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 시나리오(Dream Scenario, 2023)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초연결 디지털 시대에 심리학자 융(Carl Gustav Jung)이 말한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ness)'을 이렇게 흥미롭게 다룬 영화가 있다니, 그것도 꿈이라는 소재를 쓰다니.
평범하게 사는 게 좋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관심을 받을수록 내 삶이 풍족해지는 게 확실하다면? 그럼 얘기가 달라진다. 이 영화는 꿈을 소재로 우리 마음속 관종 DNA를 비틀어 꼬집기 식으로 보여준다.
주인공은 대학 종신교수 폴(니콜라스 케이지 역)이다. 든든한 아내와 사춘기에 이른 두 딸도 있다. 이쯤이면 평생 배곯을 일 없이 편히 살 수 있는 데도 그는 뭔가 아쉽다. 학자로선 그저 그런지 동료가 논문 출판을 하는 게 배 아플 만큼 질투가 심하고, 강의 실력도 별로인 듯 수강생도 거의 없다.
폴 교수는 갑자기 유명해진다. 사람들 꿈속에 그가 자주 등장해서다. 폴이 가입한 SNS 계정엔 팔로워 수가 늘었다. 너도나도 자기 꿈에 폴이 나왔다는 온라인상에 고백한다. 이들 말이 과연 진실일까?
많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어떤 사실을 잘못 기억하는 현상을 만델라 효과(Mandela effect), 혹은 집단적 오기억(Collective False Memory)이라고 한다. 누군가가 겪었던 일이 마치 내게도 일어난 듯한 착각이 들 때가 있다. 영화 속 대중들은 "나도 폴을 꿈에서 봤어"라고 떠들어대며 이 사실을 공유한다.
사람들이 정확히 폴을 꿈에서 보았는지는 영화 속에서 그리 중요치 않다. 다들 폴 비스무리한 인간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다만 폴이 연구자로서 자기 힘으로 유명해진 건 결코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이때부터 인생에서 헛발질을 시작한다.
이 남자를 진짜로
꿈에서 본 적이 있나요?
이 영화 소재는 실화였던 '디스맨(This Man)' 괴담과 유사하다. 2006년 미국 뉴욕에 있는 유명 정신과에 다녔던 환자는 꿈에서 반복적으로 어떤 남자를 본다고 의사에게 호소한다. 이 환자는 자신이 본 남자 얼굴을 그려서 의사에게 보여줬다. 그런데 이 그림이 노출되면서 우연찮게 다른 환자들도 그림 속 남자를 보았다고 말한다.
이런 식으로 전 세계 2000명 이상 되는 제보자들이 디스맨을 보았다고 말하며 급기야는 이 인물을 찾기 위해 "꿈에서 디스맨을 본 적이 있나요?"라는 웹사이트까지 생겨난다. 결국 이 괴담은 모 회사의 마케팅 전략이었음이 2009년에야 밝혀졌다고 한다(출처: MBC 심야괴담회 X 서프라이즈 유튜브 채널).
프로이드(Sigmund Freud)가 '꿈은 무의식에 이르는 왕도'라고 말했듯 꿈은 영화에서 단골 소재가 된 지 오래다. 그런데 이 영화는 좀 더 독특하게 인간 모두가 갖고 있는 인정 욕구를 건드린다. 사랑과 애정을 갈구하는 마음은 세대를 초월한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마음 깊은 곳에 갖고 있는 정신 일부분을 분석심리학에서는 '집단 무의식'이라고 한다.
'집단 무의식'은 분석 심리학 개척자 '융'이 말한 개념이다. 융은 설화, 민담에서 어떤 민족이 대대로 정신 속에 공통적으로 이어온 집단 무의식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예술 소재는 비유와 상징으로 집단에 나타나는 정신 현상을 창조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디지털 세상 아닌가. 과거에 유행이었던 설화나 민담을 이젠 온라인 콘텐츠가 담당한다. 각종 플랫폼, 커뮤니티, SNS 등에 나타난 밈(meme), 유행어, 줄임말 등 여론을 반영한 현상은 현대인들이 가진 무의식을 반영한다.
폴 교수는 갑자기 사람들에게 이슈화된다. 스마트폰 카메라에 노출되고 온라인 마케팅 회사에겐 이슈 메이커로 찍히며 돈벌이용 먹잇감이 된다. 그런데 메뚜기도 한 철이라고, 이슈란 아무리 강해도 곧 사라지는 법. 한 땐 핫해진 그가 어떻게 몰락하는지 예측불허한 전개가 이어진다.
영화 속 백미는 주인공 폴이 인생의 나락에서 꾼 꿈이다. 폴은 스스로에 대한 엄청난 분노를 자신에게 투사(projection)한다. 꿈속에서 폴은 폴을 쫒는다. 자기를 벌주고 싶은 마음, 즉 살인 충동을 느낀다. 관종욕에 도취된 자신을 견디지 못해서다.
이 즈음 폴은 대중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갑자기 사람들 꿈속에서 폴이 악당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왜 사람들은 폴에게 열광하다가 갑자기 등을 돌린 걸까?
저 사람 진짜 악마처럼
무섭게 생겼어
누군가가 나에 대해 이런 인상(impression)을 가지면 기분이 어떨까? 물론 억울할 거다. 하지만 소위 유명인들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온갖 선입견과 불편한 감정을 쏟아 붙더라도 감당해야 한다. 대중들은 상징적 인물에게 자신이 해소하지 못한 감정을 투사하기 때문이다.
꿈속 폴이 양궁 기술을 발휘하며 폴 자신을 향해 화살을 겨눈 장면은 인간이 가진 투사(projection) 방어기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누구나 실수를 하면 자신을 용서 못할 때가 있지 않은가. 폴은 현생에서 제기 불능 상태가 된 폴 자신을 제거하고 싶었던 걸까.
온라인 기반 시대에는 누구든 인플루언서가 될 수 있다. 어떤 상황이든 누가 날 좋아하고 인정해 줄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는 세상이다. 누구든 계정만 있다면 현생에서 서로를 몰라도 된다. 어떤 이슈든 공감대만 생기면 서로 익명성을 갖고 연결될 수 있다.
이런 초연결 시대엔 인간이 가진 인정 욕구는 너무나 쉽게 자극받는다. SNS에서 '좋아요'를 못 받으면 우울해지고 괜히 뭔가 실수했나 싶어 초조하고 예민해진다. 관심에 목마를수록 나도 모르게 관종이 되기 쉬운 세상이다.
진짜 '나'는 온라인엔 없다. 우린 자주 까먹는다. 오감과 영혼을 가지고 오프라인에 살아있는 게 '나'란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