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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브티 Oct 12. 2020

공짜는 없다

선배는 키는 작았지만 한눈에 봐도 단단해 보였다. 말투도 야무지고 어떤 사안에 대해 자신의 목소리를 분명하게 냈다. 동학년을 하게 됐을 때 지나치며 선배의 반을 자주 볼 수 있었다. 4년 차인 내가 보기에 눈이 커다래질 만큼 멋진 반을 운영하고 있었다. 선배는 자기만의 교육철학이 있었다. 그것은 선배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만난 담임 선생님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선배의 은사님은 어린이들을 정말 사랑하는 분이셨다. 그리고, 학급운영시스템을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것 같다. 학생들 스스로 주인의식을 갖고 모두가 학급에 기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다. 함께 가꿔나가는 1년이 얼마나 알차고 재밌었을지! 선배의 학급운영에도 그런 것이 있었다. 선배의 반은 교사의 교육철학을 멋지게 실현해 낸 실천 장이었다. 


선배와 닮고 싶었다. 마침 같은 학년이라 오고 가며 학급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직접 보고 느낄 기회도 많았고, 학년 회의 시간에 선배의 입을 통해 듣기도 했다. 교실로 돌아와 나는 선배의 노하우를 따라 적용해보았다. 기록이를 두어 학급에서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게 하고, 학급 행사도 비슷하게 치렀다. 


학부모와 상담은 학교 방문 상담이나 전화상담 밖에 없었는데, 선배는 학부모 총회 외에도 따로 학부모와 만남의 시간을 자주 가졌다. 선배반만의 어머니회 같은 것이었다. 거기서 무슨 이야기들을 나누는 것일까? 다른 것들은 얼개를 대충 가져와 우리 반에서 적용해볼 수 있었지만 반 어머니회는 따라 해 볼 수가 없었다. 그 무렵 선배는 눈에 띄게 내게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아무 철학도 없이 단순히 자기 반에서 일어나는 행사나 운영 방법들을 따라 하기 시작한 나를 경계한 것이다. 선배의 경계심을 느끼게 되자 궁금한 것들을 직접 물어볼 수가 없었다. 


다음 해에 나는 3학년을 맡게 됐다. 선배를 통해 보고 들은 멋진 반을 이번에는 처음부터 만들어보고 싶었다. 나는 의욕적으로 어머니회를 추진해봤다.  선배처럼 따로 식당에서 만나자고 할 배짱은 없어서 교실에서 모였다. 직장에 다니시는 분, 장사를 하시는 분들이 어렵게 시간을 내서 오셨다. 어머니들이 모두 모이자 나는 두루뭉술하게 1년을 잘 보내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의논해보고 싶어서 만든 자리라고 말을 했다. 선배의 어머니회를 흉내 낸 내 어머니회에는 목표의식조차 뚜렷하지 않았다. 나는 당시 학급의 어려운 점을 말씀드렸고 회의는 산으로 가기 시작했다. 


당시 교실은 별관에 있어 정수기가 있는 곳까지 가려면 너무 멀고 위험했다. 게다가 교실 바닥이 몹시 낡아서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 어머님들은 나의 이야기를 듣고 아이들이 물 먹기 편하게 정수기를 렌털 하자고 했고 교실 바닥엔 장판을 깔자는 의견을 주셨다. 내 문제제기에 나름 답안을 내신 것이다. 나는 학급의 문제점을 어머님들과 함께 해결해나가고 있다는 데에 자부심을 느꼈다. 학급에 정수기가 설치되고 그 비용은 어머님들이 갹출하셔서 내기로 하셨다. 교실 바닥 장판은 학부모님 중에 장판 가게를 하시는 분이 계셨지만 교실 한 칸을 다 하기에는 부담이 돼 교실바닥에 장판을 까는 문제는 없던 것으로 됐다. 


어머니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어머님들의 표정이 무거웠다. 상담 후에 늘 개운한 표정으로 교실문을 나서던 학부모님의 얼굴만 봤었다. 하지만 그 날은 아니었다. 어머님들의 분위기로 나는 이 모임이 실패로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 교내엔 교실 안에 정수기가 설치된 반도 있었고, 장판 조각을 책상 위에 깐 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학부모의 찬조를 받으면 안 된다는 법을 위반한 행위였다. 나이가 많이 드신 선배님들을 위해 학부모님들이 맞춰주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제 겨우 5년 차인 내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 것이다. 좋은 교육을 펼치고 싶었던 내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한 것이다.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을 때 쐐기를 박는 사건이 일어났다. 친목 배구를 하고 운영위원회 어머님들이 교사 다과를 준비해주셔서 돕고 있었다. 그때 어떤 어머님이 내게 다가오셨다.


“선생님, 조심하셔야겠어요. 선생님반 어머님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요. 전에는 정말 좋은 선생님이라고 소문이 자자했었는데 올해 확 변했다고 하시더라고요. 어머님들께 부담 많이 주신다고요. 선생님에 대해 들은 좋은 소문들을 알고 있어서 안타까워서 말씀드려요. 조심하세요.”


그 후 나는 선배를 따라 하던 것을 그만두었다. 

선배는 아이 셋의 엄마였다. 그녀가 어머니회를 열 수 있었던 것은 아이 셋을 키운 경험이 있어 어머님들과 더욱 소통할 수 있는 품이 넓었기 때문이다. 아이를 키우느라 휴직했고 직장 다니며 아이를 키워낸 선배는 어떤 어머님과도 소통이 가능했다. 그리고 선배는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정확히 알았다. 그래서 모두에게 그것을 설명할 수 있었다. 단순히 베끼는 것만으로 나는 그것을 실현해낼 수 없었다. 


나는 그 해에 완전히 실패했다. 어머님들께 금전적으로 폐를 끼쳤으니 나는 그것을 아이들에게 물질적으로 보상을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도에 넘치는 선물과 이벤트를 열어 갚아야 했다. 마음을 주고받는 따뜻한 교실을 원했지만 나는 초조했다. 아이들은 착하고 예뻤다. 그러나 아이들 뒤에 있는 어머님들의 시선이 불편해 마음껏 예뻐하지 못했다. 


상황은 더 나빠졌다. 임신을 하게 돼 반을 끝까지 맡지 못하고 중간에 휴직을 하게 된 것이다. 유산기가 있고 몸이 너무 좋지 않아서 학교에 나갈 수가 없었다. 처음의 실수를 만회하려고 했던 계획마저 틀어졌다. 


휴직한 후 12월이 된 어느 날. 나는 소포를 받았다. 우리 반 아이들이 직접 손으로 쓴 편지였다. 마음이 너무 아파 편지를 읽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아이를 낳고 기르며 어머님들의 마음을 더 이해할 수 있는 나이로 나아가게 됐다.  


올해 나는 초보 교사의 어리석은 모습까지 감당했어야 했던 그 어머님들의 나이가 됐다. 내가 너무 닮고 싶었던 그 당시 선배보다 몇 살 더 먹기도 했다. 예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무조건 따라 해서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했던 내 모습과 그런 후배를 경계했던 선배. 그리고 벌어진 일들까지.


 “잘하고 싶었었구나. 아이들에게도 부모님들께도 인정받고 싶었구나. 그래서 시간이 가야 쌓일 수 있는 노하우를 단숨에 얻고 싶었던 거야.”


여전히 학생과 학부모의 인정이 필요하지만 그것만이 내가 교사를 할 수 있는 동력은 아니다. 그리고 그 방법 역시 나 스스로 찾아야 한다. 그것을 무척 비싼 값을 치르고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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