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고하게 건축한 망상, 사이비 종교

무라카미 하루키: 언더그라운드(2024)

by 녹색광선

해마다 여름이면 평소 손이 안 가던 TV 리모컨을 만지작거린다. EBS 채널을 틀기 위해서다. 이맘 때면 EBS 방송에서는 세계다큐멘터리 영화제(EIDF: EBS International Documentary Festival)가 열린다.


좀처럼 보기 힘든 해외 작품들을 보면 요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가늠하는데 도움이 된다. 저 먼 땅에서는 과거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이 나라와 저 나라 간에는 무슨 다툼이 거센지, 지금 해외에서 문제시되는 사건들이 우리나라엔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 상상해 볼 수도 있다. 그동안 좁디 좁아진 관심사만을 반영한 유튜브 알고리즘에 갇힌 선입견을 자가 치료할 기회도 된다.


올해 끌린 몇 작품 중 하나가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 언더그라운드(Haruki Murakami: From Underground à 1Q84)>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동명 서적도 있다. 그는 일본을 경악시켰던 참사 피해자와 가해자들을 면담했다. 그리고 그들의 사연을 각각 책으로 옮겼다. 즉, <언더그라운드 1>은 피해자들을, 2는 가해자들을 만난 후 정리한 내용이다. 옴진리교라는 사이비 종교를 추종하는 이들은 종말론에 사로잡혀 1995년 3월에 무시무시한 일을 저질렀다. 도쿄 지하철에 사린 가스를 뿌린 것이다. 무고한 시민들이 거리 위에 널브러져 있는 장면을 보면 마치 2022년 10월 29일 서울에서 벌어진 이태원 참사가 떠오른다.


이미지 출처: EBS국제다큐영화제 홈페이지(www.eidf.co.kr)


게다가 요새는 내란 수괴 부부와 그들을 비호했던 인간들이 특검 수사를 통해 발가벗겨지는 중 아닌가. 최근 통일교와 정치권 인사 등이 연루된 정황까지 까발려지는 사태를 뉴스로 보면서 이 작품을 꼭 보고 싶었다. 남의 일이 아니라서다.


본 다큐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책 내용 자체를 다루진 않는다. 다만 자신의 책을 통해 작가가 던지려 했던 메시지가 무엇이었을지를 여러 사람들이 추론한 인터뷰 모음이다. 감독이 던진 이 담론에 대해 하루키 책의 독자와 다른 일본 소설가들은 자기네 역사를 소환한다.


다큐를 보고 놀란 점은 사건 가해자들이 매우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점이었다. 집단 살해를 저지른 이들은 그저 우리 주변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소위 정신 장애가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봐도 두드러질 만큼 기괴한 관점을 가진 자도 아니었다. 다큐 출연자들의 말처럼 나도 <언더그라운드 2>를 읽었을 때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 가해자들은 뭐랄까, 미래에 대해 좀 더 허무주의적인 시선을 가진 듯했다. 마치 철학 마니아라고 할까. 앞으로 이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유달리 관심이 많고 진지해 보였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해서 사건 가해자들을 비호하자는 건 절대 아니다. 그래서 이런 글을 쓰기가 조심스럽다. 이 다큐도 최대한 중립적 시선을 유지하고자 한다. 일본의 근현대사와 사린 사건 당사자 대상 인터뷰 자료 등을 되짚어보며 왜 평범한 사람이 왜곡된 믿음에 사로잡힌 괴물로 바뀌는 지를 탐색한다.


이미지 출처: EBS국제다큐영화제 홈페이지(www.eidf.co.kr)


일본이 2차 세계 대전에서 패했을 때 천황은 비로소 자신이 인간임을 선언했다. 신이라 믿었던 존재가 알고 보니 그저 인간이라니. 이 사실은 일본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으리라. 왕조 혹은 신권 사회에서 통치자는 스스로를 신격화하며 권력을 강화한다. 그런데 패전국이 되니 전지전능한 줄 알았던 천황은 갑자기 무능력자가 되었다. 백성들에겐 갑자기 기댈 곳이 없어진 셈이다. 천황에게 씌운 콩깍지가 벗겨진 후 많은 일본인들은 방황했나 보다.


통일교, 여호와의 증인, 남녀호랑개교.. 사이비 종교에 관심을 가졌다면 한 번쯤 귀에 스치듯 들어봄직한 이름이다. 친일파로 의심받는 내란수괴 윤돼지 집안도 남녀호랑개교와 연관 있다는 썰이 파다하다. 온라인 시사 채널 쪽에서는 진작 심층 보도를 한 지 오래다.


어떤 종교이든 인간의 의존욕을 발판 삼아 성장한다. 인간은 결국 수명을 가진 생명체 아닌가. 이런 실존적 허무주의가 내면에 쌓이면 누구든 영원한 가치를 부르짖는 종교에 매력을 느낄 때도 있으리라.


참고로 본 영화제에서는 해마다 일부 작품은 영화관을 몇 개 잡아서 상영도 해 준다. 덕분에 이번에 GV도 들어볼 수 있어서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되었다. GV 중 작가님이 말했던 마지막 발언이 기억난다. <작은 것들의 정치>라는 책에서 말하든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카페, 도서관, 저녁 식탁이라고. 동유럽권에 파다했던 소련 공산주의를 몰아내는 힘이 되었던 것은 주변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었던 이런 작은 자리들이었다고.


귀가 닫힌다는 게
참 무서운 거구나.


결국 가장 중요한 건 경청이리라. 달콤하고 솔깃한 얘기들에만 심취하면 누구든 사회에 거대한 해악을 끼칠 수 있는 신념에 빠지기 쉽다. 평범한 사람들이 세상 사는 이야기를 나눌 만한 장(場)을 가까이하면 귀를 활짝 열고 살 수 있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이런 교류에서 비롯한 공감대 아닐까. 이 작은 에너지가 뭉치고 뭉쳐서 뜨거운 용광로 같은 에너지로 바뀔 때 변화는 더 가까이 온다.


특히 이 다큐를 보면서 윤석열 내란수괴 부부와 통일교가 유착된 비리는 반드시 철저한 진상을 밝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곡된 신념을 체계적으로 가스라이팅하는 체계가 바로 사이비 종교 집단이다. 이렇게 사익만을 추구하는 종교가 고위 공직자, 정치인들과 권력을 결탁하면 악(惡)이 체계화된다. 일본이 통일교에 대해 종교해산명령까지 내릴 수 있었던 사법적 동력은 바로 옴진리교가 벌인 독극물 집단 살인 때문이리라.


본 영화제 출품작들은 거의 대부분 EBS TV에서도 방영된다. 하지만 직장인들에게 시간에 맞춰 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이 작품은 아예 TV에서도 볼 수가 없어서 거리가 먼 영화관까지 가서 봐야만 했다.


영화제는 비록 어제 끝났지만 다행히 홈페이지(www.eidf.co.kr)에서도 제한된 기간(영화제 상·방영 후 일주일?) 이나마 다시 보기 할 수 있다. 특히 옴진리교 교주의 딸을 인터뷰한 다큐 <내가 그의 딸이다>도 있으니 관심 있다면 보시길.


덧. 무라카미 하루키는 옴진리교 관련인들을 면담한 경험을 바탕으로 3부작 소설 <1Q84>를 썼다.




그동안 글을 제대로 쓰지 못했습니다. 2024년 12월 3일 후 문화 생활에 대한 욕구가 최근까지 사라지다 보니 여러모로 게을러졌습니다. 요즘도 영화보단 정치·시사 뉴스에 관심이 가는지라 영화 후기는 자주 못 올리겠지만 쓰고픈 주제가 생기면 써 보려 합니다. 가끔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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