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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색광선 Oct 25. 2023

어두운 아메리칸 드림이 불러온 원주민 잔혹사

플라워 킬링 문(2023)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로버트 드 니로를 보고 싶다면, 거장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만든 신작을 보고 싶다면, 눈부신 성장 이면에 감춰진 잔인한 미국사를 탐험하고 싶다면 지금 영화관에 가볼 만하다.


제목만 봐서는 영화가 무슨 내용인지 알기 힘들다. 원제는 ‘Killers of the flower moon’,  한국어로 바꾼 제목은 ‘플라워 킬링 문’, 줄거리가 바탕을 둔 한국어 책 제목은 ‘플라워 문’이다. 정확하게 역사를 고증하고 싶어서였을까, 이 영화를 감상하기에 가장 큰 장벽은 긴 상영시간이다. 자그마치 206분을 요즘처럼 인내심이 바닥난 관객들이 몰입하기엔 부담될 만하다. 하지만 취향에 맞다면 아마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를 정도로 유려한 만듦새에 감탄하게 된다.


검색을 통해 우선 저 알쏭달쏭한 제목부터 살펴보자면, 뜻은 이렇다. 아메리칸 원주민인 오세이지족은 코요테가 큰 달 아래에서 울부짖는 5월을 큰 꽃들이 작은 꽃들에게 갈 빛과 양분을 빼앗는 식으로 밀어내며 죽이는 순간으로 기억했다. 이런 자연 현상을 빗대어 그들은 5월을 '꽃을 죽이는 달(flower-killing moon)'로 불렀다고 한다.


줄거리 자체는 간단하다. 이 영화가 던지는 근본적인 질문은 "인간이 가진 탐욕은 어디까지일까?"이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 전작들처럼 이 작품도 학살과 약탈로 대륙을 지배하려 했던 미국 역사를 다룬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에서 감독은 아메리카 원주민과 백인 간에 '검은 황금', 석유 쟁탈전이 벌어지던 암울한 시절을 보여준다. 제목이 암시하듯, 백인들은 원주민이 가져가야 할 이익을 빼앗으려 연쇄 살인을 저질렀다.



백인이

아메리칸 원주민을

말살하려 하다



원주민 오세이지족은 원래 살던 터전을 뺏기고 오클라호마로 강제 이주를 하게 된다. 그런데 이곳에서 잭팟(jackpot)이 터졌다. 농사도 어려운 척박한 땅에서 갑자기 석유가 발견되자, 이들은 벼락부자가 된다. 하지만 이 즈음부터 오세이지족 사람들은 하나둘씩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


주인공인 두 명배우는 모두 악인 역할이다. 어니스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역)는 무식해서 머리를 굴릴 줄은 모르지만 얼굴은 꽤 반반하다. 우선 그는 원주민들의 재산을 갈취하려고 오세이지족 여인 '몰리'와 전략적인 결혼을 한다. 이렇게 혼인이 성사되도록 배후에서 어니스트를 조종한 건 삼촌 윌리엄(로버트 드 니로 역)이다.


영화에서는 오세이지족 연쇄 살인 사건을 충실히 고증하려 한다. 탐욕에 불붙은 백인 노인네, 마을 유지인 윌리엄은 오세이지족을 멸절시키려는 큰 그림을 그린다. 조카 어니스트를 통해 원주민들을 차례로 살해하고, 결국 자기 조카도 죽이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또한 원주민들이 백인들과 섞여 살면서 알코올 중독에 빠지고 단 음식을 즐기며 당뇨병을 얻는 등, 수명이 단축될 만큼 병들어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부(富)를 가진 자가

악마로 변하는 과정



이 실화는 착잡한 결말로 끝난다. 이 두 악당은 원주민들이 거금을 중앙 정부에 지불하고 수사를 요청한 덕에 법의 심판을 받는다. 하지만 교활한 윌리엄은 정치인들을 회유해서 결국 자유의 몸이 된다. 당뇨가 있던 원주민 여인 몰리는 어니스트와 이혼한다. 몰리는 남편이 인슐린을 아내한테 주사한답시고 죽음에 이르는 약을 자신에게 주입해 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그녀는 다른 남자와 재혼한 후에도 당뇨로 고생하다 결국 50세로 단명한다.


사건이 흘러가는 꼴을 볼 수록 관객들은 혀를 끌끌 차게 된다. 노인 윌리엄은 자기 조카 어니스트뿐만 아니라 다수를 회유해서 서로를 죽이게끔 계획을 짰다. 즉,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약자들이 서로를 죽이는 생태계를 만들었다. 하지만 겉보기에 이 늙은이는 기부를 활발히 하고 원주민들과도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는 마을 부보안관이다. 윌리엄처럼 부(富)를 가진 소수가 욕심을 조절하지 못하면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는 사회 시스템은 견고해지고, 이런 제도에 따라 결국 가난한 다수가 생기게 된다.


정의를 구현하는 사법 제도 또한 가진 자들이 움켜쥔 이익을 보호하는 목적으로 움직이다 보니 원주민들이 돈을 갖다 바쳐야 비로소 미 중앙 정부가 움직였다. 있는 자들을 위해 법이 군림하도록 백인들은 교묘한 제도를 만들었다. 원주민들은 백인들이 만든 희한한 법률 때문에 재정적 자유를 행사할 수 없는 '금치산자'로 대우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자기 땅에서 난 석유를 팔아도 돈을 제대로 인출해서 쓸 수가 없었다.




가진 자가 기득권 지키기,

멈추지 않는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머리 좋은 가진 자들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제도를 합법화하는 모습은 반복되는가. 영화를 보노라면 1992 LA 흑인 폭동처럼 법이 백인 위주로 작동했던 사례들이 저절로 떠오른다. 석유 채굴 시대 이전, 서부를 개척하던 시절에도 이민자들이 서로를 짓밟으며 부를 거머쥐려는 약육강식 법칙이 대륙을 지배했었다.  시절을 참고할 만한 영화로는 <천국의 (1980)> 있다.


이렇게 자기네들이 감추고픈 어두운 역사라도 막대한 예산을 들여서 제작할 만큼 개방적인 미국의 제작 환경이 새삼 부럽다. 만약 우리나라라면 한국인들이 역사에서 저지른 실수들을 상업영화로 만들겠다는 기획에 돈을 맡길 투자자는 없을 것이다.


지금도 한국 사회에선 정부가 저지른 잘못을 들춰내는 작품들은 알 수 없는 어두운 세력의 통제를 받는다. 최근의 예를 보아도 2022년 이태원 참사 사건을 소재로 만든 다큐멘터리 <크러쉬(Crush)> 는 아예 한국인이 제대로 볼 수 조차 없게끔 OTT에서 막아놓은 상태이고, 세월호 참사를 그린 영화 <다이빙 벨(The Truth Shall Not Sink with Sewol, 2014)>도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을 놓고 정치권까지 개입하며 여러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관객으로서 이런 약육강식 역사를 지켜보며 마음이 복잡해지지만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믿고 맡기는 두 배우의 연기를 보는 맛이 있다. 거장의 두 페르소나는 그야말로 명연기를 보여준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눈부신 외모를 분장으로 망가뜨리고 탐욕에 눈먼 백인 남자로 탈바꿈했다. 덜 떨어진 순박한 남자가 욕심을 채우며 점점 교활해지는 변천 과정을 지켜보노라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악의 화신으로 거듭난 로버트 드 니로는 말해 무엇하랴. 노구를 이끌고 연기를 해주신다는 게 고마울 따름이다.


이 영화가 취향에 맞다면 두 연기 장인이 함께 한 영화를 큰 화면으로 보는 기쁨을 지금 누릴 수 있다. 두 배우와, 거장 감독과 동시대를 살기에 오랜만에 영화관에서 돈이 아깝지 않은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 상영 시기를 놓치지 말자. 곧 애플 TV(Apple TV+)에서 볼 수 있지만 말이다.





* 이 글은 뉴스 앱 '헤드라잇' [영화관심_Kino Psycho] 2023.10.25 콘텐츠로 발행되었습니다.


https://headla.it/articles/kflim5Hr6MzrGeBiOiGXc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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