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CINE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ulblue Jul 16. 2023

엔니오 : 더 마에스트로 (2023)

시네마의, 시네마에 의한, 시네마를 위한

조금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은 남성적 시선이 거의 완벽히 지배하는 영화의 세계에 은밀히 울려 퍼지는 여성들의 진혼곡처럼 느껴지곤 했다. 그것에는 어딘지 잊힌 존재들을 애도하고 지워진 것들을 되살려내는 마법 같은 힘이 있었다.


그래서 내게 엔니오의 음악은 영화의 세계로 입장할 수 있는 초대장이었다. 시각이 통제하는 영역을 우회해서 영화의 내부로 은밀히 침투할 수 있는 백도어 같은.  


영상처럼 선택적으로 주체를 호명하는 차별적인 시선이 존재하지 않기에 그에 음악에는 배제가 없었다. 어떤 인종이든, 젠더든, 계층이든 그 문은 모두에게 활짝 열렸다. 그 자유롭고 안전한 영역 안으로 열렬히 환대받는 손님의 자격으로, 나는 매번 어린아이처럼 음계로 만들어낸 그의 비전들에 쉽사리 사로잡히곤 했다. 초대를 거절하기엔 그의 곡들은 엄청나게 비장하고 아름다웠고 애절하며 동시에 경쾌하고 장난스러웠다.


더욱이 그가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소유권이라도 주장하듯 능란하게 영상을 타 넘으며 펼치는 이야기에는 무엇보다 흥미진진한 모험과 열정이 가득했다. 영상을 지워내더라도, 심지어 눈을 감아도 그 모험은 음과 리듬을 타고 끊기지 않고 계속됐다.


말하자면 그의 곡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를 구성해 냈다. 매혹적이고 상냥한, 유래 없이 천재적이고 실험적인, 그리하여 심지어 영상을 압도하는 영화 음악의 등장.


그와 협업했던 많은 감독들은 엔니오 모리꼬네의 천재성에 빚을 지기도 했지만 동시에 치열하게 사투를 벌여야 하기도 했다.


감독에게는 감독의 역할이, 그리고 자신에게는 자신의 역할이 있다고 믿었던 엔니오 모리꼬네의 완고함을 피해 감독들은 자신이 참고한 음악 레퍼런스들을 집요하게 전달하며 비슷한 유형으로 만들어 달라고 압력을 가하기도 하고 심지어 몰래 음악을 교체하기까지 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고자 애를 썼다.


어떤 감독들은 도무지 음악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그것을 보여주기 전까지는 상상하지 못한다며 아쉬워하며 속내를 털어놓는 엔니오 모리꼬네.


작업을 하는 동안 저명한 영화감독들은 엔니오 모리꼬네를 설득하기 위해 애걸하고 화를 내고 화를 냈음에 사과를 하고 다시 또 그의 권위에 도전하며 일을 진행해 갔을 것이다. 그 지난한 과정들 속에서 엔니오는 패배하는 쪽보다는 승리하는 쪽에 더 가까웠던 것 같고.


음악에는 음악의 역할이 있다. 그의 작업들은 분명 영상의 부속물처럼 여겨지던 영화 음악의 영역을 새롭게 확장하는 선언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비록 그가 영화를 시사할 때마다 졸기일수였다지만(이 인터뷰에서 정말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나는 이 거장이 진실로 영상을 사랑했을 거라고 믿는다. 그에게 음악은 영상을 제압하는 폭력이 아니라 영화라는 건축을 튼튼히 구성하는 또 다른 중요한 영역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역시 우리의 생을 닮은,

삶의 가장 빛나는 순간들을 길어 올려 수도 없이 스크린에 쏘아 올리는 이 움직이는 사진에 완전히 매료됐을 거라고, 우리들처럼!, 시네마 천국을 작업하며 무척 즐거웠다는 그의 함박웃음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무엇보다 엔니오의 음악 자체가 그의 영화에 대한 사랑을 가장 크게 증언하고 있지 않은가.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가닿도록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소리로.


끊임없이 스스로의 자격지심을 타인을 공격하거나 시샘하는 방식이 아니라 세상에 더 아름다운 것들을 남기는 방식으로 넘어서려 분투했던, 그랬기에 더 실험적이고 경계 없이 용감했던 이 노련한 거장의 시대를 함께 살아갈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그가 보내온 수많은 초대장들을 통해 참석했던 축제들은 모두 얼마나 즐거웠던가.


비범하지만 성실했고 고집스러웠지만 그 누구보다 많은 협업을 했던 예술가. 독야청청 홀로 고고하지 않고 동료들과 관객들의 인정과 사랑을 가치있게 여겼던 그의 소탈하고 섬세한 나약함마저 사랑스럽다.


상영하는 내내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음악들 덕분에 춤을 추며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졌었다. 왈츠든 탱고든 발레든 하바네로든. 세상의 모든 음과 리듬이 그곳에 존재한다. 넓은 스크린과 풍부한 사운드. 꼭 극장에서 봐야 할 영화란 것도 있는 법이다.


시네마의

시네마에 의한

시네마를 위한.


엔니오 모리꼬네

더 마에스트로.

매거진의 이전글 하이앤로우 더 레드레인 (2016)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