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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 이인숙 Feb 18. 2022

기를 쓰고 행복하지 않아도 된다

  딸아, 결국엔 네가 갈망하던 일을 하게 되어 참 좋다. 이제야말로 너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는 여유를 부릴 때야. 전철을 타고 한두 정거장만 가면 네가 좋아하는 미술관과 공원이 있구나. 보폭을 조금 늦추고 자신에게 휴식이란 선물을 주면 어떨까 싶다. 

  좋아하는 일일지라도 자신을 너무 구속하지 마라. 고대하던 일을 하니 밤을 새워도 힘들 줄 모르겠다던 네 말이 자꾸 걸린다. 물론, 좋아하는 일에서 오는 피로감이라면 기꺼이 즐겨라. 하지만, 아직도 네가 자신에게만은 냉혹하다는 생각이 든다. 몇 날밤을 새우기도 하고 때론 새우잠을 자고 출근한다는 말을 들으면 가슴에 돌덩이가 내려앉는 것만 같다. 결국엔 사람이 하는 일 아니니. 피곤할 때는 종일 침대에서 뒹구는 여유도 가지렴. 아직은 많은 부분에 갈급하지만, 지난 십여 년의 시간을 생각해 보자. 네가 대학에 입학하던 해 봄날을 기억하니. 다행히 그날 이후 잘 웃고 살가운 딸로 돌아와 열망하던 일도 하게 되어 고맙다. 기억하고 싶진 않지만, 그날의 폭풍 같던 일이 우리를 더욱더 단단하게 해주었지 싶다.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부딪히는 소리는 요란했지.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틈새를 막고자 무던히 애쓰던 일이 무색하게 감정의 둑은 터지고 말았다. 혹여, 서로에게 상처가 될까 참았던 울분은 오히려 더 날카로운 창이 되지 않았나 싶다. 한번 터진 감정의 둑은 마치 폭주하는 기관차와 같았지. 이성은 사라지고 뿔난 감정들만 쏟아졌으니 누군들 그 파편에 온전했겠니. 

  누구의 잘못도 아닌 생의 고단함이 만든 울분이었다. 모든 것은 흘러가리라, 잊히리라 여겼다. 하지만, 닦지 않은 거울엔 사물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이치와 같았지. 부모와 자식 간에 힘겨운 일은 서로 보듬고 위로를 해야 했었다. 우린 상대에게 짐이 될까 싶어 참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지. 외롭고 불편한 감정은 감춘다고 감추어지는 것이 아니더구나. 오히려 또 다른 울분이 되어 쌓이고 있었지. 우린 그 부피도 높이도 바라볼 여유 없이 살았던 거야. 네 동생이 새벽 4시에 대문을 박차고 나서기 전까지 말이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어. 녀석은 교복에 가방을 메고 외투는 입지 않은 채였다. 엄마와 언니의 감정 포탄에 녀석의 가슴인들 온전했으랴.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으니 자리를 뜨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아니 너와 나에게 할 수 있는 가장 강한 항변이었을 지도 모른다. 봄날에 때아닌 폭설이 펑펑 내리던 새벽 4시, 맨발로 뛰어나가 녀석을 붙잡고 나서야 너도나도 이성을 찾았지.

  턱까지 차오른 울분이 그리 표현될 줄 어찌 알았으랴. 넌 특정 대학의 신문방송학과를 가고자 쉼 없이 달렸지. 어미라는 이름뿐 그때도 지금도 큰 도움이 못 되었으니 할 말이 없다. 수험생의 필수코스인 학원도 제대로 보내본 기억이 없다. 과외는 더더욱 꿈도 꿀 수 없었으니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오직 자신과 싸움이었지. 기숙사 독서실을 마지막까지 지키던 것이 늘 너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난 그 외로운 도전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말을 모르길 기원했다. 친구들처럼 예쁜 옷을 입고 외출하는 걸 본 기억이 없다. 교복 외에는 줄 곳 운동복 차림이었지. 옷 따위엔 관심도 없는 듯 보였다. 도서관과 기숙사에 매달려 외출할 시간이 없으니 필요하지도 않았을 거야. 그런 너에게 세상 또한 너그럽지 못했다. 기숙사에서 지독스러울 만큼 공부에 매달리던 네가 독감으로 열이 40도를 오르내린 적이 있었지. 하지만, 관리자는 네가 외출을 하고 싶어 거짓으로 말한다며 간단한 열 검사도 하지 않아 큰일을 치를 뻔했지.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린다. 다음날에야 사실을 알고 담임에게 전화를 드렸더니 그의 대답이 나를 또 한 번 무너지게 하더구나. 사람도 세상도 야속했다. 하지만, 목구멍을 타고 오르려는 노기를 애써 눌러야만 했어. 난 너의 듬직한 언덕도 되어 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심장을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넌 어미보다 대범했지. 그러던 네가 달라지기 시작했어.

  딸아, 넌 수능시험을 보고 난 뒤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변해갔어. 수능을 준비하던 의연한 모습이 아니었다.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로 절망하던 모습에 내 가슴도 무너졌지만, 아는 체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재수는 안 된다고, 사립대는 더더욱 보낼 수 없다고 야멸차게 말했지. 장학금 지원이 확정된 지방 국립대를 선택하자는 어미에게 재수하고 싶다는 네 속마음을 어찌 말할 수 있었으랴. 어미의 뜻대로 지방대에 입학하던 날 ‘엄마, 때론 친구들이 놀자 해도 후회하게 될까 봐 참았어. 옷을 예쁘게 챙겨 입으면 다른 마음이 생길까 일부러 운동복만 입었어. 그런데 늘 놀기만 했던 친구와 같은 교정을 걷고 있는 내가 미워. 조금만 더 노력할 걸, 아니 조금만 덜 잘걸, 그도 아니면, 그때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라도 하며 공부할 걸 후회가 돼. 그러니 엄마, 나 조금만 봐주면 안 될까. 나 6개월만 하고 싶은 것 다 하며 살아보고 싶어.’ 라 말하는 너에게 어찌 아니 된다고 할 수 있겠니.

  너의 첫 해방구는 머리였다. 온통 샛노란 개나리 꽃물을 들이고 환하게 웃던 너를 나도 웃으며 반겼다. 아니 술을 먹고 하는 주정도 귀엽게 받아주었지. 하지만 새벽이 다되어 몸도 가누지 못한 채 친구 등에 업혀 온 너를 보니 가슴이 무너졌다. 그 모습은 네가 못해본 것을 원 없이 해보는 것이 아닌 자신을 스스로 망가뜨리려는 것만 같았다. 얼마나 더 나를 시험할 거냐며 통곡하는 어미를 보고 너는 오히려 화를 냈지. 그날은 너도나도 속울음 울던 자제력이 무너지고 말았다.

  딸아, 자신을 너무 혹독하게 몰아붙이지 마라. 너는 모든 일에 늘 최선을 다했어. 언젠가 네가 하는 말이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엄마, 윤수에게는 왜 내게 했던 것처럼 하지 않고 그리 너그럽고 관대해.’라고 투정 아닌 투정을 하는 모습에 너무 미안했다. 하지만, 그건 네게 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보상 같은 거라면 이해해 줄 수 있겠니. 딸아, 이제 자신에게 하던 채찍을 조금은 내려놓길 바란다. 기를 쓰고 행복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의 평화로움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우린 느끼고 있잖니.

  지난여름 우리 세 모녀가 떠났던 제주도 여행을 기억하자. 화려하지는 않지만, 태풍 속에서 널뛰는 바다를 보는 것만도 좋았지. 숙소로 돌아가던 길 태풍의 강한 바람에 쓰고 있던 우산이 망가져도 우리는 웃으며 즐거워하지 않았니. 그래, 이런 소소한 행복이 진짜 행복일 거야. 이제 조금만 스스로 관대해지자.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기를 쓰고 행복하지 않아도 된다.’라는 말이 꼭 너에게 하는 말 같았어. 이제 거울에 비친 너의 꽃처럼 고운 모습을 보며 생의 속도를 조절해보렴. 네 모습이 봄 햇살처럼 빛나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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