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880 함께 흘러가자
첫눈 약속은 아니라도
살다 보면 그 무엇 하나
내 맘대로 되지 않고
살아 보니 사소한 것 하나도
내 맘과는 달라서
참~ 어이없을 때가 있어요
그러나 어쩔 수 없죠
그 무엇이든 흘러가는 대로 두고
함께 뒤따라 흘러가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 아닐까 하는 생각이
지난 첫눈 펑펑 내릴 때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어요
흘러가는 세월을
손으로 막을 수도 없고
스쳐 지나가는 바람을
두 팔로 붙잡을 수도 없고
예쁘고 사랑스럽게 오리라고
두근두근 기대하고
애틋한 설렘으로 기다리던
첫눈마저도 낭만과 거리가 먼
걱정 근심의 폭설로 쏟아지더니
며칠 새 다 녹아 맨숭맨숭~
그렇군요 날씨마저도
하루하루 예사롭지 않고
순간마다 녹록지 않아요
배신과도 같은 소낙눈으로 펑펑 쏟아지던
첫눈의 흔적은 매정하게 사라졌으나
온갖 부질없는 근심 걱정은
눈 녹듯 사라지는 것이 아니어서
내 곁에 내 안에 여전히 찰랑이고
살며시 첫눈 약속을 건네던
그녀의 속삭임만
한 마디 다정한 위로와도 같이
잔잔히 귓전에 남았습니다
첫눈 올 때 오세요
777 버스 타고 오시면 돼요~
그녀의 첫눈 초대에
난 그냥 웃었어요
첫눈 오는 날
시계탑 앞에서 만나자고 했다가
아끼던 친구를 바람 맞혀 버린
철부지 시절의 얄미운 배신이
깊숙한 미안함으로 아직까지
뾰족하게 남아 있었으므로
첫눈 약속은 그 이후로
아예 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요 사실은
마음속으로 가볼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어요 큰맘 먹고
지하철 타고 행운의 777 버스로
환승도 해서 한번 가볼까~
빨간 머리 앤이 웃으며 반기는
키다리카페에서 첫눈 내다보며
하트가 예쁜 카페라떼를
그윽하게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잔물결처럼 나를 흔들었거든요
그러나 생각은 생각일 뿐
이번 첫눈은 펑펑 원 없이 쏟아져
빨강 노랑 깜장 자전거들의 색깔마저도
모조리 흰색으로 덮어버릴 만큼 대단했으니
첫눈 약속을 했더라도 안타깝게
가지 못했을 게 분명합니다
첫눈 쏟아지던 날
하얀 눈더미에 푹 파묻혀
침묵하는 자전거들을 보며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이렇게 중얼거렸어요
기다려 언니가 간다
언젠가 갈게
한없이 부실하고 부족해서
도무지 언니답지 못한 언니지만
우리 이렇게 함께 흘러가자
첫눈 아니라도
두 번째 세 번째 내리는 눈이라도
모든 사랑이 첫 마음 첫사랑이듯
첫 마음으로 반기는 눈은
언제나 새로운 첫눈일 테니
나붓나붓 얌전히 눈 내리는 날
밥 한번 사러 언니가 갈게
언니가 없는 맏이라서
언니라는 소리 제대로 못하는
나도 가끔은 언니가 되고 싶거든
미덥지 않고 예쁘진 않아도
밥 잘 사주는 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