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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색광선 Sep 29. 2023

태극기를 달고 달린다는 건

1947 보스톤(Road to Boston, 2023)

 영화를 보았던 이유는 순전히 하정우 때문이었다. 마케팅 관계자들은 1947 보스톤 마라톤 대회 우승자인 '2 손기정', 서윤복 선수에 대한 실화를 알리려 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작품 개봉 소식을 들었을   처음으로 떠오른 , 「걷는 사람, 하정우(2018) 라는 책이었다.


평소 역사에 관심 있는 중장년층에게는 소위 국뽕 줄거리가 관전 포인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2030 MZ 세대라면 1947년이란 미군정 시대는 상상조차 어려울 만큼 낯설다. 만약 걷기나 달리기를 즐기는 젊은이라면 나처럼 "마라톤이라는 스포츠를 얼마나 매력 있게 그려냈을까?"라며 궁금해할지도 모른다.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홈페이지


이 책에서 하정우는 자기 정체성을 배우이자 '걷는 사람'이라고 밝힐 정도였다. 얼마 전 영화 홍보 차 그가 출연한 어떤 유튜브 영상에서도 자신이 무릎이 안 좋아져서 원래 달리기를 좋아했으나 걷기로 만족한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때문에 이 사람이 손기정이란 인물을 연기한다는 소식에 귀가 솔깃했다. 배우란 모름지기 자신이 맡은 인물 내면을 이해할 수 있어야만 그 배역을 수락할 수 있지 않은가. 때문에 그가 전설적인 운동선수이자 보스톤 마라톤 주자였던 제자 서윤복을 어떻게 극 중에서 키워냈을지가 제일 궁금했다.



손기정은, 서윤복은, 그리고 이 시대에 이들과 함께 마라손(당시 명칭은 '마라톤'이 아니었다)을 함께 한 동료들은 어떤 마음으로 함께 뛰었을까? 주인공인 하정우와 임시완이 화면을 가득 채우며 경기 전략을 고심하는 모습도 보였지만 전경 뒤 배경을 차지한 이름 없는 선수들이 눈에 더 아른거렸다.


이젠 왜놈들이 아니라
코쟁이들이 설쳐대네.


2차 세계대전 후 우리끼린 1945년 광복을 외쳤지만, 아직도 코쟁이 서양인들이 사는 외국에선 변변한 나라가 아닌 난민국민 취급을 받았던 이들이다. 이들이 구멍 난 신발을 부여매고 연습하는 장면 속 어떤 엄숙함이 후손인 내게 전해지는 건 왜일까. 유망주 서윤복만큼 기록이 안 나오는 데도 고된 훈련에 매진하는 이들이 어떤 심경이었을지 현재를 사는 우리는 알 길이 없다.


이런 감상을 정리하기 어려울 땐 슬쩍, 하정우가 쓴 책을 엿보기 해본다. 마라토너를 연기한 장본인으로서 실제 자기 모습 중 일부가 맡은 배역의 몸짓과 정신에 베어 들지 않았을까 감히 상상해 본다. 그는 삶이 녹록지 않을 때도 걷기를 계속했다고 했다. 책 서문에서 그는 걷기를 이렇게 말한다.


내가 처한 상황이 어떻든,
내 손에 쥔 것이 무엇이든
걷기는 내가 살아 있는 한
계속할 수 있다는 것.


서윤복 선수에 빙의해 끝까지 완주해 낸 임시완 배우 연기를 보면 마라토너만이 느끼는 짜릿함이 조금이나마 전해진다. 자신과의 약속, 정해진 코스를 포기하지 않고 완주하겠다는 다짐. 숨줄이 끊어질 듯 턱까지 차오르는 고통을 견디며 정해진 목적지까지 다다를 때 느끼는 충만함. 역사 같은 걸 몰라도 이 마라톤 코스를 잠시나마 간접 체험해 볼 수 있다.



손기정 선수는 일제 강점기 시절,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했을 때 시상대에서 월계수로 일장기를 가렸다는 이유로 강제 심문을 받고 결국 육상을 그만두겠다는 각서를 써야 했다. 뛰고 싶은 자가 그걸 못한다는 건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서윤복 선수는 잠을 줄여가면서라도 아픈 어머니 간병을 위한 병원비를 벌기 위해 뛰었다.

상이 아니라
상'금'이 중요하지


서윤복도, 손기정도, 동료 선수들도, 현실에서 달리기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가만히 있는 대신 뭐라도 한다면, 태극기를 달고 뛴다면 암울한 현실 속에서 무엇이 바뀌리라고 기대했을까? 그네들에게 한 두 푼 모아 필요 경비를 보내고 경기 당일 가슴 졸이며 라디오 경기 중계에 귀를 모은 사람들은 무슨 마음으로 이들을 응원했을까?


더더욱, 감히 헤아리기 어렵다.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낀다. 우리가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 된 건 기이한 일이다. 이 시절 대한민국은 6.25 참전국인 아프리카 국가 에티오피아 보다도 국민 소득이 낮았다. 불과 80여 년 전 일이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을 때 이들은 그저 뛰었다. 이걸 하리라고 뭐가 달라질지도 몰랐으리라. 먹구름 같은 조국의 상황을 떠올렸을 때 그저 그들은 뭐라도 해야만 했다.



젊은 유망주 서윤복은 달리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손기정 감독은 자신이 못다 이룬 꿈을 제자가 이루어주길 바랐다. 실제 보스톤 마라톤 장면을 얼마나 생생하게 재연했나 보니, 경기 자체도 현실감 있게 고증한 티가 나지만 경기를 치를 수 있게 되기까지 이들은 국내 친일파들에게, 나라 밖 서양인들에게 갖은 설움을 겪은 걸 보게 된다. 이들이 마음고생한 과정을 보니 새삼 착잡해진다.


당시 손기정은 운동을 그만둔 채 슬럼프 상태였고, 코치였던 남승룡 선수는 몇 년 후 런던 올림픽 출전을 꿈꾸고 있었다. 하지만 올림픽에 나가려면 이전에 국가 차원에서 국제 대회 참가 이력이 있어야 했는데 손기정 선수 기록은 인정받지도 못했다. 일본 국기를 달고 뛰었던 이력은 일본 기록으로 귀속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분통을 터뜨렸지만 결국 손 선수와 친분이 있는 외국 선수에게 손 편지를 보내어 초청을 받아야 했다. 초정장을 받았더라도 제대로 국가 취급을 못 받았기에 미국 입국 시 재정 보증금 2000불(900만 원)과 현지 보증인까지 구해야 했다.


이 돈은 결국 시민들의 모금으로 충당했다. 해방 후에도 돈줄을 쥐었던 친일파들은 이들에게 지갑을 열지 않았다. 이들은 미 군용기를 얻어 타고 괌,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등을 거쳐 며칠이 걸려 보스톤에 도착한다. 천신만고 끝에 도착했건만 막상 이들이 받아 든 선수 유니폼엔 미국 성조기가 새겨져 있었다. 이 옷을 입고 출전을 한들, 미국 국적으로 달린다는 게 무슨 소용이냐며 이들은 다시 좌절한다. 결국 여론전을 펼치고 대회 관계자 앞에서 무릎을 꿇고 호소하며 이들은 귀중한 태극마크 유니폼을 얻어낸다.


아무리 신파를 걷어냈다고 해도 여전히 조금은 있다. 국뽕 냄새가 나도록 유니폼 및 재정 보증금 에피소드는 실화와는 다르게 다소 각색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 해도 참고 볼 만하다. '백두산 호랑이'로 불린 홍범도 장군 흉상을 철거한다는 얘기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여론에 흘리는 작금의 사태를,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뭐라 한 마디 대꾸조차 못하는 우리의 친일파 대통령을 떠올려보면, 과거에 이리도 투혼을 발휘했던 선조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이미지 출처: 나무 위키


“한국의 완전독립을 염원하는 동포들에게 승리를 선물로 바친다. 나의 우승은 1910년 이래 일본의 지배를 받아왔고, 4천 년의 역사에 빛나는 한국의 완전독립을 염원하는 삼천만 민족에게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 제51회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 직후 기자들에게 토한 서윤복의 일성


서윤복은 ‘나는 뛰다가 쓰러질지언정 결코 기권하지 않겠다.’는 출사표를 스스로에게 쓰고 나갔다. “어디쯤 선생님이 계실 텐데…” 28km 지점에서 멀리 손 흔드는 손기정과 마주쳤다. 하프를 넘어서까지 우승 후보 미코 히타넨과 나란히 달리는 제자를 보자 손기정은 가슴에 불덩어리가 복받쳤다. 앞만 보고 달리는 서윤복의 귓가에 “조국을 위해서! 우승해서 돌아가자!”는 스승의 울먹이는 고함이 들렸다.

- 대한체육회 체육포털 스포츠미디어




https://headla.it/articles/y5snILMp5NpfwFaGHHEfQ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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