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감실

“자비의 심장, 감실을 떠나 형제를 품다”

by 진동길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성심’(거룩한 마음)을 바라봅니다. 그 성심은 상징이 아니라, 실제로 피 흘리고 사랑한 심장이며, 지금도 성체 안에 살아 숨 쉬는 ’사랑의 심장‘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감실 안에만 머무는 심장이 아니라, 세상 한가운데에서 여전히 떨고 있는, 고통받는 이들의 심장 속에 자리한 예수님의 성심입니다.




1. 예수님의 자비


복음서에서 자주 나오는 단어 중 하나가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입니다. 이는 단순히 ‘불쌍히 여겼다’는 말이 아니라, 내장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격정적인 연민과 떨림을 뜻합니다.


이 단어에 상응하는 히브리어가 있습니다. 바로 ‘라하밈’(רחמים). 이 말은 ‘자비’를 뜻하지만, 그 어원은 ‘라헴’(רחם), 곧 ‘자궁’을 의미하는 말에서 왔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느님의 자비는 단순한 도덕적 동정이 아니라, 자식을 품은 어머니의 자궁처럼, 생명을 지키려는 절절한 몸의 울림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성심은 바로 그런 심장입니다.




2. 한 겨울밤, 감실에서 나와 우리 곁으로 오신 성심


한 수도원에 조용히 하느님만을 섬기며 살아가던 문지기 수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같이 이른 새벽 수도원의 문을 열고, 늦은 밤까지 성실하게 닫는 삶을 살았습니다. 늘 말은 없었지만, 그의 눈빛은 따스했고, 미소는 평화로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겨울밤, 한 젊은 부부가 아기를 안고 수도원 문 앞에 도착합니다. 밤은 깊었고, 추위는 매서웠으며, 아기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습니다.


그 순간, 수사님은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성당 안에 그들을 들여보내고, 감실의 예수님을 다락방으로 모셨습니다. 그분을 대신해, 추위에 떠는 형제를 감쌌던 것입니다.


다음 날, 다른 수사는 이 광경을 보고 깜짝 놀라 말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예수님을 다락방으로 옮기고, 사람들을 여기에 눕힐 수 있습니까?”


문지기 수사님의 대답은 단순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감실 안에 계실 땐 추위를 타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오늘 밤엔 형제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너무 추워하셨습니다.


그 말 한마디는 그 어떤 수려하고 탁월한 강론보다 더 깊고, 더 뜨거웠습니다. 그는 감실 안의 예수님만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형제 안의 예수님도 동일하게 모셨던 것입니다.




3. 성심을 닮은 신앙, 감실에서 거리로


사랑하는 여러분,

성체를 향한 경배가 참되기 위해서는, 성체 안의 예수님을 인식할 뿐 아니라, 형제의 고통 속에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는 눈이 함께 열려야 합니다.


우리는 감실 앞에서는 경건히 무릎 꿇지만, 세상의 눈물 앞에서는 너무 쉽게 외면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체 신심은 감실 안의 예수님께 예를 표할 뿐 아니라, 거리의 가난한 이, 갇힌 이, 상처받고 아파하는 이에게 손을 내미는 데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하느님의 성심은 무한한 자비의 심장이며, 그분의 고동은 오늘도 우리 삶 속에서 들립니다.


그 고동은 말합니다: “나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지만, 때로는 네가 나를 옮겨야 한다.”


우리 주변에 떨고 있는 형제들에게로,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에게로, 상처받고 아파하는 이들과 갇혀있는 이들에게로, 성체가 옮겨지기를 기다리는 마음. ‘예수 성심’입니다.




“성심 안에 머무르는 자는, 형제를 안아줍니다.”


예수님의 성심은 단지 경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닮아가야 할 삶의 방향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성체를 모시고, 성심을 기리며, 또 한 걸음, 그분을 닮은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시다.


“자비는 자궁처럼 생명을 품는 사랑입니다.” 오늘 그 사랑 안에 머무르고, 그 사랑을 실천하며, 우리도 누군가를 위한 감실이 되어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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