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이 죽인 어떤 예술가를 기억하자

그들은 피아노 연주자를 쐈다(2023)

by 녹색광선

그는 내 가족은 아니다. 친구도, 친척도 아니다. 머나먼 땅에서 나와 다른 시대를 살았다. 사랑하는 친구와 가족, 연인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한때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 보사노바가 세계를 풍미했던 시절, 그는 뛰어난 실력으로 인정받았다. 그랬던 그가 갑자기 실종된다. 추리소설처럼 미스터리 한 사연을 살펴보다가 1시간 44분이 지나면 당신도 어느새 그의 친구가 될지도 모른다. 다만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는 순간 이젠 그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에 슬퍼질지도 모르겠다.


제목은 말한다. Dispararon Al Pianista(They Shot the Piano Player). 직접적인 메시지다. 어떤 역사적 사실을 절대 잊으면 안 된다는 외침이다. 그럼 누가, 어디서, 언제, 왜, 어떻게 이 걸출한 예술가를 죽였는가?


관객은 어떤 연주자의 생애를 따라간다. 타임머신을 타고 감미로운 재즈 선율이 남미의 따스한 공기를 채우던 시절, 그곳엔 오늘날 거장으로 불리는 보사노바 뮤지션들이 있었다. 조빔, 질베르토, 비니시우스... 애니메이션 화면 속에는 엘라 피츠제랄드가 하이힐을 들고 맨발로 거리를 누비며 클럽 공연을 다닌다. 무대 위 연주자들이 만들어내는 감미로운 멜로디, 파도처럼 넘실대는 선율을 타고 보컬이 읊조리는 가사, 스캣. 노랫말이라기보다는 한 편의 시가 심장을 파고든다.


이미지 출처: 찬란(Challan Film)


하지만 이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잔인한 역사를 안내하는 주인공의 내레이션은 불협 화음을 일으킨다. 흥겨움 속에 스며드는 공포감. 이 섬뜩한 기분은 피아니스트 테노리우 주니오르와 우리가 점점 교감하면서 더욱 선명해진다. 정치엔 전혀 관심이 없던 뮤지션이 1976년에 왜 타국에서 죽어야만 했는가.


길잡이가 되어 주는 화자(話者)는 가상 인물인 음악평론가이다. 그는 브라질 음악을 탐구하다 갑자기 행방불명된 피아노 거장을 알게 된다. 테노리우 주니오르. 그는 베네수엘라로 연주 여행을 떠난 후 연인을 위해 새벽에 샌드위치를 사러 거리에 나갔다가 실종되었다. 그와 함께 연주하고 삶을 공유했던 뮤지션, 친구, 가족들은 테노리우에 대해 말한다. 때론 목이 메이고, 눈물짓고, 슬픔을 노래하면서.



남미를 파괴한

쿠데타


이미지 출처: 찬란(Challan Film)


음악 영화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역사물이었다. 아니, 한국인이라면 역사 공포물로 보리라. 브라질 재즈를 실컷 들어보고픈 마음으로 영화관을 찾았다면 좀 당황할지도 모른다. 다양한 노래들은 주구장창 나온다. 하지만 역사를 살피기 위한 BGM 역할을 할 때가 많다. 더군다나 이 시국에 개봉하니 주인공의 사연이 남의 일로 여겨지지가 않는다.


테노리우는 쿠데타로 인한 국가 폭력의 희생자였다. 1950년대부터 수십 년간 남미에 자리한 여러 나라들은 쿠데타를 겪었다. 브라질, 과테말라, 파라과이, 칠레 등에서 우익 독재정권이 들어서며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다. 불행하게도 테노리우는 이 광란을 피할 수 없었다.


진상은 서서히 드러난다. 그가 어디에서, 어떻게 생의 마지막을 맞이했는지 관객들은 비로소 알게 된다. 베네수엘라 해군사관학교엔 남미 아우슈비츠라고 불렸던 수용소가 있었다는 걸, 테노리우는 외국 정치범 수용 구역에 갇혀 있었다는 걸, 수용자들은 두건을 쓰고 앞을 볼 수 없었다는 걸, 시야를 상실한 암흑 속에서 머리에 총을 맞았다는 걸.




국가 트라우마,

전 국민에게 번진다


이미지 출처: 찬란(Challan Film)


그는 왜 죽어야만 했나?

이유가 없다. 죽을 이유가 없었다는 게 비극이다.


그는 정치에 아무 관심이 없었다. 음악 밖에는 몰랐던 순수한 사람이었다. 뮤지션이 되기 전엔 의대에 진학했을 만큼 머리도 좋았다. 하지만 진로를 바꾼 후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피아노를 선물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랑하는 가족과 연주를 이어가는 일상. 명상과 철학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 그는 자신이 원하던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새벽에 거리로 나섰다는 이유 만으로 공산주의자라는 오해를 받았다. 쿠데타 세력이 공포 정치를 자행했던 땅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거리 위에 탱크가 다니던 시절, 그는 수용소로 실려갔다. 한국에서 반공 주의가 창궐하던 시절,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납치되고 살인 협박을 받았던 사례와 너무나도 비슷하지 않은가? 나중에 김 전 대통령은 노벨 평화상을 받았지만 과거엔 여당으로부터 '빨갱이'라는 공격을 받은 것처럼 말이다.


극우 세력은 국민이 반감을 느낄 만한 세력을 좌표 찍기 한 후 이념 공격을 해댄다. 여론전 방법이다. 어느 나라든 이렇게 세를 불리는 방법은 똑같다. 전형적이다.




치유 없는 과거는

현재진행형이다


이미지 출처: 찬란(Challan Film)


그의 연인, 친구, 아내, 자식들은 아직 그를 떠나보내지 못했나 보다. 이들은 아직 테노리우와 함께 살았던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이들이 인터뷰에서 흘리는 눈물은 과거가 아닌 현재 모습이었다.


비극적인 과거를 과거로 매듭지으려면 우선 사건의 실체를 정확히 밝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왜?"라는 의문은 계속된다. 이 원치 않는 질문은 의식을 침습한다. 불안, 분노, 짜증, 죄책감, 답답함. 온갖 고통스러운 감정을 동반하는 이 질문은 우리 마음대로 봉인하지 못한다. 모든 사실이 낱낱이 밝혀질 때까지는 일상에서, 꿈에서 살아 숨 쉬는 한 별안간 재연된다. 충격 사건이 종결되지 않은 채 내내 재경험되는 것이다.




폭력과 예술이

공존하는 부조리함


이미지 출처: 찬란(Challan Film)


12.3 내란은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 교훈을 주었다. 국적을 불문하고, 국가의 부를 막론하고 누구든 이런 국가 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극우 세력이 점점 판치는 세상이 펼쳐지고 있다.


이들은 이념으로 국민을 갈라치기한다. 쿠데타로 나라를 집권한 세력은 선출되지 않은 국가 권력이다. 때문에 욕심쟁이들이 국민을 억누르는 방법은 바로 세뇌와 공포이다. 부정한 집권층을 정당하게 바라보도록 허황된 이데올로기를 받아쓰기 언론을 통해 전파하고 순순히 따르지 않으면 반체제주의 인사로 낙인찍어 집단 시설에 가둬놓고 편리하게 처리한다. 어느 나라든 비슷한 통치 방식이다.


아름다운 재즈와 잔인한 역사는 함께 역사를 풍미했다. 이 부조리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한국인들은 지금 내란 중이다. 늘 그렇듯 직장을 다니고, 공부를 하고, 친구를 만나고, 여가도 즐기지만 여전히 내란 세력과 공존하고 있다. 어떻게 쿠데타를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이 같은 땅에 살고 있는지, 어떻게 국민을 향해 총을 쏘고 탱크로 밀어버리려 했던 건지 상식으론 이해가 안 된다. 세상은 이처럼 부조리하기에 아무리 법과 제도가 있더라도 두 눈을 부릅뜨고 폭력의 싹이 움트는 걸 주시해야 하나 보다.


역사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려면 반드시 조사, 단죄, 치유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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