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6] 계획이고 뭐고 1

토론토 - Distillary District

by 자두와두

“준호, 우리 탈 열차 뭐였지?”

“아…. 뭐더라….”

“UP Express 찾으면 돼.”

“저거?”

“아 그러네.”

“될까?”

“되어야 하는 일일까?”

“말자. 또 오겠지.”

“그렇지?”

“그래 힘 빼지 말자.”


세 사람이 타야 하는 지하철이 곧 출발한다며 전광판이 깜빡이고 있다. 바로 앞이 승강장이라 달리면 아슬아슬하게 탈 수도 있는 거리였지만, 걷는 걸음조차 간신히 떼고 있는 세 사람에게 달리기는 과도한 요구였다. 기차가 떠난 빈 승강장에 처량하게 앉은 태영이 옆에 앉은 준호를 보고 말했다.


“체크인해준다고 했던 거 맞지? 안되면 우리 바로 노숙자야.”

“해준대. 어차피 셀프 체크인이라고 그냥 들어가라더라.”

“나 가서도 괜찮으면 여기 나 혼자 갔다 와도 되냐?”

“그러던가.”


혼자만 서서 괜히 승강장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영상을 찍는 형일에게 질렸다는 듯, 준호가 쳐다도 보지 않고 대답했다. 형일은 즐겁다는 듯 지쳐 쓰러진 두 사람을 촬영하며 놀리다가 재미가 없어지자, 준호가 어젯밤 보내준 파일을 다시 열었다. 10번도 더 본 일정이지만, 그럼에도 도저히 외워지지 않는 기가 막힌 양이었다.


스크린샷 2025-04-27 오후 2.25.33.png 준호의 토론토 1일 차 여행 계획


“너 이거 며칠 걸렸냐? 만드는데?”

“일하면서 짬짬이 했지. 어떻게, 보고 반성 좀 했어? 트래킹 딱 하나 써온 누구는 반성 좀 해야 하는데.”

“하긴 했는데, 그래도 이렇게는 못 할 듯. 야 보는 사람이 다 숨 막힌다. 여기서 삐끗하면 어쩌려고 이렇게까지 했냐.”

“삐끗해도…. 아우 됐어. 한잠 자고 시작하자. 지금은 절대 못 해.”


촘촘하게 분 단위로 짜인 준호의 여행 계획은 이동 수단과 가격, 링크까지 여행사 패키지 못지않게 자세하게 쓰여 있었지만, 밤샘 비행기의 고단함을 놓치고 말았다. 심지어 캔모어에서 매일 트래킹에 술까지 마신 피로가 누적되어 준호와 태영은 일정이고 뭐고 당장 숙소에 가서 눈붙일 생각뿐이었다. 불행 중 다행스럽게도 준호가 예약한 숙소의 호스트가 오전 중 언제라도 체크인해도 된다고 허락을 해줘서 숙소에 도착만 하면 바로 쉴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 그렇게 숙소까지만 버티려는 준호, 태영과 그 와중에도 비교적 팔팔한 형일은 오늘 일정 중 낮시간까지는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혼자 일하려면 이 정도는 돼야 하는 건가. 야 우린 취직이나 잘하자 태영.”


형일의 말에 태영이 대꾸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저거는 몸만 좋지, 체력은 영 아니야. 그럴 거면 근육 나 좀 줘라.”

“가져가던가….”

“야 기차 왔다. 빨리 타자. 형일 넌 잠들지 마라. 셋 다 자면 답 없다.”

“예에.”


피곤함만 가득한 토론토 여행의 시작이었다.




중천에 떠올랐던 해가 눈치도 없이 퇴근 준비를 하며 살금살금 땅에 가까워지는 시간, 여행을 나온 사람들은 맑은 날씨가 아까워서라도 부지런하게 밖을 돌아다닐 시간이다. 늦은 5월의 어느 날, 유독 넓고 깨끗한 하늘과 잔잔하게 바람 부는 시원한 날씨에 붉은 벽돌 건물 중간중간에 놓인 야외 테이블은 만석이다. 각자의 여행 혹은 일상의 중간에 쉬어가기 위해 바글바글 모인 디스틸러리 디스트릭트 거리에, 오늘의 첫 코스를 즐기는 세 사람이 있다.


“야 준호, 코스 좋다? 자다 일어나서 밥 먹고 커피. 이건 진짜 인정해 준호.”

“근데 여기는 일정에 없지 않았어? 그새 찾아본 거야?”

“일단 자리 잡고 앉자. 지금 일정 다 꼬여서 엄청 스트레스받으니까. 생각 좀 해보게.”


어딘가 급한 듯한 준호의 말에 형일이 태영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쟤 왜 또 저기압이냐. 여기 괜찮지 않아? 나 같으면 일단 커피 마시고 놀겠다. 성격 진짜 이상…”

“손 모양 반대다 형일. 다 들려.”

“들었어? 잘했어. 난 자리 잡으러 간다!”


준호의 분노 타이밍을 감지한 형일이 재빠르게 자리를 피해 한 카페에 좌석을 찾으러 도망갔다. 그 와중에 준호가 가르쳐준 카페의 이름은 잊지 않고 자리를 잡았다. 목젖까지 나온 분노를 삼키는 준호를, 태영이 살살 달래가며 카페로 데려갔다. Balzac's Distillery District라는 카페의 야외 좌석이었는데, 카페 내외로 사람들이 끊임없이 북적거리는 명소인 만큼 들어가자마자 풍기는 고소한 커피 향이 진하게 느껴지는 곳이다. 하지만 그만큼 음료를 받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려, 준호는 주문만 한 다음 형일이 잡아놓은 자리에 가서 앉았다.


“좀 앉아 있자. 사람이 많아서 좀 걸린대.”

“좋지. 여긴 그냥 앉아만 있어도 여행이다. 우리 학교 빨간 벽돌 건물은 그렇게 꼴 보기 싫더니 여기 빨간 벽돌은 왜 이렇게 감성적이냐. 그냥 기분 탓인가?”

“낮잠 자고 기분이 좋긴 하지, 지금? 나 평생 낮잠 잔 것 중에 오늘 제일 잘 잔 것 같아. 이렇게 꿀잠일 수가 없어.”

“근데 날씨도 받쳐주고, 오늘 진짜 날인가 봐. 피자도 기가 막히던데 그치?”

“그러니까. 배부르고 여유롭고 기분 좋고, 토론토는 좋은 곳이구나.”


밤샘 비행기의 여파로 모두가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에 나란히 잠에 빠졌던 세 사람이 컨디션을 회복한 세 사람의 첫 일정은 이곳 디스틸러리 디스트릭트였다. 1800년대부터 위스키 공장이 자리했던 이 부지는 2000년대 초반, 리모델링을 통해 문화의 거리로 재탄생했다. 양조장 건물로 쓰이던 오래된 붉은 벽돌 건물을 유지한 채 디자인 샵, 갤러리, 카페, 레스토랑 등으로 가득 채운 이곳은 캐나다 산업화의 역사와 현재의 문화를 한곳에서 느낄 수 있는, 토론토 여행의 필수 코스가 되었다.

오후 3시가 조금 안 된 시간, 준호는 미리 정한 일정에도 없는 이곳으로 두 사람을 데려왔다. 형일과 태영은 개운한 기분으로 찾은 너무도 멋진 거리, 거기다 첫 끼니로 정말 맛있는 피자까지 먹으며 다시금 여행을 즐겼다. 하지만 준호는 자신이 조사해서 온 곳임에도 이 붉은 벽돌의 거리를 즐기지 못한 채 커피가 나올 때까지 휴대폰을 놓지 못했다. 20분이 넘게 지나 커피를 받고 난 다음에야 준호는 아직 개운치 못하다는 표정으로나마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어떻게, 타협을 좀 봤어?”

“내일 일정은 일단 됐어. 모레는 이따 숙소 가서 하지 뭐.”

“너 아까 버스에서도 계속 고민하지 않았어? 모레 일정 만들다가 밤새우겠는데.”

“나 밤새우면 너도 못 자는 거야. 아유 됐어, 일단 좀 쉬자.”

“준호, 근데 여긴 어떻게 알았냐. 3일 치 일정에 여긴 없던데?”


이제야 준호와 대화를 할 기회가 생긴 김에, 태영이 준호에게 물었다.


“여긴 백업 일정이었지. 삑사리나면 가려고 생각해 놨었어.”

“백업 일정까지 있었어? 뭘 그렇게까지 하냐…. 나야 뭐 좋은데 구경하고 좋긴 한데, 혹시 저녁 일정도 다 짜놨어? 하루치 백업이 다 있는 거야?”


이번엔 형일이 혀를 내두르며 물었다.


“있지. 여기서 좀 가면 해산물 파는 시장같은 데가 있어. 거기 가서 구경도 하고 저녁도 먹을 거야. 그다음은 사실 고민중인 게 저기 하버 프론트에 호숫가 야경 보러 가면 진짜 멋있거든? 그런데 여기가 또 밤에 조명 딱 켜면 예쁘단 말이지. 이건 너희한테 선택권을 줄게. 너희가 골라.”

“아니 넌 토론토에 살아봤어? 무슨 현지인처럼 추천하네.”

“다 찾아보고 왔지. 검색 사이트 다 뒤져봤다고. 그래서 저녁엔 어디 갈래? 골라봐. 그 시장은…”

“천천히 하자. 지금 안 정해도 되잖아.”


형일이 준호의 말을 끊으며 만류하자 준호는 아쉽게 입맛을 다시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준호의 촘촘한 일정에 왠지 모를 갑갑함을 느낀 형일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앉으며 마찬가지로 커피를 한 잔 한다. 발길 닿는 대로 여행하는 형일은 준호의 촘촘한 일정과 상세한 정보가 과하게 느껴졌다.


“그럼, 커피 마시고 여기 한 바퀴 돌고 가자. 한 바퀴 쭉 둘러줘야 또 영상에 그림 나오지.”

“그래, 아까부터 촬영은 딱히 안 하더라 성준호.”

“여기 좀 조사하느라고. 저쪽에 소품샵이랑 갤러리가 있는데 특히 초콜릿 맛집이 있어서…”


다시 시작한 준호의 브리핑에 형일은 오늘따라 푸른 하늘로 눈과 신경을 돌려버렸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