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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색광선 Apr 15. 2023

히치콕이 공포를 탐구했던 무대, 안개.

하숙인: 런던의 안개 이야기(The Lodger, 1927)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알프레드 히치콕. 그는 왜 하필이면 공포라는 감정을 파고든 걸까.


하숙인을 처음으로 맞이할 때. 장면 색감이 거의 이렇다. 신비롭지 않은가(이미지 출처: IMDb.com)


최근 그가 만든 이 무성영화를 처음 보았다. 말로만 듣던 이 초기 작품을 영화관에서 큰 화면으로 운 좋게 영접했다. 잭 더 리퍼 같은 연쇄살인마가 등장하고, 줄거리 기반이 된 원작 소설이 따로 있고, 겁에 질린 금발 미녀가 살인자의 제물이 되는 등 히치콕 후기 작품 속 소재나 인물 원형이 모두 나온다는 것만 주워 들어 알고 있었다. 다만 나처럼 영화사나 영화기법의 ‘ㅇ’ 자도 모르는 사람은 그저 옛날 그 시대를 현재로 소환해서 타임머신을 타는듯한 눈요기를 하는 셈 쳤다.


소위 평론가나 영화 마니아처럼 이 작품의 만듦새를 평가하거나 분석하는 글을 쓰진 못한다. 다만 일반인 입장에서 ‘히치콕’ 하면 자연스레 ‘살인’이나 ‘공포’를 연상하는 만큼 왜 그가 이 소재에 끌렸는지 궁금했다.


신문사 안에 앉아있는 직원, 아니 히치콕(엑스트라로 출연.) - 얼굴을 일부 가린다고 소문난 살인범과 비스무레하게 꾸민 하숙인 - 하숙집 부부(이미지 출처: IMDb.com)


특히 영화에서 미지의 살인자를 ‘어벤져(avenger)’라고 부른 것도 흥미롭다. ‘복수 살인자’ 정도로 번역된 걸로 기억한다. 사람에게 살인 동기로 돈보다도 강력한 건 ‘복수심’ 일지도 모르겠다. 뭔가를 응징하려는 살인마가 매주 화요일마다, 금발 여자만 골라서 죽인다는 사실이 신문 기사로 대중에게 퍼진다. 예기 불안(anticipatory anxiety)에 질린 인간들이 서로를 의심하고 선한 사람을 범죄자로 오인하는 게 대강의 내용이다.


또한 이 영화에서 제3의 주인공이라고 할 만한 건 배경이다. 바로 런던의 안개. 날씨나 자연은 사람의 정신에 영향을 준다. 사람들이 불안에 휩싸인 모습을 잘 그려낼 수 있는 무대로 런던이란 도시는 적절했을지도 모르겠다. 안개가 자욱한 도시. 거리에서 어떤 사악한 일이 일어나도 알기 어려운 공간. 무리 속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보기 힘들고 저절로 고립되는 환경. 이 속에서 목숨을 위협받자 사람들은 감춰두었던 공격성을 폭발시킨다.


성난 군중들-하숙인. 그는 극중에서 마치 드라큘라처럼 화장을 진하게 했다(이미지 출처: IMDb.com)


인간의 야만성은 어떻게 시작되고 어디까지일까? 아마 히치콕은 이런 궁금증을 가진 건 아닐까.

사람은 분노뿐만 아니라 공포에 휩싸였을 때도 충분히 야만적으로 변한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영화 속에서 압권인 순간은 범죄자로 오해받은 ‘하숙인’이 마치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되기 직전 모습처럼 거리 난간에 매달릴 때다. 나처럼 무교인 사람도 단번에 예수가 떠오를 만큼 이 장면을 보노라면 누군가가 박해받는 모습이 그려진다. 범죄자로 오해받은 하숙인 청년은 성난 군중들을 피해 우선 목숨을 건지려 도망친다. 하지만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티끌만한 불안의 싹이라도 잘라내려 그에게 거칠게 달려들었다. 인간의 이성이 마비되고 이기심이나 야만성이 적나라하게 나타나는 모습을, 공포가 인간을 뒤트는 방식을 히치콕은 그만의 영화 재료로 삼았다. 그리고 젊은 시절부터 이렇게 자신만의 예행연습을 시작한다.


아주 아주 옛날 영화이고, 게다가 무성영화인 만큼 몇 개 안 되는 간결한 대사들은 그나마 자막으로 나오니 요즘 관객이 보기엔 살짝 답답할 수 있다. 별다른 집중력 없이도 마치 연극 장면처럼 인물들의 행동이 크게 크게 그려지고 줄거리도 쉽다. 다만 요즘 영화에선 흉내조차 못 낼 만큼 매력적인 건 화면 질감이다. 옛 영화 특유의 희뿌연 질감은 관객에게 특별한 감동을 준다. 눈을 떼기가 힘들 만큼 따뜻하고 신비로운 그 옛날을 잠시 구경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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