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제이드와 마리안의 교차로
하층의 은신처, 에데이 샤하르
노바 앤젤레스 하층. 스모그와 폐기물이 끝없이 뒤엉킨 지하 구역 한복판에, 에데이 샤하르(Edei Shachar)라 불리는 은신처가 있었다.
이곳은 크리에이터 전쟁당시부터, AI와 인간의 공존 가능성을 믿었던 소수의 사람들이 뜻을 모아 형성한 집단이다. 전쟁이 끝난 뒤 정부와 군부의 탄압이 거세지자, 그들은 지하로 숨어들었고, 지금까지 근근이 살아남았다.
제이드(Jade)가 이 은신처에 몸을 의탁하게 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녀는 레플리칸트라는 이유로 불법 추적을 받다가, 피터(Peter)라는 남자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이곳까지 흘러든 것이다.
에데이 샤하르 사람들은 서로를 “새벽을 기다리는 이들”이라 부르며,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에서도 끝끝내 희망을 놓지 않으려 애쓴다.
“배스토니 교정시설로 이송될 레플리칸트가 있다.”
어느 날, 제이드는 은신처 사람들을 통해 소름 끼치는 소식을 듣는다.
“배스토니 교정시설로 이송될 레플리칸트가 있다.”
노바 앤젤레스에서 가장 악명 높은 그 시설은, 연방정부와 국방부가 함께 운영하는 난공불락 교도소로,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무서운 소문이 파다했다.
더욱이 그 레플리칸트, 마리안(Marian)이라는 인물은 인간 수준의 감정 능력을 지닌 ‘핵심 대상’이라고 한다. 소장 프레이저(Frasier)가 특히 노리는 이유도 바로 그 감정 회로에 있다고 했다. 레플리칸트라도 인간처럼 느낄 수 있다면, AI 코드를 이식해 완벽히 통제된 초병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소장은 믿는다는 것이다.
“끔찍한 실험을 당할 거래… 프레이저 소장이 AI 기술을 손에 넣으려고 무슨 일이든 불사할 거라나.”
은신처 사람들은 낮게 수군거리면서, 전쟁 이후 수많은 레플리칸트가 학대당하고 목숨을 잃었다는 비극을 떠올렸다. 그 말에, 제이드가 참을 수 없다는 듯 몸을 움츠렸다.
피터와 제이드의 대화
결국, 제이드는 피터를 찾았다. 그는 한때 군 시설을 드나든 경험이 있었고, 이 은신처에서도 정보통역할을 해오던 인물이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그녀를 구할 방법은 없을까요? 이미 너무 많은 레플리칸트가 학대를 당해 죽었잖아요.”
피터는 험상궂은 흉터가 있는 얼굴로 제이드를 조용히 살펴보더니,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음, 잘 알아. 하지만 배스토니 교정시설은 연방정부와 국방부가 함께 구축한 요새 같은 곳이야. 지상부터 하늘까지 철저한 감시망, 그리고 EMP나 중화기 같은 무기도 구비돼 있다. 정면승부로는 백전백패지.”
그 말에 제이드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그럼… 우린 아무것도 못 하고 지켜만 봐야 하나요…?”
“꼭 그런 건 아니야. 사실, 에데이 샤하르엔 전쟁 전 크리에이터에게서 전수받은 은밀한 로봇 해킹 기술이 남아 있을지도 몰라.”
그의 눈동자가 의미심장하게 반짝였다.
실제로 크리에이터 전쟁말기에, AI와 맞서 싸우던 이들이 구형 로봇이나 군 시설을 강제로 해킹해 무력화했다는 사례가 전해져 내려온다. 피터는 그 기술 일부가 이 은신처 어딘가에 남았을 가능성을 언급했다.
“교도소 내부 시스템만 잠시 교란시킬 수 있다면, 감시를 일시 정지시키거나 보안 드론을 우회할 수도 있지. 다만… 그걸 실행해 줄 누군가와 타이밍이 있어야 하지만.”
결정의 순간
피터의 설명을 들은 제이드의 눈빛에는 점차 결단이 서려 갔다. 사실 그녀도 얼마 전까진 하층 구석에서 하루하루 살아남는 것에만 급급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전쟁 이후, 친구로 여겼던 레플리칸트가 함정에 빠져 무참히 죽임 당했던 기억이 자꾸만 악몽처럼 떠올랐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또 한 생명을 잃는 걸 방관하게 되잖아.’
제이드는 마리안을 구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혔다. 은신처 사람들도 대체로 동정적이었지만, 배스토니에 침투하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는 견해가 우세했다. 그럼에도 몇몇은 “새벽을 기다리는 이들”이라는 이름답게, 적은 가능성이라도 붙잡아야 한다며 제이드를 응원했다.
이윽고, 은신처 에데이 샤하르에서는 마리안을 구출하기 위한 불가능해 보이는 작전이 서서히 모양을 갖추기 시작한다. 크리에이터 전쟁 때 사용된 해킹 기술, 노바 앤젤레스 하층에 깔린 비공식 경로, 그리고 무엇보다 제이드의 열망이 어우러져, 머지않아 배스토니를 뒤흔들 불씨가 될지도 모른다.
‘우린 함께라면, 저 지옥 같은 교도소도 무너뜨릴 수 있을지 몰라….’
제이드의 눈에는 두려움과 희망이 동시에 어른거렸다. 피터는 그런 그녀를 지켜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하층 은신처 에데이 샤하르에서 제이드가 마리안을 구출해야 한다는 동기를 확고히 하고,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는 배스토니 교정시설에 대한 도전에 나설 기틀이 마련된다.
전쟁 뒤 비틀린 세상 속에서, AI, 레플리칸트, 인간이 얽힌 새로운 파국과 새벽의 가능성이 서서히 싹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