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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혜 Feb 29. 2024

너, 양달에게

소설 습작 3

 

  네가 그 아이로부터 노트를 돌려받은 것은 학교가 파하고 어스름이 낮게 깔릴 저녁 무렵이었다. 또래 아이들답지 않게 몇 번의 가위질로 대충 자르고 거칠게 바리깡으로 밀어버린 듯한 해방기 머리 스타일에, 눈, 코, 입이 묘하게 노인의 형상을 닮아있던 그 아이는 가방끈을 비비 꼬며 복도를 한참 서성이다가 너를 보자마자 쪼르르 달려왔다.

  이, 이, 거요, 쌤.

  아이는 품에 안고 있던 노트 -그 노트는 네가 대여섯 시간쯤 전 교실에 실수로 두고 온 노트였다-를 너에게 내밀었다. 가방에서 주섬주섬 오렌지 주스 한 병까지 꺼내 내미는 아이의 순박함에 못내 감동을 받으면서도 너는 목이 늘어날 대로 늘어나 한쪽 쇄골 뼈가 훤히 드러나 보이는 낡은 티셔츠와 땟국물이 흐르는 꾀죄죄한 얼굴, 무릎이 툭 불거져 보이는 깽깽 마른 아이의 다리에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행여 눈빛으로라도 그러한 내색을 하는 것은 아이를 무안하게 만들 것이라 여긴 너는 오로지 기쁜 안색만으로 노트와 주스를 받아 들고 명랑히 말했다.

  고맙다. 잘 먹을게, 영후야. 

  너의 말에 아이는 마치 고맙다는 말을 생전 처음 들어본 듯, 입가 근육을 부자연스럽게 움찔거리며 웃음 비슷한 것을 지었다. 그것이 웃음이 분명함을, 너는 재빨리 뒤돌아 가뿐한 발걸음으로 나는 듯 뛰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확신했다. 또 너는 이런 추측도 했다. 아이가 지금 향하고 있는 행선지는 어쩌면 등이 굽은 머루나무가 자라고 퍼석퍼석한 흙담이 둘러져 있으며, 겨울이면 수돗물이 터져 펌프로 물을 퍼 올려야 하는 슬레이트 지붕의 낡은 집일지도 모르겠다고. 

  할머니하고만 같이 사는 아입니다, 영후 걔가. 깎은 손톱을 바닥으로 툭 튕길 때나 하는 말투로 부장 교사가 무심히 말했던 어느 날부터 너는 아이에게 좀 더 특별한 관심을 보여왔다.

  쌔, 쌤. 오, 오늘, 저 일찍 집에 가봐야 해요.

  왜? 무슨 일이야?

  할, 할머니가 쌀, 쌀가마니를 들어달라고 했어요.

  한 번은 아이가 할머니의 쌀가마니를 들어드린다는 이유로 일찍 집에 가기도 했다. 열다섯 살이라 믿기 어려울 만큼 몸집이 유난히 작고 마른 아이가, 과연 몸의 어디로 어떻게 쌀가마니를 짊어질 것인가에 대해 너는 이해하지 못했다. 학교를 마치고 학원에 가기도 바쁜 세련된 도시 아이들 틈에 쌀가마니를 들러 집에 가는 아이가 있을 수도 있음도 너는 감히 상상하지 못했다. 그렇게 얼떨떨한 표정으로 멍하게 서 있는 너를 두고 아이는 비칠비칠 앞만 보며 걸어가는 70대 노인처럼 사라졌었다. 

  너는 그런 특별한 아이에게 각별한 신경이 쓰여 아이구, 우리 영후, 하면서 등을 쓸어준 적이 있었을 것이고, 아이의 작은 대답에도 정말 잘하는구나, 치켜 세워준 적 있었을 것이며, 멘토링 프로그램이 종료되던 날에는 꼭 다시 만나자, 하며 지킬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약속을 한 적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6년이나 지난 날에, 뜬금없이, 영후에게서 너를 찾는 연락이 왔을 리가 없지 않는가.

  쏴아아- 쏴-

  8월의 찐득한 무더위를 뚫어낼 기세로 장대비가 세차게 쏟아져 내리던 밤, 야근을 막 끝내고 피곤에 쩔은 너는 장우산 하나 마저 힘겹게 들고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빵빵- 경적음들이 도로 위에서 짜증스럽게 뒤엉키고, 성난 듯 맹렬히 질주하던 차들이 거친 빗물을 튀겼다. 너는 정장 치마 끝자락과 스타킹이 이미 축축히 젖어 있었고 구두 안에도 물이 흥건히 고여 불쾌한 기분을 참고 있었다. 그때 마침 휴대전화가 울린 것이고, 너는 한 손으로 겨우 가방 안을 더듬어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그러는 동안 기울어진 우산에서 빗물이 흘러내려 주루룩 뺨을 적셨다.

  서, 선생님, 저 여, 영후예요.

  그때 하마터면 너는, '누구?'라고 되물을 뻔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기 직전에 용케 아이의 얼굴을 기억해 낸 것은 다행이었다. 대학교 3학년, 꿈 많고 열정 넘치던 네가, 교육 봉사에 참여하며 만났던 아이가 아닌가. 봄에도 여름에도 항상 겨울의 나뭇가지처럼 작고 메말랐던.

  어, 영후야. 내 번호가 아직 있었구나.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네, 서, 선생님. 

  어떻게 지내고 있어, 영후? 이제 몇 살이지, 영후가?

  저, 이제 스물 한 살이요. 

  와, 많이 컸다. 영후야.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 거야?

  전화를 받으면서 빗물이 고인 웅덩이들을 피해 가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너는 오랜만에 온 아이의 연락에 잠시나마 큰 반가움을 느꼈다. 점점 더 거세지는 빗줄기에 어깨와 발이 흠뻑 젖어버린 것도 그때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 너는 빗소리 사이에서 아이의 목소리에 세심히 골라내어 아이가 성장 후에도 말을 더듬는다는 것을 파악했고 좀 더 걸걸해진 목소리를 통해 다행히 변성기가 무사히 지났음도 짐작했다. 

  저 군대 왔어요, 선, 선생님.

  아이는 자신이 육군 이등병으로 군대에 와 있다고 했다. 너는 약한 초식동물 같은 아이가 약육강식의 정글에서 얼마나 외롭고 고되면 어린 날 잠시 스쳐 지나간 인연에 불과한 너를 기억해 냈는가 하며 측은지심을 느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대학 시절, 군대에 간 남자 동기들이 일면식도 없던 여자 선배나 동기들에게 느닷없이 밤 중에 전화를 걸어 외로움을 호소하던 기억도 떠올랐으나, 이번 전화는 그런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을 것이라 믿었다. 그리하여 그래, 우리 영후, 힘들겠다, 장하다, 버텨야 해, 그런 말들로 아이를 독려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무참하게도, 아이는 너의 기대를 짓밟으며 기계음에 가까운 쇳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서, 선생님, 혹시 남, 남자친구 없으면 저, 저랑 사귀실래요?

  비는 그칠 줄 모르고 퍼부었고, 우산을 든 오른팔도, 휴대전화를 든 왼팔도, 물이 흥건히 고인 발도 너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만큼 진절머리 나게 했다. 너는 젊은 시절 교사로서 순수했던 네 호의를 전화 한 통화로 무례하게 침범하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로 모욕하는 아이를 향해 폭주하고야 말았다.

  야, 내가 너랑 왜 사겨. 어? 그리고 나 남자친구도 있어. 알겠어? 끊어,  

  *** 

  그날 이후로 너는 한때 특별히 대우했던 아이를 이제는 아주 매몰차게 대하리라 마음 먹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새해 때마다 복을 많이 받으라는 메시지를 보내왔으나 너는 그마저도 징글 맞다, 주제 넘는다 여기고 답장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던 네가 다시 아이에게 특별하고 각별한 관심을 회복하게 된 것은 8월의 그 여름밤으로부터 5년이 훌쩍 지난 무렵이었다. 간만의 SNS 접속에서 우연히 아이의 새 글을 확인하고 너는 벼락 맞은 나무처럼 놀라고야 만 것이다.

  열다섯, 빼빼하게 말랐던 아이의 몸은 그래도 당시에는 수컷의 몸이었다. 그러나 SNS 속 스물 여섯의 어른이 된 아이는, 푸석한 장발을 샛노랗게 물들이고, 한껏 올린 속눈썹과 붉은 립틴트로 얼굴을 해사하게 꾸민 채, 가녀린 어깨를 한껏 드러내며 베시시 웃고 있었다. 저와 똑같이 노란 머리를 한 사내의 어깨에 목마를 타고 사랑에 빠진 여느 연인들처럼 커플샷을 뽐내는 여인의 모습으로. 

  너는 그것을 보고 떨리는 손으로 아이에게 메시지를 전송했다. 영후야, 잘 지내? 예뻐졌구나…. 그러나 너는 그러한 네 연락이 얄팍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인지, 매몰찬 무관심에 대한 미안함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그 모두에서 온 것인지 분명히 알진 못했다. 확실한 것은 할머니의 쌀가마니를 들어주러 간다던 열다섯 살 난 아이에게 그랬듯 너는 다시 특별하고 각별한 관심을 아이에게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런 너에게 아이는 무례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너에게 했던 여름밤의 무더운 고백을 통째로 잊은 것인지, 아니면 잊지 않았어도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인지 그저 자신이 겪은 격랑의 5년을 단 몇 문장으로 줄여 말할 뿐이었다. 

  반가워요, 선생님. 사실 군대 때부터 고민이 되었는데, 제대하고 나서부터 호르몬 주사 맞고 있어요. 차차 돈 모아서 수술도 할 계획이에요. 

  너는 아이에 대한 노골적인 질문이 목 끝까지 차오름을 느꼈다. ‘군대에서 무슨 일을 겪은 거냐, 인터넷에서 떠도는 그런 난삽한 일이 너에게도 일어났던 거냐, 그게 아니라면 어떤 일이 있었던 거냐….’

  그러나 너는 차마 입술을 떼지 못했다. 응달의 가지는 이파리를 틔울 만한 햇살을 찾아 뻗어나갈 뿐이다. 미지의 영역, 단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영역을 향해 날아가는 스페이스 A처럼 온 몸을, 온 팔을 뻗치고 또 뻗치고 할 뿐인 것이다. 그리하여 메마른 겨울 나뭇가지는 그 언젠가는 쌀가마니를 지게 한 할머니를 향해, 노트를 두고 간 스물 셋의 너를 향해, 스물 아홉의 먼 타지에 있는 너를 향해 뻗어가다 이제는 흐뭇하게 웃으며 저를 목마 태우는 사내에 머물러 있다. 그래, 너는 한때 그 누군가에게는 단 한 번도 상처주지 않은, 따뜻한 양달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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