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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일기 Mar 07. 2024

시험의 여운

나는 무엇을 위해 미국변호사 시험을 보는가


시험이 끝난지 일주일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 몸도 마음도 DC에서 벗어나지 못한 느낌이다. 벌써 며칠째 낮시간과 초저녁 시간에 졸음이 쏟아지다가 이후 새벽 3시까지 잠을 이루지 못한다. 


회사에 있는 내내 졸음을 쫓으려 손을 꼬집었다가, 커피를 마시러 탕비실에도 들렀다가, 그 다음엔 밀크티도 한번 만들어 먹는다. 그래도 안되면 괜히 책상을 높여서 선채로 문서를 들여다보기도 하다가, 이내 사내 문구점에서 색깔별로 볼펜과 형광펜을 챙겨온다. 옆자리 리즈는 종일 거의 움직이지도 않고 일하고 있는데 자꾸 왔다갔다 하는 내가 산만해보이지는 않을지 눈치가 몹시 보이기도 한다. 


그나마 시차는 며칠내 적응을 하겠지만, 정신적으로는 더더욱 뒤죽박죽인 상태다. 시험을 보고 돌아오자마자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격려와 조언을 해주었다. 다들 "시험 어땠어?"가 첫마디였는데, 거짓말을 할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쉽지 않았다"고만 답했다. 


나의 이런 자신 없는 반응에 어떤 분은 본인의 경험을 얘기해주면서 "나도 시험장에서 나올땐 무조건 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확인해보니까 붙었어. 너도 잘 했을거야!"라고 했다. 내가 3주를 준비하고 시험보러 갔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분의 이야기다. 반면에 이번 시험 준비과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또 다른 분은 단기간에 붙을 수 없는 시험인데도 불구하고 내가 너무 조급하게 준비하는 것 같아 다소 걱정이 된다고 충고해주기도 했다. 


여기저기서 이런 저런 얘기들을 듣고 나니 마음이 더욱 어지러워져서 레딧에도 들어가 보았다. MEE 6번은 미국애들한테도 어려운 문제였구나. 그런데 이전에 합격했다는 애들 글을 보니까 더 자신감이 하락하다 못해 추락한다. UBE score scale을 들여다보니 내가 이 점수에 정말 도달할 수 있을까 싶은 마음도 든다. 


여지껏 많은 힘든 시험들을 겪어보았지만, 이번 시험은 정말 너무 힘들었다. 물리적으로 도저히 안될 것 같은데, 그렇다고 완전히 포기는 안되었다. 그놈의 욕심이 문제다. 나이 먹고 퇴화해버린 암기력은 내 욕심에 장단을 맞춰줄 여력이 없다. 게다가 영어로 짧은 시간 안에 암기를 해야하는 상황에 부딪히니 더더욱 머릿속에 단어들이 들어가지를 않는다. 


안그래도 시간이 부족한데, 왜 그 부족한 시간조차도 좀 더 촘촘하게 쓰지를 못하는 건지도 내 자신에게 참 실망스러웠다. 뭔가 조금이라도 머릿속에 찼다 싶으면 자꾸 쉬어달라고, 아니면 기름칠이라도 해달라고 나의 뇌가 기를 쓰고 몸부림을 친다.  


체력은 또 어떠한가. 그 소중한 시간 중에 간간히 몸살이 나서 쉬어야 했다. 자꾸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은 결국 체력 문제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체력이 좋았던 적은 한번도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운동을 해서 조금씩이라도 체력을 개선해야 한다. 



이번 시험이 끝나고 나서는 정말 다시는 시험장에 오고싶지 않다는 생각만 계속 했었다. 너무 힘드니까, 그리고 내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것 때문에 내 가족들도 힘들어지니까, 이렇게 오랜 시간동안 나는 왜 불행을 사서 자처하는가 싶었다. 머리도 나쁜 내가 무슨 공부를 하겠다고 이렇게 20년 가까이 사서 고생인가. 사실 정말이지 책 한번만 슥 읽어도 바로 이해하고 머릿속에 정리까지 되는, 그런데 거기에다가 엉덩이까지 무거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공부로 승부를 보겠다는 것인가. 


오랫동안 내게 계속된 일련의 불행한 환경과 사건들 때문에 뜻을 펼쳐보지 못했다고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다. 왜 내게만 이렇게 세상이 어려운 거냐고.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다 피해의식이었다. 다 내가 견딜 수 있을만한 불행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냈어야 했고, 결국 해내지 못한건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잘못된 정신상태로 살았기 때문이었다. 나보다 더 힘든 환경에서도 해내는 사람들도 많다. 그저 내가 거기까지 밖에 안되는 것일 뿐이었다. 

 

분명히 처음 시작할 때, 오롯이 나의 의지로, 월급을 때려붓고, 온갖 방해물과 어려움을 뚫고 인고의 시간을 보내면서 준비한 프로젝트인데도 불구하고, 정말 한심하게도 어느 순간 왜 이걸 하고 있는지를 종종 잊는다. 아니, 생각보다 너무 자주 잊는다. 그저 준비하는 동안의 힘듦과 고통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나의 목표를 명확하게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법무와 컴플라이언스 업무를 하면서 이 업무가 나에게 정말 잘 맞는다고 느꼈다. 내가 여지껏 공부로 쌓아온 것들을 가장 잘 융합할 수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문제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깊이 파고들고, 결국 답을 찾아내어 유레카를 외칠때 내 머릿속 도파민이 치솟는다. 내 스스로 재밌다고 느끼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벌수 있다는 것은 정말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다.


다른 부서에 가보니 그런 점이 더욱 명확하게 느껴졌다. 물론 회사에 있으면서 회사의 이익보다 내 커리어를 우선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조금이라도 기회의 창문이 열려서 회사의 이익과 내 개인의 커리어 개발이 같은 방향을 향할 수 있다면 그만큼 감사한 일이 또 어디있겠는가 싶다. 하지만 어차피 이 부분은 내가 노력을 해볼 수는 있어도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은, 내가 법무/컴플라이언스 영역에서 계속 일하고 싶다고 생각한 만큼, 그에 맞는 자격과 실력을 갖추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의 어딘가에서 쓰임을 받기 위해서 나의 자격과 실력에 대한 끊임없는 증명을 해내는 것이다. 그 증명의 가장 첫단계에 있는 것이 나에게는 바로 미국변호사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복잡한 마음을 다잡고, 다시 한번 책상 앞으로 돌아온다. 당장 대단한 꿈을 꾸는 것도 아니고, 미국변호사가 된다고 해서 당장 내 미래가 엄청나게 변할 것이라는 덧없는 기대를 하는 것도 아니다. 다른 무엇도 아니고 내가 좀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서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는 것이다. 설령 누군가는 있으나마나한 자격증이라고 생각할지라도, 그 작은 변화가 어떤 길로 이어질지는 사실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최근 유튜브 영화채널에서 "나이애드의 다섯번째 파도"라는 영화에 대한 리뷰를 보았다. 나이애드라는 64세 여성 수영 선수가 쿠바에서 플로리다 바다를 110.86마일을 수영해서 52시간 54분 18초만에 횡단한 실화를 다룬 영화다. 


영화에서 그녀가 그녀의 코치에게 쿠바-플로리다 횡단 계획을 밝히자, 그녀의 코치는 "26살에도 못해낸걸 60살에 어떻게 해낸다는 거야?"라고 묻는다. 그녀가 26살 때에도 횡단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는 이렇게 답한다. "나 정신이 아주 또렷해진 상태야. 나이가 어렸을 때에는 그런 정신이 없었지만 지금은 분명히 있어. 난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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