 적절한 외부의 도움이 있어야지만 성장이 가능한 경우도 있다.



비록 전국제패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변덕규는 슬램덩크에서 가장 운이 좋은 선수라고 생각한다. 능남 농구부는 북산과 달리 감독이 적극적으로 리쿠르팅 해서 모은 팀이다. 유명호 감독이 애초에 목표로 했던 팀은 변덕규를 센터로 두고 송태섭, 정대만, 윤대협과 서태웅을 채워 넣는 말 그대로 드림팀이었다. 철저히 변덕규를 중심에 둔 팀 구성이다. 유감독의 계획대로만 진행됐다면 채치수 대신 변덕규가 전국대회 진출권을 따냈을 확률이 높다.


변덕규는 정확히 채치수와 반대 지점에 위치한 캐릭터다. 자신의 유리한 체격을 적절히 사용할 줄 아는 채치수와는 달리 변덕규는 월등한 신장이라는 강력한 장점을 지녔으면서도 잘 활용할 줄 모른다.


청소년기에 또래보다 월등한 신체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주변의 관심을 집중시키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관심은 양날의 칼처럼 작용한다. 강백호 같은 외향형이라면 그 관심을 어느 정도 즐기면서 자신의 강점으로 잘 활용할 수 있겠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오히려 큰 부담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더군다나 그 나이대에는 대체로 자신의 신체에 익숙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어딘지 불편하고 부자연스럽게까지 느껴지기도 한다. 자신의 몸이 기능하는 방식, 그것이 미칠 수 있는 영향 그리고 그 안에 잠자고 있는 가능성의 크기를 미처 알지 못하는 미숙한 상태. 좋은 피지컬을 정말 자신의 것으로 자연스럽게 활용하기 위해서는 타고난 비상한 감각이나 그것을 활용해 본 수많은 경험이 필요하다. 선천적인 감각이 모자라다면 결국은 경험들을 통해 정신이 육체의 성장을 따라잡을 때에야 비로소 그의 신체는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기능한다. 변덕규는 후자다.   


게다가 확실히 내향적이다. 덩치에 비해서 섬세한 감수성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걸었던 기대가 빠르게 실망으로 바뀌는 기류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서태웅이나 정대만, 윤대협과 같은 천재형 선수들이 재능을 결과로 증명해 내며 성장해 온 반면 변덕규는 가지고 있는 재능(신장)에 비해 과도한 기대 속에서 성장해 왔다. 더군다나 타고난 예민함때문에 타인의 평가에 둔감한 서태웅이나 윤대협이었다면 뭐 어쩌라고 했을 일들이 변덕규에게는 심각한 문제로 다가온다. 독선적인 팀 운영방식으로 선배들에게 줄기차게 가스라이팅을 당할 때도 멘탈이 무너지지 않았던 채치수에 비하면(물론 채치수도 무너진 적이 꽤 있다. 개인적으로 채치수가 가장 가슴 아팠을 순간은 아마도 '너와 하는 농구는 즐겁지 않다.'던 말이 아니었을까. 채치수는 그 자신이 누구보다 농구를 사랑하고 있었기에 다른 팀원들도 그 즐거움을 함께 느끼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변덕규는 연습량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수군거리는 소리에도 크게 반응한다. 변덕규의 유리멘탈은 아마도 그가 중학시절에는 또래에 비해 상당히 유리한 지점에서 농구를 시작했기 때문 일 것이다.


거대한 신장은 농구에서 압도적인 강점이다. 특히 골밑 센터로서는 최고의 조건. 변덕규의 시작은 타인들보다 수월했다. 선천적으로 주어진 재능으로 그는 능남 감독의 눈에 띈다. 유명호 감독은 2M에 육박하는 변덕규를 발견하고 능남 3년 계획을 세울 정도였다.    


고교  리그에서 채치수보다 먼저 눈에 띄었던 센터. 그러나 신장 하나만으로도 골 밑을 봉쇄하던 중학시절 그의 강점은 다른 선수들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맹렬히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빠르게 추격당한다. 키가 작은 송태섭은 드리블과 돌파력을, 장신의 센터를 상대해야 하는 강백호와 채치수는 근력을, 상대적으로 열세인 체력을 보완하기 위해서 정대만은 슈팅을. 중학시절보다 성숙해진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약점을 빠르게 보완해 간다. 그러나 변덕규는 선천적으로 주어진 강점의 수혜가 너무도 컸기에 이를 넘어서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고교 입학 이후로는 다른 (이미 미친 수준의 성장을 이루고 있는) 선수들에게 빠르게 밀리기 시작한다.


그래서 장신의 변덕규가 신입으로 능남에 들어왔을 때 농구부원들이 그에게 걸었던 큰 기대는 곧 거대한 실망으로 바뀌고 만다. 키만 컸지 농구 센스가 모자라는 센터, 체격에 비해 부족한 체력, 그리고 약한 멘탈까지. 물리적 존재감이 크면 클수록 약점 역시 더 크게 보이기 마련이다. 차라리 작은 선수였다면 용서될 많은 부분들이 변덕규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덩치에 비례해 매번 과하게 반복되는 기대와 그 기대를 저버리는 실패의 경험은 변덕규를 완전히 위축시킨다. 스스로 생각해 봐도 하드웨어에 비해 부족한 결과물. 중학시절과 달리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다른 선수들의 발전을 목격하며 느끼는 자괴감. 특히 북산의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어떻게든 성장해 내고야 마는 집념의 채치수가 발전하는 모습을 지켜볼 때면  불안감은 더 커졌을 것이다. 이대로라면 변덕규는 많은 아이들이 그렇듯이 자신의 진짜 재능을 찾아보지도 못한 채 사라졌을 확률이 꽤 높은 편이었다.


그러나 변덕규에게는 유명호 감독이 있었다. 유명호 감독은 안한수 감독에 비해 상대적으로 선수들을 분석하고 경기의 판세를 읽는 눈은 부족하지만, 다시 말해 감독으로서의 예리함은 떨어지지만 인격적으로는 매우 성숙한 멘토였다. 과거의 트라우마로 북산의 채치수를 정신적인 면에서 제대로 케어하지 못한 안감독과는 달리 유감독의 섬세한 관리는 경기장과 경기장 밖 안팎 모든 면에서 선수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준다. 계속되는 강도 높은 능남의 훈련과 자신에게 쏟아지는 압박을 못 이겨낸 변덕규가 크게 흔들릴 때 유감독은 덩치도 큰 사내 녀석이 꼴사납게 운다고 다그치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강점을 명확하게 정리해 준다.


'덩치만 크다고? 그걸로 충분하지 않니?'

좋은 멘토 유명호 감독


체력이나 기술은 가르쳐줄 수 있다. 그러나 널 크게 할 수는 없다. 유감독 말의 이면에는 존재 그 자체를 긍정할 줄 아는 어른의 현명함이 있다. 좋은 싹을 꽃으로 피워낼 재능을 알아보는 넓은 시야가 있다. 너는 큰 키에 비해서 센스가 부족하다거나 체력이 모자라다는 말 대신 변덕규에게 가장 필요한 말을 가장 적절한 시점에 적확한 방식으로 해준다. 아이가 자기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긍정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 이것이 좋은 어른의 역할이다. 유감독과의 대화는 계속해서 타인이 자신에게 거는 기대를 배반해 왔기에 어쩌면 가장 큰 콤플렉스가 됐을지도 모를 변덕규의 신장을 그의 가장 큰 강점으로 인지하도록 만들어주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네 키는 정말 멋진 재능이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스스로가 자신을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현재 가지고 있는 강점들을 충분히 이해해야지만 보완해나가야 할 단점들도 자각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수없이 거치며 객관화한 단단한 자존감이야말로 노력이 쌓였을 때 허물어지지 않는 튼튼한 토대가 된다. 유감독은 그것을 안다. 그래서 무너지기 쉬운 변덕규의 자존감부터 탄탄히 쌓는 방식으로 신뢰를 얻는다. 그리고 말한다. 더 나아질 수 있다고. 최고가 될 수 있다고. 자신이 안내해 주겠다고.


누군가의 장점을 발견하는 작업은 기본적으로 깊은 애정을 기반으로 한다. 더욱이 그가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조건을 과신한 나머지 스스로를 망치고 있는지, 아니면 오히려 그것에 질식해 새로운 가능성을 놓치고 있는지는 정말 대상을 세심하게 살펴봐야 알 수 있다. 조언을 해야 할 타이밍인지 그를 믿고 기다려줘야 하는 순간인지도 지속적인 관심 없이는 판단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누군가에게 조언을 한다는 것은 막중한 책임감이 필요한 행위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섣불리 조언하는 것을 꺼려한다. 그 조언으로 발생할 변화와 그 결과를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언이라는 것은 그로 인해 달라질지도 모를 상대의 미래를 어느 정도 함께 짊어지고 가겠다는 결의가 있어야지만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더군다나 지도자와 학생 사이의 조언이 갖는 의미는 매우 무겁다. 너의 키를 크게 할 수는 없다는 유감독의 말 이면에는 그 외의 모든 것을 감독인 자신이 제공해 줄 수 있다는 약속이 숨어있다. 실제로 그는 변덕규를 능남으로 데려온 이후 그가 훌륭한 선수로 성장할 수 있도록 거의 모든 환경을 만들어낸다. 최고의 조건은 아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조건을. 자신이 한 조언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유감독은 기꺼이 짊어진다.


유명호 감독에게는 분명한 목표가 있다. 채치수의 꿈과 동일한, 전국제패. 그는 그 꿈의 중심에 채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 변덕규를 놓는다. 선수의 현재 상태를 충분히 긍정하면서 본인이 만들어놓은 이상향에 질식하지 않도록 그를 돕는다. 아직은 완성되지 않았기에 비록 허술해 보일지라도 재촉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선수가 지닌 미래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며 그 원석을 다듬을 계획을 세운다. 그게 바로 자신과 같은 감독의 역할이며 어른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그는 목표에 맞춰 빈약한 팀을 변덕규를 중심으로 재구성하고 그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다른 재원들을 끊임없이 불러들인다. 송태섭도 정대만도 서태웅도 영입에는 실패했지만 포기를 모르는 유감독은 기어코 윤대협이라는 천재를 손에 넣는다. 더군다나 그는 평범한 선수도 포기하지 않는 집념을 보인다. 상대적으로 약점이 더 많은 선수 황태산과 안영수, 백정태의 장점을 세밀하게 체크한다. 황태산의 공격력, 안영수의 승부욕, 백정태의 안정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카드를 평범하다고 쉽게 버리지 않고 하나의 팀 안에서 기능할 수 있도록 강도 높은 훈련으로 단련시킨다. 그는 지금 자신이 끌어모을 수 있는 최대치가 바로 이들이며 그 한계야말로 곧 본인의 책임이라는 냉정한 사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어느 한 명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실로 강건한 교육자의 의지를 유명호 감독에게 발견한다.


더 나아가 그는 선수들의 부족한 부분을 자신의 전술로 채워 넣으려 한다. 워낙 뛰어난 재능의 선수들이 많이 등장하는 슬램덩크에서는 감독들의 자리가 부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풍전은 노감독이 아예 쫓겨났으며 상양은 김수겸이 감독 대행을, 북산은 안감독이 지병과 트라우마로 부재하기 일쑤였다(산왕의 도감독과 해남의 남진모 등 명문 농구단일수록 감독이 성실하다는 것은 중요한 체크 포인트다). 그렇기에 쉽게 잊지만 유명호는 선수들의 단점을 보완하는 전술을 짜는 것이야말로 바로 자신과 같은 감독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산왕의 방식이 최고의 선수들의 재능에 힘입어 더 나은 전술을 선택하는 거라면 능남의 방식은 부족한 선수들의 재능을 보완하기 위해 전술이 동원된다. 이 과정에서 변덕규의 또 다른 행운이었던 윤대협은 포인트 가드로 등장하고 변덕규의 부담을 한층 가볍게 덜어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채치수가 북산의 얇은 선수층으로 마음껏 날뛰지 못했던 반면 변덕규에게는 자신의 기량을 펼칠 수 있는 완벽한 무대가 세팅된 셈이다.  


자신의 가능성을 알아봐 주는 멘토를 만난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행운을 마주하지 못한 채,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미처 피워보지도 못하고 사그라든다. 변덕규 역시 그럴 뻔했다. 그가 다른 팀으로 갔더라면 큰 키에 가려진 다른 재능들을 발견하기도 전에 은퇴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명호라는 좋은 멘토가 이끄는 팀 안에서 변덕규는 큰 신장 말고도 자신의 다른 강점들을 찾아내기 시작한다.


운명의 라이벌이자 롤모델 채치수

변덕규는 시합에서 맞붙을 때마다 채치수가 경이로웠을 것이다. 자신과 너무도 다른 상황에 처해있는 비운의 선수. 좋은 피지컬, 성실함으로 쌓아 올린 실력과 그 실력에 걸맞은 명성, 그리고 강인한 정신력까지. 그러나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채치수. 그와 경기를 치를 때마다 변덕규의 팀은 거의 매번 승리하지만 역으로 개인선수로서 변덕규는 채치수에게 크나 큰 열패감을 느낀다.


아무것도 없는데도 시합을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집념. 경기는 내어줘도 북산의 골밑은 내어주지 않는 불굴의 정신. 그리고 무엇보다 부당한 타인의 평가에도 흔들리지 않고 정진하는 자세가 무너지는 법이 없는 꾸준함까지. 자신에게 없는 것들을 가지고 있는 채치수는 월등한 신장, 뛰어난 팀 동료, 훌륭한 지도자 이 세 가지를 모두 다 갖추고도 변덕규가 결코 넘을 수 없는 산이었다. 팀의 승리 속에서 매번 채치수에게 패배하는 변덕규. 모든 것이 다 주어진 환경 속에서는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다. 채치수와의 경기를 통해 그는 점점 더 명확히 깨닫는다. 자신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추상적인 전국제패가 아니라 개인 센터로서 채치수를 뛰어넘는다는 구체적인 목표라는 사실을.


좋은 동료만큼이나 좋은 라이벌을 만난다는 것 역시 굉장한 축복이다. 현실에서는 목표가 없어 타고난 재능을 낭비하고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채 사라지는 수재들이 정말 많다. 강백호 역시 그런 길을 갈 뻔했다. 그러나 강백호에게는 자신의 재능을 발견해 준 채소연과 안감독 그리고 분명한 목표점을 잡아주는 희대의 라이벌이 있었다(강백호의 슛모델은 서태웅이다). 그런 의미에서 강백호 역시 타이밍은 다소 늦었지만 운은 무척 좋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심지어 변덕규는 유감독과 윤대협 그리고 좋은 라이벌인 채치수까지 모든 패키지가 적절한 타이밍에 제공된다. 그가 자신의 시합을 보러 온 채치수를 발견했던 것은 가장 중요한 성장시점인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목표가 분명하면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도 구체화된다. 채치수라는 좋은 비교 대상을 발견한 변덕규는 상대적으로 골밑에서 밀리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허리와 다리 근력을 키우는 기초 훈련을 다시 시작한다. 그는 채치수의 플레이를 반복해서 복기하며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끊임없이 개선해 나간다. 파괴적인 블로킹, 탄탄한 수비력, 그리고 강력한 골밑 득점력. 자신에게는 없는 빛나는 재능들. 그러나 무엇보다 변덕규를 가장 강력하게 자극하는 채치수의 재능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경기를 포기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이었다.


변덕규는 채치수와 경기를 치를 때마다 성장한다. 그것은 그에게 채치수가 단순히 꺾어야만 하는 경쟁자가 아니라 어느 지점에서는 닮아가고 배워가야 하는 훌륭한 롤모델이기 때문에 더 드라마틱했다. 변덕규는 경기 내내(그리고 경기장 밖에서도) 채치수를 의식한다. 어떻게 하면 저 녀석을 나가떨어지게 해줄까 가 아니라 채치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한다. 덩치에 비해 쉽게 겁먹고 자주 물러나고 마는 자신과는 다르게 좀처럼 경기를 포기하지 않는 채치수의 강인한 집념을 그는 닮아가고자 노력한다. 해남전에서 발목 부상이라는 핸디캡을 안고도 도내 최강 이정환을 상대하며 한치도 밀리지 않는 채치수를 지켜보면서 변덕규는 큰 충격을 받는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다음 시합에서 만나자고 소리를 지를 만큼. 그는 직감한다. 저 채치수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그에게 채치수가 없는 전국제패는 무의미한 것이다. 정우성이 없는 일본에서의 no.1이 서태웅에게 무의미한 것처럼. 그게 변덕규의 농구다.


Blue Collar

그럼에도 변덕규에게도 채치수에게는 없는 재능들이 있다. 상대적으로 뒤처지는 선수였기 때문에 변덕규는 채치수가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채치수는 산왕전까지 가서야 비로소 그 의미를 알게 된다) 깨닫게 된 진흙투성이가 되는 법을 오래전부터 체화해 왔다. 다른 동료들의 바닥이 되어준다는 것은 자신의 강점과 한계를 모두 분명히 인지하고 있는 사람만이 내릴 수 있는 용감한 결단이다. '난 팀의 주역이 아니어도 좋다.'


고교 리그에서 이름이 알려지는 건 변덕규가 먼저였지만 무서운 속도로 성장한 채치수는 이내 그 명성을 자신의 것으로 쟁취한다. 채치수가 뛰어난 기량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화려함 때문에 같은 학교 선배들에게 평가절하나 당하고 있을 때 변덕규에게는 유감독에 의해서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팀이 있었다. 비운의 아이콘 채치수가 겨우 얻은 천재적인 슈터 정대만이 무릎부상으로 자리를 비우고 센스 있는 포인트 가드 송태섭이 폭력사건으로 농구부를 들고 날 때도 변덕규에게는 비록 지각하기일쑤지만 어쨌든 지속적으로 성실하게 호흡을 맞춰온 천재 윤대협이 있었다. 들쑥날쑥한 팀 기량 때문에 홀로 경기를 끌어가던 버릇이 든 채치수와는 달리 변덕규에게는 안정적으로 활약할 수 있는 부원들이 있었고 그렇기에 그는 주장으로서 또 센터로서 팀원들을 받쳐주는 역할에 최적화한 채로 성장한다. 신현철을 1:1로 꺾어야지만 전국제패를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채치수와는 달리 변덕규는 농구는 팀으로 하는 운동이라는 사실을 아주 오래전부터 체득하고 있었던 셈이다.


'윤대협이 한다.'

하나의 밈이 되어버린 이 단어의 의미는 이후 산왕전의 '진흙투성이가 되어라.'까지 이어진다. 어떤 일에도 좀처럼 잘 흔들리지 않는 윤대협의 안정적인 성향은 작은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변덕규의 불안정성을 보완한다. 황태산 역시 수비는 약하지만 득점력에 있어서만큼은 도내 톱클래스다. 믿을 수 있는 동료가 있다는 것은 채치수가 슬램덩크 전권을 통해 얻고자 했던 궁극적인 목표 아니었던가. 그런 의미에서 변덕규에게는 채치수가 가지지 못했던 모든 것이 있었다. 등을 맡길 수 있는 동료가 존재할 때야말로 자신의 소명은 더 분명해진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가 명확해지면 퍼포먼스도 좋아질 수밖에 없다. 모든 걸 다 잘해야 했던 채치수와는 달리 변덕규는 센터의 역할에 집중할 수 있었다. '내가 아니라 윤대협이 한다.'


이는 스스로에 대한 포기의 선언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위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겠다는 의지의 선언이다. 채치수만큼 빛나지는 않더라도 팀의 승리를 위해 진흙에서 구르겠다는 단호한 결의가 여기에 있다. 서로에게 부족한 부분을 자신의 강점으로 채우고 자신의 단점을 서로를 통해 보완하는 변덕규의 성장과 함께 능남은 좋은 팀으로 커나간다.   


변덕규의 라스트 댄스

전국대회 출전권을 놓고 맞붙은 북산 대 능남전에서 변덕규는 4개의 파울이 쌓인 채로 고전한다. 뒤늦게나마 좋은 동료들을 얻어 전열을 가다듬고 나온 채치수의 북산은 파죽지세였다. 뒤쳐진 북산이 강팀을 추격하는 다른 경기들과는 달리 능남전은 뒤쳐진 능남이 북산을 따라붙는다. 이것은 도내 톱클래스 센터 채치수에게 도전하는 변덕규의 서사와도 일치하는 구도다.


센터치고는 소심한 성격, 세심하기에 역으로 잡생각이 많아 채치수만큼 과감한 플레이가 어려웠던 변덕규에게, 더군다나 다혈질을 제어하지 못해 경기 중 퇴장 전적이 있는 그에게 4개의 파울은 상당한 심적 부담이었다. 에이스 윤대협과 파괴적인 득점력을 자랑하는 황태산, 그리고 유명호 감독의 전술까지 모든 것을 쏟아부은 능남. 그러나 안감독이 부재한 상태에서도 북산은 치열한 응전을 한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 오합지졸이던 북산의 성장. 변덕규는 이 능남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좋은 동료가 생겨 날개를 단 채치수의 100% 진짜 실력을 목도한다. 변덕규가 이끌어온 능남처럼 마침내 자신의 팀이 생긴 채치수가 이끌어온 북산이라는 신생팀의 진면목을 처음으로 경험한다. 해남의 남진모 감독은 마음껏 날뛰는 채치수를 보며 중얼거린다. '드디어 꽃을 피우는구나'. 이 경기는 채치수와 변덕규 두 사람이 자신의 모든 기량을 쏟아내 겨루기 위한 완벽한 무대였던 것이다.


4개의 파울. 벤치에 앉아서 채치수의 활약을 지켜보며 변덕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완벽에 가깝지만 아직은 2학년인 윤대협을 서포팅하며 동요하는 팀의 전열을 가다듬는다. 시한폭탄처럼 북산의 위험요소가 터지기 시작하는 순간을 기다리던 유감독의 전술을 믿고 기다린다. 그리고 경기종료를 6분 15초 남겨두고 변덕규는 코트에 복귀한다.


완벽한 상태의 라이벌을 앞에 두고 변덕규는 전처럼 물러서질 않는다. 키만 컸지 무섭지 않고 자기보다 작은 상대에게 힘으로 밀리던 전과 달리 변덕규는 최상의 컨디션을 보이는 채치수를 앞에 두고 한치도 뒤로 밀려나지 않는다. 4개의 파울이라는 악조건. 자신도 팀도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 변덕규는 오래전부터 자신을 뒤로 끌어당기던 보이지 않는 선들을 전력으로 뚫어나가기 시작한다. 타인의 과도한 기대와 잡음들,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가 받아들이지 못했던 자기 자신의 미숙한 모습들까지.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알고 인정한 사람만이 가능한 긍정이 있다. 막연하게 잘될 거라는 근거 없는 희망이 아니라 단점마저 자신의 모습으로 받아들이고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정진해 온 사람만이 가능한 낙관이 있다. 누군가와 끊임없이 비교당하는 위치만큼 끔찍한 것도 없다. 그것도 당신이 2인자라면. 같은 나이에 같은 포지션. 재능만으로는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갭. 능남의 좋은 조건 속에서 변덕규는 어쩌면 이 자리에 채치수가 있었다면 어땠을지를 궁금해했을지도 모른다. 비운의 천재 채치수에게 유명호 감독과 윤대협이 있었더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덕규는 채치수의 그림자에 잡아 먹히지 않는다. 그는 채치수를 의식하면서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팀을 만들어낸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에 감사하면서. 변덕규에게는 변덕규 나름의 강인함이 있다.


후반에 코트 위로 복귀한 변덕규는 마지막으로 그에게 남아있던 주저함을 시원하게 날려버린다. 일생일대의 승부. 그에게는 채치수를 마주한 이 시합이 어쩌면 전국대회보다 더 중요했을지도 모르겠다. 변덕규는 그토록 염원하던 순간을 앞에 두고 4개의 파울은 우주로 던져버린 과감한 플레이를 펼쳐 보인다. 그토록 자신이 뛰어넘고 싶었던 거대한 벽을 깨기 위해 마주한 변덕규의 거센 도전이었다. 채치수와의 리바운드 싸움에서 드디어 변덕규는 밀려나지 않고 채치수를 압도한다. 힘으로든 정신력으로든. 여전히 부족한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차근차근 끈질기게 쌓아 올린 자신의 모든 기량을 걸고 전력으로 부딪힌다. 변덕규의 사력을 다하는 도전에 채치수 역시 자신의 모든 것을 건다. 개인의 재능은 물론이고 주장으로서 함께 성장시킨 플레이어들을 전부 활용하면서. 그리고 마지막 강백호의 골로 경기는 근소한 차이로 북산이 가져간다.


인연과 행운에 감사하며

승패는 냉정하다. 그 모든 분투에도 불구하고 채치수와 변덕규의 눈물은 전혀 다른 의미였다. 경기 종료. 그것은 채치수에게는 그동안의 불운을 보상하는, 기나긴 꿈이 이제 막 시작되는 순간이었고 변덕규에게는 오래된 꿈이 끝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유명호 감독은 경기가 끝나고 이렇게 말한다. '결국 패인은 바로 나. 능남의 선수들은 최고의 플레이를 해주었습니다.' 능남이 변덕규를 중심에 두고 구성한 팀이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이 말은 변덕규는 최고의 플레이를 해주었다는 말이 된다. 비록 유감독의 전국제패 꿈은 좌절됐지만 변덕규는 그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했던 것이다.


어떤 꿈에는 기한이 있다. 길든 짧든 모든 것에는 끝이 있기 때문에. 안경선배와 채치수 그리고 변덕규의 꿈에도 기한이 정해져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전까지로. 그러나 채치수의 압도적인 농구 재능은 그의 진로에도 영향을 미칠 정도였다. 농구 명문 대학 진학이 무산된 이후 우리는 채치수가 어떤 진로를 선택했는지 잘 알지 못한다. 북산 농구부를 은퇴한 후 오히려 성적이 떨어졌다는 후일담으로 미루어보아 어쩌면 채치수는 결국 농구를 잊지 못하고 대학 구단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변덕규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애초에 그의 농구에는 시효가 분명히 정해져 있었다. 졸업을 하고 나면 집안의 대를 잇는 요리사가 되는 것. 그게 변덕규의 고교농구에 덧붙여진 부가 조건이었다. 한국에서는 익숙하지 않지만 많은 일본 학생들에게 스포츠란 그런 것이라고 한다. 눈부시게 피어났다 지는 청춘과 궤를 함께하는 꿈. 일본인이 아닌 이상 변덕규에게 고교농구가 어떤 의미였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기한이 정해져 있기에 더 치열했던, 때로는 가혹하기까지 했던 그의 농구는 변덕규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이 모든 대 서사시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내 채치수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정한 청소년기에 자신을 믿어주는 멘토를 만나고 가장 놀라운 재능을 지닌 동료와 함께 코트를 뛰었으며 무엇보다 가장 훌륭한 라이벌을 만나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울 수 있었던 변덕규에게 고교 농구의 시간은 매 순간순간이 무척 감사하고 즐거웠을 거라고, 그래서 어떠한 후회도 남아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는 실로 인생에 가장 중요한 순간마다 절실히 필요했던 사람들을 만나 도움을 얻으며 성장할 수 있었다. 홀로는 더뎠을 성장이 동료와 감독과 경쟁자를 만나 적절한 속도로 촉진됐다.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한 만큼 변덕규 그 자신 역시 팀원들이 도움을 받고 기댈 수 있는 좋은 주장이었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변덕규는 고교 농구를 통해 자신이 마주한 모든 사람들을 감사히 여길 것만 같다. 그는 성장의 절실함과 인연의 소중함을 모두 안다. 그렇기에 비록 전국대회 출전에 실패했어도 변덕규는 채치수의 북산이 산왕전을 치르는 순간을 잊지 않고 찾아온다. 능남전 때처럼 자신의 기량을 100%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채치수를 뜨겁게 응원하기 위해서. 자신을 가장 크게 성장시킨 일생의 라이벌을 위하여.


나는 그가 이후 요리를 하든 다른 무엇을 하든, 진실로 최선을 다해 자신의 벽을 뛰어넘어본 사람만이 쟁취할 수 있는 어떤 감각이 일생동안 변덕규를 가장 변덕규답게 만들어주었을 거라고 믿는다. 드물게 모든 조건이 다 주어졌고 그 안에서 무엇하나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자신을 전부 쏟아부었던 변덕규의 고교 농구는, 그리고 그 라스트 댄스는 가장 행복하고 충만한 기억으로 그의 생을 단단하게 지탱해 주었을 것이다. 그는 슬램덩크에서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이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