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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ring Jun 25. 2024

초록의 시간 787 늦게 핀 꽃

추억의 옷을 입다

청하지 않았는데도 불쑥 찾아온

여름 감기가  반갑지는 않았으나

어쨌든 내게 온 손님이니

극진하게 잘 대접해 보내드리고

다시 시작한 아침 산책길에서

느리게 걷던 걸음을

잠시 멈춥니다


다른 장미들이 다 바스락

말라 비틀 떨어진 후에

새삼스럽게 추억을 되새기듯이

한참 늦게 피어난 장미에게

말을 건넵니다


장미야~ 너도 세월이 버거워

따라잡기 힘들었나 보다

중얼거리며 사랑스럽게

어루만져줍니다


친구 말마따나

인생이 놀이터인 듯

시간이 미끄럼이라도 타는 듯

휘리릭 지나가는 시간에 휘둘리며

조르르 신나게 미끄러지고

또다시 미끄러지는 하루하루


게으름 피우다가

늦게 핀 장미도 아마

우리 맘 같을 테죠

미끄러지듯 흐르는 시간

쫓아가기 버거워 숨차하다가

그만 느지막이 피었나 봅니다


겨우내 숨바꼭질하다가

한여름에 나를 찾아

늦게 온 감기처럼

늦게 핀 장미가 예쁜 만큼

안쓰러운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요


늦게 온 감기 끄트머리에서 만난

늦게 핀 장미를 보고 있자니 

문득 레트로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과거의 기억을 그리워하는 것을

레트로 감성이라고 한다죠


새삼 늦게 피어난 장미가 

내 눈에는 바로 엊그제

담장을 붉게 물들이던

덩굴장미의 억을 되새기며

추억의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아요


꽃밭은 이미 나리꽃 세상인데

뒤늦게 피어난 장미는

과거의 순간에서 툭 튀어나온 듯

유난히 선명한 빨강입니다


늦게 핀 장미를 한참 바라보다가

다시 길을 걷기 시작하는데

친구야 노올자~

친구의 톡문자가 날아옵니다


감기 마무리 기념으로

친구가 재미나게 놀자는데

다음으로 미룹니다

감기에게서는 풀려났으나

내 발목을 잡는 게 너무 많으니

줄에 묶여 흔들거리는

마리오네트 인형 같아서

몸은 붙박이 마음만 훨훨~


그럼 다음에 놀자며

지금 너를 묶고 있는 줄이

구원의 동아줄이 될 거라고

착하고 예쁜 답을 덧붙여 주는

친구가 참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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