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787 늦게 핀 꽃
추억의 옷을 입다
청하지 않았는데도 불쑥 찾아온
여름 감기가 반갑지는 않았으나
어쨌든 내게 온 손님이니
극진하게 잘 대접해 보내드리고
다시 시작한 아침 산책길에서
느리게 걷던 걸음을
잠시 멈춥니다
다른 장미들이 다 바스락
말라 비틀어 떨어진 후에
새삼스럽게 추억을 되새기듯이
한참 늦게 피어난 장미에게
말을 건넵니다
장미야~ 너도 세월이 버거워
따라잡기 힘들었나 보다
중얼거리며 사랑스럽게
어루만져줍니다
친구 말마따나
인생이 놀이터인 듯
시간이 미끄럼이라도 타는 듯
휘리릭 지나가는 시간에 휘둘리며
조르르 신나게 미끄러지고
또다시 미끄러지는 하루하루
게으름 피우다가
늦게 핀 장미도 아마
우리 맘 같을 테죠
미끄러지듯 흐르는 시간
쫓아가기 버거워 숨차하다가
그만 느지막이 피었나 봅니다
겨우내 숨바꼭질하다가
한여름에 나를 찾아
늦게 온 감기처럼
늦게 핀 장미가 예쁜 만큼
안쓰러운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요
늦게 온 감기 끄트머리에서 만난
늦게 핀 장미를 보고 있자니
문득 레트로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과거의 기억을 그리워하는 것을
레트로 감성이라고 한다죠
새삼 늦게 피어난 장미가
내 눈에는 바로 엊그제
담장을 붉게 물들이던
덩굴장미의 기억을 되새기며
추억의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아요
꽃밭은 이미 나리꽃 세상인데
뒤늦게 피어난 장미는
과거의 순간에서 툭 튀어나온 듯
유난히 선명한 빨강입니다
늦게 핀 장미를 한참 바라보다가
다시 길을 걷기 시작하는데
친구야 노올자~
친구의 톡문자가 날아옵니다
감기 마무리 기념으로
친구가 재미나게 놀자는데
다음으로 미룹니다
감기에게서는 풀려났으나
내 발목을 잡는 게 너무 많으니
줄에 묶여 흔들거리는
마리오네트 인형 같아서
몸은 붙박이 마음만 훨훨~
그럼 다음에 놀자며
지금 너를 묶고 있는 줄이
구원의 동아줄이 될 거라고
착하고 예쁜 답을 덧붙여 주는
친구가 참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