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녹색광선 Dec 20. 2023

길들여진 '나'를 파괴한 혁명가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2023)

우리 집은 한국에서
가장 부패한 집안 중
하나였다.


부잣집 아들인 줄은 몰랐다. 기인(奇人)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집안에서 반항아였다. 일제 강점기 시절, 나라에서 손꼽히는 재벌가 출생이란 게 그에겐 기회이자 족쇄였을까. 자기(self)를 이루는 정신적 뿌리를 모두 해체해 버린 혁명가. 그리고 유쾌한 장난을 좋아했던 코미디언. 예술이란 게 낯선 일반인 입장에서 백남준을 설명하는 수식어를 이렇게 덧붙여본다.




가족이 기대하던

'나'를 부수다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백남준은 돈이 넘쳐나는 집안에서 자라났다. 부유한 환경 덕에 피아노를 배우고 클래식을 접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 그는 당대 전위음악가인 쉰베르크에 심취했다. 이런 운명이 그를 예술로 이끌었을까. 그는 동경으로, 그 후엔 독일로 유학을 떠난다. 한때는 동경유학시절 쉰베르크 음악으로 졸업 논문을 쓸 만큼 그는 음악에 몰두했다. 그런데 나중에 그는 흠모했던 피아노를 때려 부순다. 이런 행위 예술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이 무렵 음악은 특권층만 누렸던 취향이었다. 그는 예술이란 부자들이 즐기는 고급진 놀이라는 편견을 벗기고자 피아노를 부수었다. 이런 행위는 원하던 자신으로 태어나고자 벌였던 정신 혁명이었다. 즉, 요람에서부터 풍족하게 길들여진 자기(self)를 파괴하고 재탄생하려는 백남준식 선언은 아니었을까. 그가 예술가로서 초창기 시절 개인전에서 발표한 〈총체 피아노〉는 딱딱하고 고상한 규율을 벗어나 새롭게 음악을 정의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총체 피아노>, ≪음악의 전시 — 전자 텔레비전≫, 갤러리 파르나스, 부퍼탈(이미지 출처: 백남준 아트센터)


"예술이란 땅에 발을 딛고 사는 누구라도 흥겹게 즐기는 놀이"라는 걸 그는 보여주었다. 예술가로서 초창기 시절, 그는 머리카락에 먹을 묻혀 그림을 그리는 등 기이한 행위로 주목받는다. 이런 퍼포먼스는 코쟁이 외국인들로 둘러싸인 낯선 땅에서 톡톡 튀는 개성으로, 혹은 희한한 인간으로 보였으리라. 이 무렵 백남준이 존 케이지 등 전위 예술가들과 교류한 경험은 향후 작품 세계를 이루는 자양분이 된다.


이유 있는 실수가
이유 없는 성공보다 낫죠.


첫 개인전 실패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얼마나 대범한 표현인가. 그 누가 나를 평가하더라도 결국 타인은 자기가 쓴 색안경으로 나를 바라보는 법이다. 어떤 비평에도 압도되지 않는 초연한 자세가 그에겐 튼튼한 정신적 뿌리가 되었으리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극복하기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백남준은 아버지를 싫어했다. 어머니와는 사이가 좋았지만 말이다. 그는 아버지가 기대한 대로 사업을 계승하는 삶을 거부했다. 성장기 시절, 집안 대대로 쌓인 부(富)를 지켜보며 뭔가 퀴퀴한 냄새를 맡았을까. 짐작하긴 어렵지만 나고 자란 집안의 문화에 대해 까칠한 불편감을 느낀 듯하다.


나는 13살 때부터
공산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13살은 성인으로서 자의식이 샘솟는 시기다. 고유한 관점을 가질만한 사춘기 초반, 한국 사회는 예나 지금이나 빈부격차가 심했다. 부의 불평등 속에서 풍요를 누리는 자신에 대해 그는 어떤 부조리함을 느꼈을까.


백남준이 해외에서 벌인 퍼포먼스는 외설 논란을 일으켜 국내 신문에 실릴 정도니 아버지는 아들을 자식 취급하지 않았다. 유학을 떠난 후 그는 34년간 한국인이 아닌 세계인으로 지냈다. 예술가로서 동서양 문화를 짬뽕 버무리듯 정신에 흡수한 흔적은 그가 사용하는 언어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언어는 정신이 연결된 탯줄이다. 말이 내면을 비춘다는 관점으로 볼 때 무엇보다 신선했던 건 그가 썼던 언어였다. 그는 언어를 20여 개쯤 할 줄 알았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말이 없었다고 한다. 그가 쓰는 엉터리 말은 그래서 알아듣기 힘들었나 보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새로 만든 언어를 구사하기까지 했다.


내 몸과 정신엔 부모가 남긴 흔적이 있다. 부모가 오랫동안 길들인 입맛, 생활 습관, 가치관 등은 자식에게 스며든다. 심지어 부모를 증오하더라도 이 흔적을 떼어내기란 어렵다. 그런데 백남준은 부모가 자기 영혼과 육체에 남긴 모든 찌꺼기로부터 해방을 외쳤던 혁명가처럼 보인다. 물론 이렇게 한다고 그가 한국인으로서 이어받은 정신적 토양을 벗어났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당시 한국 재벌집 자식에게 기대할 만한 낡은 관습에 질식한 채 살고자 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창조성을 옭아매는 모든 것들과 결별했다.




기술 비틀기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우리나라처럼 분단국가인 독일로 유학을 갔을 때 그는 독재와 이념이 사회에 뿌리내린 씨앗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은 훗날 그가 미디어 아트를 작업할 때 중요한 밑재료가 된다. 히틀러 독재 시절 시민을 현혹시키는 도구는 라디오였다. 당시 독일 집권층은 라디오로 체재 선전 방송을 송출한다. 공교롭게도 이런 독일 분위기는 완전한 민주주의를 이루지 못하고 군사 독재 시절을 거쳤던 한국과 비슷했다.


전 기술을
우스꽝스럽게 만들어요.


로봇 K-456 (이미지 출처: 백남준 아트센터)


반골 기질이라고 해야 할까. 그는 기술이 인간을 어떻게 통제하는지 주목했다. 이런 기술 비틀기가 잘 반영된 작품이 그가 만든〈로봇 K-456〉으로 보인다. 이 로봇은 성기도 있고 똥도 싼다. 그는 미래에 기계와 인간이 융합하는 상태를 풍자했던 건 아닐까. 자본이 사회 주류를 잠식하고 과학이 발달할수록 오히려 인간은 자유의지대로 살기보단 주어진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며 비인간화되고 있다.


디지털 시대에 이젠 인간도 로봇화된 삶을 살고 있다. 다수 현대인은 거대 조직에서 공장 부속품과 같은 존재로 취급받는다. 또한 강력한 매체를 통해 주입받은 정보대로 우리는 믿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건지도 모른다. 이러다 유효기간이 다 되어 사라지는 유기체 기계처럼 말이다. AI가 노동력을 넘어서 인간 의식까지 장악할 위험은 점점 커지고 있다.




무경계

소통 시대를

예견하다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그는 기술이 발달할수록 TV나 라디오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주목했다. 대중 매체에 현혹될수록 사람들은 자기만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매체에 몰두할 거라고 여겼다. 그는 기술 발달이 계속된다면 사람들은 국가 간 경계를 허물고 소통할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이런 기술적 기반을 그는 전자 고속도로(electronic super highway)라고 불렀다. 훗날 이 개념에 상상력을 더하여 그는 사람들이 바다를 떠돌아다니듯 정보를 교류할 거라 믿었다.


그가 기술 발전을 지켜보며 가졌던 혜안(慧眼)은 실로 놀랍다. 그의 예언대로 이제 우리는 SNS 계정을 만들고 나만의 목소리를 낼 수 있으니 말이다. 조지 오엘 소설《1984》결말과는 달리 빅 브라더(big brother)가 통제하지 않는 자유로운 세상을 축하하기 위해 그는 1984년 위성쇼〈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기획한다. 이 쇼는 한국에서도 KBS를 통해 송출되었다. 해외여행 제약이 있던 시절이었으니 이 쇼를 지켜보았던 한국인 시청자 수백만 명은 새로운 세상을 접하며 신선한 충격을 받았으리라.


TV Buddha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TV 시리즈 작품들도 인간이 전자 매체에 어떤 정신적 영향을 받는지를 보여준다. 그를 유명해지게 만든 〈TV 부처〉는 인간이 기술 문명과 주고받는 영향을 보여준다. 혹은 동·서양 문화가 만나는 광경으로도 보인다. 오늘날 개인화된 채널이 일상화된 시대에 극도로 심해진 나르시시즘(Narcissism)을 상징하는 장면일 수도 있다. 온라인에서 부처처럼 이상화된 나를 내가 만나다니, 이건 오직 나를 마주하고 탐미하려는 자기애가 아닐까.




길들여지지 않은,

영원한 장난꾸러기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장난이
몇 개 남았어요.


그는 아방가르드 행위 예술에 평생 동안 몰두한다. 예술 작품은 창작자가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보여준다. 자신을 낳아준 창조자인 부모가 원하는 대로 길들여지는 걸 거부하며 그는 오로지 자신이 원하는 걸 하느라 바쁘고 유쾌한 삶을 살았으리라 상상해 본다. 중년이 넘어서까지 자신을 황인종 떠돌이(yellow gypsy)라 부를 정도로 가난했지만 말이다.


나는 화가가 아니고,
조각가도 아니에요.
나는 시간 예술을 하는 사람입니다.

관찰자 눈으로   그는 피아니스트, 작곡가, 화가, 조각가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을 이렇게 규정했다. 여기에 덧붙여 그를 순수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싶다.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고 오직 내면이 이끄는 대로 살았던, 영원한 악동으로.





* 이 글은 뉴스 앱 '헤드라잇' [영화관심(關心)_Kino Psycho] 2023.12.20 콘텐츠로 발행되었습니다.


https://headla.it/articles/cfXX8zpL4OubqDQ3AzGyEg==


매거진의 이전글 아이가 어른이 되어 잃어버리는 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