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의 사운드트랙(Soundtrack to a Coup d′Etat)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흥겨운 노래가 속으론 칼을 품을 수도 있을까? 믿기진 않지만 그렇다. 역사 속에서 음악은 양날을 가진 무기가 될 수 있었다. 섬뜩하지만 말이다. 정치권에서 음악을 나쁘게 쓰면 무기가 된다. 더 넓게 생각해 보면 미술, 무용 등 사람이 즐기는 모든 창작 분야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아름다움에 공감하는 존재라서다. 세계사를 들여다보면 이해가 된다.
빵과 서커스를
(Panem et Circenses)!
우민(愚民) 정책을 상징하는 유명한 구호다. 고대 로마 제국 위정자들은 대중에게 무상으로 음식과 유흥거리를 제공하며 정치를 보는 눈을 가렸다. 무기로 치면 뿌연 연막탄이랄까? 글래디에이터가 활약하는 콜로세움에서 대중은 환호하며 현실에서 느끼는 울분을 유흥으로 배설했다.
통치자가 달콤한 유희를 베풀며 시민들을 현혹시키는 정책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현대사에도 계속 있었다. 중국 영화 <패왕별희(1993)>에서는 문화대혁명 시절, 공산주의 선전용 공연에 전통 경극 배우들을 동원한 장면이 나온다. 우리나라는 또 어떤가. 대한민국 근현대사가 끝끝내 단죄하지 못했던 독재자 전두환은 1980년대 집권 후 3S 정책을 펼친다. 스포츠(Sports), 섹스(Sex), 스크린(Screen) 사업을 장려해서 정부에 대한 불만을 즐길거리로 돌리려는 시도였다.
뿐만 아니다. 아프리카 대륙 한가운데 있는 나라, 콩고가 겪은 사례도 있다. 이 영화에서는 냉전 시대에 콩고에서 쿠데타를 옹호했던 세력이 대중을 향해 어떻게 음악을 교묘히 활용했는지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보여준다.
20세기 중반 아프리카 콩고(Congo)도 강대국 때문에 비극을 겪었다. 2차 대전 전후 시절 미국은 콩고를 '말 잘 듣는 나라'로 구워삶으려 애쓴다. 바로 재즈(Jazz)를 통해서였다. 이 즈음 미국에선 재즈 뮤지션들이 전성기를 누렸다. 디지 길레스피, 루이 암스트롱, 니나 시몬, 듀크 엘링턴, 오넷 콜맨, 맥스 로치, 아트 블레키와 재즈 메신져스... 이름만 들어도 이 장르에선 거물이다. CIA는 유명한 당대 재즈 아티스트들을 콩고로 불러 모아 거대한 공연을 기획했다. 이 출연자들은 아프리카 인들과 똑같이 검은 머리, 검은 피부를 가졌기에 현지인과 같은 인종으로서 영혼도 공유할 수 있는 존재였다. 하지만 이렇게 음악으로 청중들과 교감하던 뮤지션들은 결과적으론 미국을 우호적인 나라로 감싸는 포장지가 되었다.
물론 연주자와 가수들은 아무런 정치적 의도가 없었다. 루이 암스트롱은 뒤늦게 이 음흉한 사실을 알고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려 했다. 정치 세력이 자신을 교활한 의도로 써먹었다는 걸 알고 난 뒤였다.
1960년 6월 30일, 콩고는 독립 국가를 선언한다. 하지만 단 5일 만에 군사 반란이 일어난다. 이렇게 무력으로 집권한 세력은 콩고 경제의 원동력이라 할 수 있는 광산 지역을 민영화시켰다. 이때부터 현재까지도 계속되는 비극적인 역사, 콩고 내전이 시작된다.
1800년대 후반 제국주의 열강이 세계를 야금야금 땅따먹기 하던 시절부터 강대국에게 콩고는 군침 도는 먹잇감이었다. 바로 풍부한 천연자원 때문이었다. 이 시절 벨기에는 일찌감치 콩고를 점령했다. 이후 콩고는 비참한 식민지 시절을 겪는다. 콩고가 마침내 독립 국가를 선언했던 당시엔 정치인 파트리스 에머리 루뭄바(Patrice Émery Lumumba)가 대중의 지지를 발판 삼아 조국의 발전을 이끌어갈 만한 지도자였다.
하지만 콩고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강대국과 내란 세력에게 눈엣가시였던 루뭄바는 콩고 독립 후 머지않아 암살된다. 당시 초기 정부 내각에는 벨기에와 친밀했던 인사들이 여러 명 섞여 있었는데 사익을 추구했던 세력이 야욕을 부린 결과였다.
미국도 뒤늦게 팔을 걷어붙였다. 2차 대전 시기 즈음 미국은 콩고에 매장된 우라늄을 탐낸다. 원자폭탄을 만들려면 반드시 우라늄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미국은 콩고의 우라늄 광을 확보해서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한다. 바로 이 시기에 콩고에서 펼친 재즈 공연은 겉보기론 아주 좋은 평화적 이벤트였다.
콩고 사례가 마치 우리나라와 비슷하지 않은가. 힘없는 나라였을 때 한반도에선 6.25 전쟁이 벌어졌다. 지금도 6.25 전쟁에 대해 어떻게 불려야 할지 여러 의견들이 있지만,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을 등에 업고 동족끼리 총부리를 겨누며 수많은 피를 흘렸던 내전 성격이 있다고 본다. 일제 식민지 시절 친일파를 단죄하지 못했기에 남한에서 민주공화국이 출범했을 때도 바퀴벌레처럼 사익을 추구하는 잔당들을 정부 내각에서 철저히 솎아내질 못했다.
그 결과 사조직을 통해 독재와 기득권을 꿈꾸는 카르텔 세력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아직 뿌리 뽑지 못한 상태다. 건강한 식물의 성장을 방해하는 독한 잡초처럼 이들은 이 땅에 단단히 뿌리를 박고 있다. 민주주의 토양을 제대로 가꾸려면 이놈들을 뽑아내고 깔끔히 밭갈이를 해야 한다. 하지만 이 독초들의 뿌리는 단단하고 깊다. 잘 뽑히질 않는다. 땅 밑에서 버티려 뿌리끼리 엉켜 넝쿨을 이루니, 질기다.
여당이었던 국민의 힘, 아니 '내란의 힘'을 자랑하는 사익 집단 국회의원들은 12.3 내란 수괴 윤석열을 보호한답시고 2025년 1월 6일, 대통령 관저 앞에 인간 방패를 만들었다. 극우 세력에게 인지도를 확보해서 향후 공천권을 얻기 위해 매스컴 앞에서 얼굴 도장을 찍으려 했던 선전 행위였다. 2024년 12월 3일에 시민들은 단숨에 목숨을 걸고 국회를 사수했는데도 한덕수 전 국무총리, 최상목 현 대통령 권한 대행을 비롯한 행정부 공무원이란 인간들, 특히 판·검사란 직위를 가진 놈들이 한 달 넘게 몸을 사리며 뒤에선 누가 실세인지, 자기 죄를 덮어줄 수 있는지 간 보기를 하고 있다.
2024년에 나온 이 따끈따끈한 다큐 영화를 보니 알겠다. 소위 위정자들은 인류사에서 정치라는 행위가 생겼을 때부터 음악, 미술처럼 대중이 즐길 거리들을 교묘하게 이용해 왔다는 걸.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머리 좋고 가진 게 많은 놈들, 소위 엘리트란 인간들 중 가증스러운 범죄자가 참으로 많다는 걸.
그리고 이젠 알겠다. 바로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시야가 혼탁한 내란 시기엔 오직 민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한 권력만이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걸. 그 권력이 단호하고 공정하게 법을 집행해야 비로소 민주주의를 되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