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오브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 2023)
(이 영화와 『기생충(2019)』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포스터를 보자마자 딱 떠오르는 건 『기생충(2019)』이었다. 비교해 보자. 왠지 비슷하지 않은가?
두 작품 모두 포스터에서 메인 무대를 보여준다. 가정집 정원이 자연스레 떠오르지 않는가? 인물 분위기도 뭔가 비스무리하다. 사람을 표현한 방식을 살펴보면 『기생충(2019)』에서는 검은 띠로 사람 눈을 가렸는데 이 영화 포스터에선 아예 사람이 사람처럼 안 보인다. 생명력이 묻어나지 않는 물건처럼, 그냥 마네킹처럼 보인다. 얼굴엔 아예 이목구비(耳目口鼻)를 표현하지 않았다.
두 포스터에선 모두 인간이 쓰는 감각 기관을 제거해 버렸다. 왜 이런 식으로 사람을 표현했을까?
오감을 차단하면 우린 세상과 교감할 수 없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만지며 촉감을 느껴야 사람은 '비로소' 경험한다.
감각이 무디면 좋을 때도 있다. 꼴 보기 싫은 건 안 보면 되고, 듣기 싫은 말은 안 들을 수 있으니까. 우린 가끔 이런 식으로 스트레스 받을 만한 꺼리들을 스스로 차단하기도 한다. 그런데 두 영화처럼 권력과 부(富)를 가진 자가 이런 교감 능력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될까?
이 영화는 장르로 보면 심리 공포 스릴러물이다. 사실 등장인물들은 자기 위치에서 평범한 일상을 살아간다. 줄거리라고 말할 만한 게 딱히 없다. 하지만 관찰자인 관객들은 이들을 지켜보며 간담이 서늘해진다. 오감을 활짝 열고 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노라면 우리나라를 현재 2년 이상 망가뜨리고 있는 윤 머시기 부부가 떠오르면서 혈압이 용솟음치는 신체 감각과 분노를 경험할지도 모른다.
참고로 이 글은 영화 감상평이라기 보단 읽다 보면 지금 우리나라 정치판에 대한 성토글이 될 수도 있다. 주의를 요한다.
포스터를 살펴봤으니 이젠 제목을 보자. 문구가 뭔가 인공적인 느낌이다. 직역하면 '흥미로운 구역'이라니. 척 보면 분명 아늑한 보금자리 같지 않은가? 그런데 여기를 왜 '구역(zone)'이라고 부를까? 이곳은 온갖 잡동사니가 널브러진 현실 속 가정집이 아니라 무슨 아파트 모델하우스처럼 보인다. 여기 사는 가족은 왠지 부족한 것 하나 없이 풍족한 삶을 살 것 같다. 고통과 갈등이라곤 없는, 모두가 행복에 취할 수 있는 유토피아가 여기일까?
영화 속 무대는 그 이름도 유명한 아우슈비츠다. 2차 세계대전 시절 히틀러 독재가 나치당을 세우고 독일을 장악하며 유대인을 말살한 곳, 홀로코스트를 일삼은 수용소가 있는 지역 아닌가. 여기에서 일하는 고위 장교 가족이 사는 일상이 줄거리 전부다.
하지만 이들이 이 집에서 사는 모습은 현실에서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다. 이 가족이 사는 집을 굳이 '구역(zone)'으로 부르니 실제 있을법한 곳처럼 보이지 않는다. 구역이라니, 마치 실험 대상이 머무는 가상의 공간처럼 들리지 않는가. 그도 그럴 것이, 등장인물들이 태연하게 벌이는 온갖 언행들은 맨 정신으로 지켜보기 어려울 만큼 끔찍하다.
아이들은 처형당한 유대인 몸에서 나온 금이빨을 장난감 삼고, 아내는 수용소에서 약탈한 모피 코트를 챙긴다. 선심 쓰듯 값싼 옷가지 몇 개는 가정부와 유모에게 나눠주기도 한다. 독일인 이웃 아낙네들은 뒷담화중 유대인들이 칫솔에 다이아몬드를 숨겨온 걸 자신이 챙겼다고 자랑한다. 처형 직전에 약탈한 신발 등 소지품은 거대한 설치 작품처럼 전시된다.
독일인 가족이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짓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공감 능력이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철저한 히틀러식 세뇌가 가져온 결과다. 고통에 울부짖는 이들을 보고 싶지 않으면 담장을 높이 쌓고 눈요기거리로 아름다운 정원을 꾸미면 된다. 성질대로 부릴 수 있는 일꾼들을 두면 일 시켜 먹기도 편하다. 누구나 살고 싶은 깔끔하고 풍족한 공간, 불편한 감각 원천을 차단한 공간, 그런 곳이 바로 여기다.
어떤 관객들은 지금 내가 영화라기 보단 하나의 영상 실험을 본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실험명이 뭐냐고? [인간들을 대상으로 공감 능력 제거 시 나타날 악마화 경향성] 정도 되겠다. 이게 가상의 실험이 아닌 실제로 벌어진 역사적 만행이란 게 끔찍할 뿐.
공감하지 못하면 약자의 고통을 헤아릴 수 없다. 그러니 내가 아닌 '타자'는 내 이익을 위해 철저히 대상화된다. 사람을 사람으로 안 보고 도구로 취급하는 거다. 그 결과는 우리가 다 아는 역사처럼 참혹하지 않은가? 유대인 수백만 명이 수용소에서 집단 처형되었고 수많은 한국인 조상들은 일제 강점기 시절 '731 부대'에서 마루타(통나무)로 불리며 생체 실험 대상이 되었다.
무엇보다 감탄한 건 이 영화 전체를 장악하는 OST다. 한 마디로 관객을 갖고 논다. 음악이 사람 마음을 휘어잡는 위력을 느껴보라. 소리가 마치 대사를 읊조리는 것처럼 우리에게 전하는 수많은 이야기를 상상해 보자.
영화 시작 전, 모두는 상영관에서 잠시 암흑을 경험한다. 암전된 화면을 지켜보며 잠시 멍을 때리는 동안 흘러나오는 우아한 클래식 계열 엠비언트 뮤직(ambient music)은 관객 멱살을 잡고 그 옛날 나치가 세상을 지배했던 시공간으로 우리를 끌고 간다.
'여기가 어디지? 지금 어디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거지?'
공간감이 느껴지는 엠비언트 장르 특성상 음악은 내가 있는 곳을 새로운 분위기로 전환한다. 지금 들이마시는 공기가 달라진 듯한 착각, 상쾌한 기운이 느껴지면 어느새 화면은 밝아진다. 저기 한가로이 수영복을 입고 바캉스를 즐기는 독일인 가족이 보인다. 유토피아가 여기일까?
낙원이 따로 없구나.
독일인 아내의 친정 엄마는 잠시 놀러 왔다가 정원에 감탄하며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여긴 힘을 가진 자를 악마로 배양하는 실험실이었다. 권력을 바탕으로 약한 자들을 부리고 착취하며 만든 낙원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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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T는 중요한 순간마다 심장을 죄어 누르는 압력을 발휘한다. 어떤 소리는 수용소 안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처럼, 혹은 사람들을 겨누어 발사한 총알 소리와 폭발음처럼 들리기도 한다. 점점 자석 같은 힘으로 관객을 장악하며 히틀러 시대로 우리를 끌어당기는 인력을, 때론 이곳을 혐오하며 밀어내는 척력을 발휘하다니. 음악이 마음을 휘어잡는 엄청난 힘을 느껴보라.
결말에 다다를수록 담장 밖에서 포효하는 잡음은 점점 거대해진다. 뭔지 모를 환청(auditory hallucination) 같은 소리가 고막을 침투하면 관객은 바랄지도 모른다. 제발 이 소리를 멈춰달라고…!
그이가 나보고
아우슈비츠 여왕이래요
공감하지 못하면 악행(惡行)을 범해도 그게 악인 줄 모른다. 지금 이 가족을 보면 역지사지(易地思之) 관점에서 내 말과 행동이 상대에게 어떻게 비칠지 조망하는 능력, 거울처럼 내 말과 행동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란 게 없었다.
영화에선 유달리 깨끗하게 집안을 관리하는 장면이 많다. 침대엔 깨끗하게 빨래한 이불이, 식탁 테이블엔 빳빳한 덮개가 깔려있다. 바닥이 더러운 건 용납 못한다. 심지어 나치 장교가 몰래 외도를 한 후엔 자신의 성기를 깨끗이 닦는다. 더러운 게 자신에게 닿는 건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다. 그렇다면 가진 이들에겐 무엇이 더럽게 보이는 걸까?
『기생충(2019)』처럼 여기에서도 약자는 가진 자를 불편하게 할 때 말 그대로 멸종되어야 할 해로운 '균'으로 취급받는다. 독일인 아내는 평소엔 집안 일꾼들에게 교양 있게 구는 사모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심기가 뒤틀리면 '널 아주 쉽게 죽여버릴 수 있다'는 식으로 하녀를 겁박한다. 자기 보금자리를 지키기 위해 필요하다면 남편과도 갈라선다. 이기주의 끝판왕이 되어도 아무런 불편감을 못 느끼는 상태, 바로 우리가 악마를 마주하는 순간이다.
결국 가진 자가 악마가 되는 과정은 일종의 면역 반응이다. 손에 쥔 걸 지키기 위한 생존 방식일 테다.
생존 반응은 그 자체로 선악(善惡)을 따질 순 없다. 살아남으려면 무슨 짓이든 하는 게 인간이든 다른 동물이든 자연스럽다. 몇 년 전 팬데믹 시기엔 전 세계에서 모두 타국민을 경계하지 않았던가. 나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면역 반응은 본능에 가깝다.
다만 사회가 양극화될수록 인간은 점점 이런 면역 반응을 과도하게 한다. 가진 정도에 따라 계급과 서열을 구분하고, 이렇게 갈라진 소집단들은 서로 생존 구역을 분리한 채 집단 이기주의를 발휘한다.
그렇다면 각자도생(各自圖生), 약육강식(弱肉强食) 세상에서 도태된 이들은 어떻게 될까? 영화로 예를 들어보자. 『기생충(2019)』에선 집사 부부가 지하실에서 질긴 목숨을 유지했듯이, 이 작품에선 유모가 옥탑방에서 바깥 비명을 들으며 술 없인 잠을 못 이루듯이, 과도한 면역 반응으로 피해를 본 이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고통받으리라.
만약 한국인이라면 이 작품을 본 후 새삼스레 어떤 두 사람이 떠오를 거다. 지금 대한민국 서울시 용산구 어딘가에 거대한 담장을 쌓아두고 세상과 거리 두기를 하고 있는 윤 씨 성을 가진 부부 말이다.
이들은 자신들만의 성역 안에서 안전하게 살고 있다. 멀쩡한 청와대를 버리고 용산 관저에 또아리를 틀 때까지 윤 씨 부부는 일종의 과도한 면역 반응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부정 타는 기운을 없애기 위해 무속에 의존해서 이런 선택을 했다는 의혹이 있을 정도다.
윤 머시기 부부가 가진 청결 강박은 아마도 최고 수준일 거다. 자신들이 보기에 지저분하고 꼴보기 싫은 건 무슨 마술적 수단이든 동원해서 흔적을 없애버리고 싶은 욕구가 뚜렷하리라. 무속이든 다른 개인적 신앙이든 안전과 풍요를 보장할 수 있는 대안이라면 가진 게 많을수록 면역 반응은 활발해지는 법.
윤 씨 부부가 사는 보금자리 담장 밖 국민들은 각종 매스컴을 통해 이들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범하는 행보를 볼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에 그들은 행복해 보인다. 그런데 대다수 국민들이 이들을 지켜보며 느끼는 분노는 왜 점점 더 커져만 가는 걸까?
이 영화를 토대로 감히 상상해 본다. 공감 능력을 잃은 권력자는 어떤 말로(末路)를 향할까? 감히 예언하건대 윤 씨 부부가 서로를 위협으로 느낀다면 기꺼이 배우자에게 등을 돌릴 거라는 사실에 100원 걸어본다(더 걸기엔 솔직히 동전도 아깝다). 이들이 TV 매스컴에 얼굴을 들이밀 때마다, 마이크를 붙잡고 연설을 할 때마다, 국회에서 상정한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할 때마다 지지율은 1%씩 감소할 거라고 예상해 본다.
만약 예상이 틀리다면 어떻하냐고? 지금은 검찰독재 시대니 이런 질문은 무섭기만 하다. 그저 미안하다고 말할 수밖에. 일개 시민이 무슨 힘이 있냐고, 이런 뻘글은 보는 사람도 거의 없다고 말할 수밖에.
덧 하나. 조너선 글레이저 감독과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씨네21' 잡지 링크 참고) 본 영화 제작 배경을 자세히 알 수 있다.
덧 둘. 영화 제목에 대한 이 감상글 내용과 실제 의미는 다르다: 'Zone of Interest'는 독일어 단어 "das Interessengebiet"를 번역한 것이다. 나치 독일이 아우슈비츠와 그 주변 지역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했다. 독일어 Interesse(영어 Interest)의 의미는 "관심"이 아니라 "금전적 이득"에 가깝다(출처: 나무위키).
덧 셋. 역사 다크 투어(dark tour)에 관심 있다면 이 영화가 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