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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ulblue Feb 27. 2024

파묘, 오래된 책임

스포일러 있습니다. 원치 않으시면 읽지 말아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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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아주 오래된 망령이 있다.



-파묘 스포일러입니다. 원하지 않는 분들은 읽지 말아 주십시오.-

우리에게는 아주 오래된 망령이 있다. 제대로 극복하지 못해 한 곳에 오래 머물게 되어 그 상흔이 인이 되어버린 것. 일제라는 망령이다.


영화에 대해서만 간결하게 말하자면 <파묘>는 과거에 영상화됐던 <퇴마록>, 그러니까 내가 기대했던 <퇴마록>의 이상향 같은 영화였다. 미스터리가 있고 매력적인 캐릭터가 움직이며 이질적인 존재와 현상을 스크린 위의 현실로 어색하지 않게 구현하는.


장재현 감독의 <사바하>가 이뤄낸 영화적 성취와 영상적 완성도, 그리고 오컬트 장르로서의 세련된 구성 덕분에 <파묘>에 시네마적 아쉬움을 표하는 반응들을 꽤 많이 봤다. 하지만 이 영화는 애초에 <사바하>와는 근본적로 다른 기획과 연출의 결과다.


<파묘>는 철저하게 영화적 완성도보다는 장르적 쾌감에 몰두한다. 다분히 의도적이라고 느낄 정도로. 캐릭터 디자인과 작품의 구성은 웹소설의 문법, 그러니까 거슬러 올라가자면 <퇴마록>의 장르적 문법을 충실히 따르며 그런 측면에서 <파묘>는 <사바하>보다는 오히려 <범죄도시>와 더 가깝다. 매력적인 캐릭터들과 캐릭터가 움직이며 전개되는 이야기는 시네마적 성취보다는 시청자들을 장르적으로 몰입시키는데 집중한다. 장재현 감독이 <곡성>의 에너지를 언급했다고 하던데 굳이 말하자면 <곡성>의 에너지를(그러나 안타깝게도 <파묘>에는 곡성류의 오컬트적 에너지가 굉장히 미약하다) 장르물의 문법에 충실하게 구겨 넣은 것에 가깝다.


그러나 충실한 장르물이라는 것은 언제나 그것에 따라오는 충실한 즐거움을 주기 마련이다. 오컬트적 쾌감은 전작들에 비해 현격히 떨어지지만(그래서 엄청난 겁쟁이인 나도 큰 두려움 없이 완주할 수 있었을 정도로) 잘 빠진 캐릭터들이 미스터리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의기투합하는 이야기는,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을 짜치지 않는 비주얼로 담아내는 영상과 연출은 (아쉬움도 있었지만) 유독 덕후들이 이 영화에 좋은 점수를 주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캐릭터 디자인만이 아니라 촬영과 편집 측면에서 <파묘>는 클로즈업과 풀샷을 교차로 활용하면서 세련된 무드를 만들어낸다. 공포물에서 익스트림 클로즈업은 자주 애용되는 샷들이지만 <파묘>는 풀샷을 공격적인 사용하며 역설적으로 오컬트 물에 현실감을 부여하고 이로 인한 묘한 기시감과 기괴한 이질성이 뒤섞이며 독특한 감각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것을 순수한 시네마적 관점에서 보고자 하는 시도는 영화가 지향하고자 하는 방향과 다소 동떨어져있고 그 비판들이 무척이나 중요하고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파묘>를 온전히 담아내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방금 영화를 관람하고 나온 직후에 쓰고 싶었던 이야기는 좀 다른 곳에 있다. 첫 문장에서 언급했듯이 우리의 정신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유구한 상흔이, 그 부분이 자꾸만 턱턱 걸려와서 그렇다. 이미 지난 역사라거나 어째서 또다시 일본 망령에 대한 이야기인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나 아쉬움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장재현 감독이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그는 <파묘>를 민족주의적인 창날로 삼으려 하는 의도가 없다. 그는 일본을 공격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 내부에 박혀있는 쇠말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라고,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주체성을 빼앗긴다는 것은 어떤 경험일까. 성폭력 사건들에 관한 기사를 볼 때마다 주변인들의 경험담을 듣거나 나 자신에게도 발생했던 작은 경험들을 되짚을 때마다 살인만큼이나 인간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한 힘을 강제로 빼앗겼던 기억이라는 것을 종종 떠올리곤 한다. 일제 강점의 긴 시간을 거쳐가며 우리는 무엇을 잃고 또 무엇을 회복했던 것일까.


오컬트 물이라는 두려운 기대가 초중반에 '무섭지 않음'이라는 한도 안으로 확정되면서 느슨해진 머릿속으로 문득문득 치고 들어오던 상념들. 영화 안에서는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지만, 스크린 밖에 여전히 남아있는 위안부 생존자들과 근로 정신대 피해자들의 존재가 지워지지 않은 채 어른거렸다. 우리는 무엇을 잃고 무엇을 회복했을까.


장재현 감독이 파내고 싶었던 어떤 것은 일본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그래서 그런 생각을 했다. 끊어진 민족정기니, 얼이니 하는 것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손에 잡히는 상처들이 생생하게 살아있다. 우리의 현실에는. 그들에게 평안과 위로를 건네지 못했기 때문에. 다름 아닌 우리 스스로조차도. 일본의 사과와 반성에 앞서 우리가 미처 다 파내지 못한 채로 외면하고 깊이 묻어버린 우리 곁 사람들의 이야기가 내 손안에 우리 손안에 여전히 남아있다.


조재휘 평론가가 영화 <서울의 봄>에 대해 예리한 비평을 했던 글이 기억난다. 우리는 우리 안의 원혼을 스스로의 손으로 해결하지 못해 이토록 깊고 오래 앓는구나. 다름 아닌 우리 스스로가 그 상흔을 옅어지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제의들을 미처 다 수행하지 못했구나. 거기로부터 비롯된 한과 비애가 오래도록 우리 안에 머물다 보니 령이 되고 원이 되었구나 하는 슬픔이 영화가 끝나고 나자 몰려왔다.


무속은 일본의 말살정책만이 아니라 6.25와 이후 근대화와 산업화가 빠르게 수행되면서 근절되어 왔다. 과학의 진보와 이성의 세계로 강제로 이주되면서 한국의 민속학적 뿌리는 빠르게 잊혀지기 시작했지만 놀랍도록 질기게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있기도 하다.


사람들이 박근혜 정권과 윤석렬 정권을 둘러싼 무속적 풍문들을 우려하고 개탄하면서도 자신들 스스로도 미래를 점쳐보는 무속을 찾는 아이러니. 어떤 측면에서 우리는 여전히 그것들을 끌어안고 있고 동시에 배척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파묘>를 본 직후 나는 묻고 싶어졌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무속인가 한국의 얼인가 그도 아니라면 우리의 주체와 역사에 대한 책임과 의식인가. 장재현 감독이 파내고자 했던 것은 후자일 것이라고. 그래야 말이 된다고. 너무 오랫동안 머문 령이 원혼이 되는 것이라면 진혼이라는 것은 무속의 부활이 아니라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가는 해법들에 달려있다고 그런 생각을 하며 영화관을 나왔다.


p.s 이도현이 이슈가 되고는 있지만 <파묘>는 최민식의 영화다. 여기서 이 영화를 꺼내면 역시 못 말리는 장르물 집착인간이구나 할 테지만 <극한직업>의 고반장과 같이 평범하게 뺑끼 부리기도 하지만 근본은 우직하고 성실한, 그리고 무엇보다 책임강을 강하게 느끼는 인물. <파묘>에서 땅에 대한 책임을 강하게 주장하는 캐릭터가 풍수사인 최민식이라는 것도 개연성이 있어서 좋았다.  


그가 그토록 강렬한 책임감을 느끼며 끝끝내 나무를 움켜쥐었던 것은 가장 오랜 세대로서 느끼는 부채감과 의무 때문이었을 거라고 믿는다. 모든 결자해지에는 적정한 타이밍이 존재하건만 너무 오래 유예되어 이제는 해소되지 못한 채 다시 상흔으로 남을 과거들에 대하여, 그리고 우리가 여전히 끌어안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외면과 무기력함에 대하여 속죄하고 뒤늦게라도 해결해보고자 하는 의지의 발로가 그의 결기였다고 믿는다. 다른 무엇보다 우리가 이어가야 할 고민들은 그 지점이라고 이야기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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