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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ring Dec 03. 2024

초록의 시간 880 함께 흘러가자

첫눈 약속은 아니라도

살다 보면 그 무엇 하나

내 맘대로 되지 않고

살아 보니 사소한 것 하나도

내 맘과는 달라서

참~ 어이없을 때가 있어요


그러나 어쩔 수 없죠

그 무엇이든 흘러가는 대로 두고

함께 뒤따라 흘러가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 아닐까 하는 생각이

지난 첫눈 펑펑 내릴 때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어요


흘러가는 세월

손으로 막을 수도 없고

스쳐 지나가는 바람을

두 팔로 붙잡을 수도 없고

예쁘고 사랑스럽게 오리라고

두근두근 기대하고

애틋한 설렘으로 기다리던

첫눈마저도 낭만과 거리가 먼

걱정 근심의 폭설로 쏟아지더

며칠 새 다 녹아 맨숭맨숭~


그렇군요 날씨마저도

하루하루 예사롭지 않고

순간마다 녹록지 않아요


배신과도 같은 소낙눈으로  펑펑 쏟아지던

첫눈의 흔적매정하게 사라졌으나

온갖 부질없는 근심 걱정은

눈 녹듯 사라지는 것이 아니어서

내 곁에 내 안에 여전히 찰랑이고

살며시 첫눈 약속을 건네던

그녀의 속삭임만

한 마디 다정한 위로와도 같이

잔잔히 귓전에 남았습니다


첫눈 올 때 오세요

777 버스 타고 오시면 돼요~


그녀의 첫눈 초대

난 그냥 웃었어요

첫눈 오는 날

시계탑 앞에서 만나자고 했다가

아끼던 친구를 바람 맞혀 버린

철부지 시절의 얄미운 배신이

깊숙한 미안함으로 아직까지

뾰족하게 남아 있었으므로

첫눈 약속은 그 후로

아예 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요 사실은

마음속으로 가볼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어요 큰맘 먹고 

지하철 타고 행운의 777 버스로

환승도 해서 한번 가볼까~


빨간 머리 앤이 웃으며 반기는

키다리카페에서 첫눈 내다보며

하트가 예쁜 카페라떼를

그윽하게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잔물결처럼 나를 흔들었거든요


그러나 생각은 생각일 뿐

이번 첫눈은 펑펑 원 없이 쏟아져

빨강 노랑 깜장 자전거들의 색깔마저도

모조리 흰색으로 덮어버릴 만큼 대단했으니

첫눈 약속을 했더라도 안타깝게

가지 못했을 게 분명합니다


첫눈 쏟아지던 날

하얀 눈더미에 푹 파묻혀

침묵하는 자전거들을 보며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이렇게 중얼거렸어요


기다려 언니가 간다

언젠가 갈게

한없이 부실하고 부족해서

도무지 언니답지 못한 언니지만

우리 이렇게 함께 흘러가자


첫눈 아니라도

두 번째 세 번째 내리는 눈이라도

모든 사랑이 첫 마음 첫사랑이듯

첫 마음으로 반기는 눈은

언제나 새로운 첫눈일 테니

나붓나붓 얌전히 눈 내리는 날

밥 한번 사러 언니가 갈게


언니가 없는 맏이라서

언니라는 소리 제대로 못하는

나도 가끔은 언니가 되고 싶거든

미덥지 않고 예쁘진 않아도

밥 잘 사주는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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