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889 지극한 슬픔
라흐마니노프 '악흥의 한때'
내 안에 너 있다~는
달콤 쌉싸름한 드라마 대사도
세월의 흐름에 시달리다 보니
기억의 벽에 흐릿한
그림자 되어 남아 있을 뿐~
그래도 한때
감미롭게 울려 퍼지던
드라마 대사처럼 내 안에
사랑스러운 너~가 있으면 좋겠으나
혹시라도 내 안에 너 대신
불쑥 솟구치는 화가 있는 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
'악흥의 한때'를 찾아 듣습니다
음악을 들으며
행복에 빠져드는 순간이
악흥의 눈부신 한때라면
잊히지 않게 간직하고 싶은
순간의 반짝임들을 주워 모아
알알이 곱게 엮어보는 것도
차분해지는 방법이 될 수 있으니까요
라흐마니노프의 '악흥의 한때'는
여섯 개의 소품으로 이루어진 곡인데요
음악 속에서 환상적인 기분에
살포시 빠져들고 싶을 때 들으면
딱 좋은 곡이랍니다
'악흥의 순간'이라고도 부르는
제목에서처럼 여섯 개의 곡 중에는
반짝이는 한순간을 나타내듯이
휘리릭 아주 빠른 곡도 있고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 속 기억들을
찬찬이 되뇌며 더듬어가듯이
느리고 차분하게 흐르는 곡들도 있어요
1번 3번 5번째 곡들은
애수에 젖어드는 느릿한 곡들이고
2번 4번 6번째 곡들은 폭풍이
세차게 휘몰아치듯이 빠른 곡으로
마치 슬픔과 기쁨 사이를 넘나들며
날아오르다가 풀썩 내려앉는
그네 타기 같은 느낌을 줍니다
롤러코스터처럼 몰아치는
변덕쟁이 감정과도 같고
오르막 내리막이 반복되는
우리들 인생과도 닮아 있어요
나도 모르게 자리 잡고 있는
내 안의 火를 花로 바꾸고 싶고
이왕이면 곱고 사랑스러운
한 송이 꽃으로 바꾸고 싶을 때
'악흥의 순간'을 듣습니다
작은 꽃 한 송이
그마저도 안 되면 차리리
지극한 슬픔으로 바꿔보아도
한결 나을 것 같아요
스물세 살 라흐마니노프는
기차 여행을 하던 중에
가진 돈을 몽땅 잃어버리게 되어
돈이 급히 필요하게 되었답니다
음악원 졸업 때 스승님에게서 받은
소중한 금시계를 전당포에 맡길 정도로
절박한 상황에서 만든 곡이 바로
'악흥의 순간'이라고 해요
러시아 작곡가 알렉산르 자타예비치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하소연합니다
정해진 기한까지
돈을 벌기 위해 서두르고 있으며
여섯 개의 피아노 곡을 써야 한다~고
경제적인 압박과 간절함에 시달리며
라흐마니노프가 단 두 달 만에 작곡하여
자타예비치에게 헌정했다고 하는
'악흥의 순간'은 지독한 결핍에서
나온 생계형 음악인 거죠
여섯 곡 중에서
네 번째 곡이 가장 유명한데
쇼팽의 '혁명' 에튀드와도
비슷한 구조랍니다
불안과 압박감에 쫓기며
바쁘고 빠르고 강하게 격정적이면서도
화려한 선율이 인상적이고
음울한 단조의
아르페지오가 특징이라고 해요
현란한 기교를 뽐내던 라흐마니노프의
강하고 화려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열정 가득 웅장한 멜로디가
작곡 당시에 끌어안고 있던
지극한 슬픔을 표현하는 듯합니다
피아노 좀 치는 사람이라면
어디 가서 뽐내기 좋은 곡이라는 말에
푸훗 웃습니다
작곡가의 절박함이
다급하게 만들어 낸 '악흥의 한때'
음울하면서도 화려하고 어려운 곡이
후세의 누군가에게는
우쭐대며 자랑거리가 될 만큼
인기가 높다니 그 또한
아이러니합니다
같은 제목을 가진
슈베르트의 '악흥의 순간'도 있어요
자유롭고 간결하고 낭만적이어서
마음이 편안할 때 들으면
더 맑고 따사롭게 순해지는
슈베르트의 포근 마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