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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두 Oct 22. 2024

관성

“정인 씨가 생각해도 우리 팀장님 좀 너무한 것 같지 않아요?”

“들을 때마다 너무한 것 같아요, 진짜. 몇 번째 한다고요?”

“벌써 5번이나 다시 썼어요. 아니, 다른 팀원은 다 좋다고 넘어간 보고서를 왜 계속 다시 쓰게 하시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래 놓고 기한 넘겼다고 경위서 쓰라고 한 거 알아요?”

“경위서를 쓰라고 해요? 그거 인사고과에 반영되는 거 아니에요? 등급 하나 떨어진다고 들었는데? 아니 무슨 팀장이 그래? 팀원 한 명 완전 못살게 구는 거지, 이게.”

“그러니까요. 이거 퇴사하라는 의미인 거 맞죠? 진짜 빨리 나가든가 해야지. 망할 놈의 회사는 커피도 맛이 없어.”


 시연의 분노에 괜한 커피가 그 불똥을 맞았다. 옆에서 듣고 있던 정인은 목소리에 시연과 자로 잰 듯 완벽하게 같은 양의 감정을 담아 맞장구를 쳤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의 맞은편에 앉은 동수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으며 커피를 마셨다. 반 이상 비워진 동수의 잔과 거의 줄지 않은 시연, 정인의 잔이 테이블에서 오가는 이야기에 대한 관심도를 보여주는 듯했다.


“그런데 저희 들어가 봐야 하지 않아요? 팀장 회의 10분 뒤에 끝날 것 같은데.”

“그러게요. 진정을 좀 하고 들어가야 하는데 분이 안 풀리네요.”

“저희 그럼 퇴근하고 술 한잔할까요? 성빈 씨까지 해서 동기 모임 해요 오래간만에!”

“저는 좋아요. 성빈 씨한테는 들어가서 메신저 보내볼게요.”


 자리를 정리하며 아쉬운 마음에 제안한 정인의 회식은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여졌다. 그때, 남은 커피를 단숨에 마신 동수가 커피잔을 정리하며 말했다.


“아, 저는 빠질게요. 오늘 컨디션이 안 좋아서.”

“어디 안 좋아요? 그러고 보니까 오늘 컨디션 좀 안 좋아 보이긴 한데. 무슨 일 있어요?”

“아뇨 일이 있는 건 아닌데, 술 마실 기분은 아니라서요. 성빈 씨 오늘 별일 없다고 했어요. 셋이 한잔하고 가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완곡하게 거절한 동수는 이내 굳은 표정으로 앞선 두 사람을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

 퇴근 시간이 겨우 5분 정도 지난 시간, 동수의 동기 세 사람이 동수의 자리에 와서 인사를 한 다음 함께 사무실을 나갔다. 예상대로 성빈이 무리 없이 합류한 듯했다. 사무실이라 조용히 이야기하긴 했지만, 사무실을 나서는 남자 둘, 여자 하나의 몸짓과 발걸음에는 커피를 마시던 낮시간의 고조된 감정이 느껴지는 듯했다. 세 사람은 늘 그러했듯 회사에 대한 분노와 원망의 감정으로 술자리를 채울 것이다. 오늘의 동기모임은 낮에 끓어올랐던 그 감정을 유지하기 위한 자리일 것으로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잠시 세 사람을 바라보던 동수는 이내 업무를 마무리하고 퇴근을 위해 자리를 정리했다.

 동기들과의 술자리를 거절하고 동수가 곧장 향한 곳은 자취방이었다. 7평이 조금 넘는 원룸 오피스텔에는 밖에 널브러진 물건 하나 없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침대를 제외한 모든 가구는 붙박이 형태로 제작되어 더욱 깔끔한 모습이었다. 동수는 들어오자마자 샤워를 하고, 입고 있던 옷은 세탁기에 넣어 빨래를 한 다음, 편한 옷을 갈아입고 책상 앞에 앉았다. 개운하고 편안한 상태에서도 동수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책상 위에 있던 노트북을 열었다.


‘저희 회사를 위해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죄송스럽게도 이번 채용 과정에서 강동수 님의 합격 소식을 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비록 이번에는 좋은 만남을 이어갈 수 없게 되었지만, 이후 더욱 성장한 모습으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그리고 지원자님의 앞날에 항상 행운이 따르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이미 네 번은 본 메일을 굳이 한 번 더 확인해 다섯 번을 채운 동수는 잠시 메일 내용을 보다 이내 창을 닫고는 OTT 사이트에 접속했다. 볼 영화를 미리 정해 놓은 듯 거침없는 속도로 한 영화를 검색해 실행했다. 캔맥주를 한 모금 하고 나니 영화사 소개가 끝나고 주인공들이 등장하며 영화가 시작되었다. 동수는 2시간 분량의 영화가 실행되는 동안 의자에 등을 길게 기댄 자세로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았지만, 동수의 눈은 화면을 보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저 눈을 뜨고만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격렬하게 탄산을 뿜어대던 캔 속의 맥주는 그 시원함을 선보이지도 못한 채 조용히 식어갔다.


————————————————————————

 주말이 시작되는 토요일 아침, 오전이 거의 다 지날 무렵 일어난 동수는 아침부터 부재중 전화를 온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어, 전화했네?”

“빨리도 일어난다. 점심 먹어야 할 시간에.”

“왜 그래서.”

“나와. 밥 먹고 커피나 하러 가자.”

“너도 또 떨어졌나 보네.”

“붙어서 부를 수도 있지 않냐.”

“그러면 전화 받자마자 말했겠지.”

“예리하네. 아무튼 12시까지 나와 국밥 먹자.”


 국밥도 커피도 외출도 수다도 그 무엇도 동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진 않았지만, 이직에 도전하고 있는 동료이자 10년도 더 된 친구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동수는 밖으로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어제 퇴근 후 외출복을 정리하던 것과 똑같은 움직임이었다. 외출 준비를 마친 뒤에도 자취방은 여전히 어질러진 물건 하나 없이 깔끔했다.

 뜨거운 뚝배기에 담긴 국밥을 10분이 채 안 걸려 비운 동수와 기영의 수다는 카페에서 시작되었다.


“저번에 면접 본다고 한데서 떨어진 거야?”

“그러니까. 마음의 준비라도 하게 티를 좀 내던가. 앞에선 좋다고만 하더니 갑자기 떨어뜨려 버리면 완전히 날벼락이잖아.”

“그 사람들은 그게 편하긴 하지.”

“내 기분도 좀 생각해 달라 이 말이지…. 발표라도 빨리 나던가. 입사하고 일 잘해서 승진하고 연봉 협상하는 상상까지 했단 말이야.”

“멀리도 갔네.”


 기영의 실없는 넋두리에 동수의 오른쪽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시선은 여전히 앞자리의 기영이 아닌 아래 방향의 테이블을 향하고 있고 눈은 흐릿했지만, 귀로 들어오는 기영의 넋두리는 동수의 표정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너도 면접 본 거 있지 않아? 말이 없는 거 보니 떨어졌나보네 너도.”

“쓸데없이 기억력이 좋아 너는.”

“뭐야, 그럼 총알 하나도 안 남았어?”

“그렇지.”

“넌 그냥 회사 열심히 다녀라. 백수한테 커피 사줄 돈은 있잖아. 우리 직장인.”

“빨리 백수 탈출해서 보은할 생각이나 해. 커피도 쌓이면 밥이 되고 술이 되는 거다. 아주 그냥 커피 가지고 통장 거덜 나는 꼴 보겠어 그냥.”

“저번이랑 멘트가 비슷하다 야.”


 짧은 대답으로 일관하던 동수는 이내 기영에게 잔소리를 한 차례 쏟아내고는 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자취방으로 돌아온 동수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책상 앞에 앉았다. 가만히 앉아 기영과의 대화를 떠올리던 동수는 이내 다시 일어나 외투를 침대에 널브러뜨린 후 캔맥주를 꺼내어 들고 노트북을 열었다. 잠깐 초기 브라우저 화면을 바라보던 동수는 어제 다섯 번째 확인한 메일을 또 한 번 확인했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찬찬히 메일을 보던 동수는 맥주를 한 모금 하고는 채용 사이트에 들어가 채용 중인 공고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동수가 원하는 채용 공고는 지난주 이후로 올라오지 않고 있었고, 동수도 그 점을 불과 어제 확인하여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사이트를 샅샅이 뒤지며 연신 맥주를 들이켰다. 손가락은 계속 스크롤을 내리며 새로운 글을 불러오고 있지만, 동수의 눈은 점점 흐려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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