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6] 계획이고 뭐고2

St. Lawrence Market

by 자두와두

“아 진짜… 되는 일이 없다 되는 일이….”

“없긴 뭐가 없냐. 이 정도면 너무 잘 된 거지.”

“그러니까. 성준호 성격 진짜 이상…”

“한 번만 더 그 소리 하면 때린다. 민형일이.”


한숨을 푹푹 내뱉는 준호에게 깐족대던 형일이 금세 입을 다물고는 얌전히 테이블에 음식을 꺼내는 태영을 돕는다. 준호는 영 기분이 좋지 않아 숙소에 들어온 이후 쭉 식탁에 앉아 있던 준호의 앞에 온갖 포장 음식이 꺼내어진다. 하얗고 네모난, 큰 냄새는 없는 도시락과 아주 고소한 향을 풍기는 까맣고 동그란 플라스틱 용기가 겨우 3명밖에 없는 사람 수에 맞지 않게 테이블을 가득 메운다. 반면 앞접시와 식기, 그리고 좁고 길다란 샴페인 잔은 사람 수에 맞게 놓인다. 마지막으로 식사 자리를 촬영하기 위한 카메라를 옆에 세우며 저녁 준비를 마친 태영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야 준호, 이 정도면 거기서 먹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냐? 여기서 푸지게 먹는 게 좋지.”

“그래 그 마켓 사람도 많고 뭐 시끄럽고 정신없기만 했을걸? 거기다 자, 이 와인은 거기서 먹을 수 있냐고 이거.”


길고 고급스러운 박스를 손에 든 형일이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박스 안에 든 병을 꺼낸다. 유난히 길쭉한 병은 밝고 투명한 금빛이 고급스러운 라벨에 쌓여 보는 사람을 안달나게 했다. 조금 과장이 섞인 표정으로 감탄하는 형일이 와인병을 준호에게 보이며 말했다.


“오는 길에 아이스 와인을 샀으면 계획이고 뭐고 너무 신나지 않냐. 심지어 리즐링이라고. 이건 한국에서도 구하기 힘든 거 알지?”

“넌 여행 계획하는 것보다 와인 공부를 더 한 것 같다, 형일?”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알아야지. 캐나다의 3대 명물이잖아.”

“하나는 메이플시럽이겠고, 나머지 하나는 뭔데?”

“저스틴 비버.”

“…그거 누가 정했냐. 3대 명물.”

“나. 왜, 불만 있어?”

“늘 있지 불만. 하나 추가했을 뿐이야.”


사람을 명물에 넣어버린 형일이 태연하게 와인을 잔에 따른다. 뻔뻔한 표정에 비해 아주 조심스러운 손짓이었다.


“자 우리 아무것도 먹지 말고 일단 와인부터 마셔보자. 이게 진짜 그렇게 맛있다잖아. 봐라. 성준호 이거 마시고 바로 실실거린다.”

“그래. 실실 이던 설설 이건 그만 꽁해있자 준호.”


두 사람의 권유에 준호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고는 앞에 놓인 잔을 들었다. 잔에 든 와인은 마치 위스키같이 찰랑이며 속에 들었던 달콤한 향을 뱉어냈다.


디스틸러리 디스트릭트에서 커피를 마신 세 사람은 유명하다는 카페와 기념품 가게를 다 둘러본 다음 저녁 식사를 위해 세인트로렌스 마켓에 들렀다. 온갖 시장과 맛집이 모여있는 이 마켓에서 준호는 미리 조사해 둔 맛있다는 식당에서 식사를 포장해 푸드코트같은 자리에서 현지인처럼 식사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마켓이 7시면 닫는다는 사실을 간과한 준호는 현지인 같은 식사는 포기하고 포장한 음식을 숙소로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식사를 포장하는 데 무리는 없었던 터라 태영과 형일에게는 문제가 될 일이 없었다. 이번에도 계획이 틀어져 오는 내내 우울한 준호의 표정만 빼면 말이다.


“와…! 미쳤는데? 이거 왜 이렇게… 우와…!”

“허업!!!”


세 사람이 나란히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포도의 단맛이 정말 진하지만 청량하게 입안에 퍼져나갔다. 그러면서도 와인의 쌉쌀한 맛이 단맛을 기분 나쁘지 않게 즐길 수 있도록 중간중간 고개를 내밀었다. 그렇게 입안에 퍼져나가는 맛과 향, 그리고 처음 느껴보는 감동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던 세 사람은 잠깐 할 말을 잊은 채 와인을 음미했다.


“진짜 명물 맞다 이 정도면.”

“그치. 와, 입에서 없어지는 게 아깝다. 그냥 입에 계속 물고 있을까. 방금 삼키고 후회했다 진짜.”

“나도 나도. 그렇다고 한 모금 더 마시는 것도 아까워. 어떡하지?”

“야, 안주 좀 먹고 또 마시자. 랍스터 사 온 거랑 딱 맞을 것 같아."


30초 전만 해도 얼굴이 굳어있던 준호가 언제 그랬냐는 듯 형일과 함께 호들갑을 떨었다. 먼저 꺼낸 메뉴는 랍스터인데, 사 온 메뉴 중 가장 비싼 음식이었다.


“와 지금 이렇게 두 개해서 거의 10만 원이야. 우리 좀 부자 같다.”

“이렇게 한 점이면 국밥이 한 그릇인 건가?”

“이 와중에 국밥이 뭐냐 국밥이. 쟤는 마인드가 글렀어. 부자는 못되겠다. 야.”


세 사람은 신중한 손길로 랍스터와 와인을 가급적 길고 풍부하게 음미했다. 적당히 잘 익힌 랍스터 살에 상큼한 레몬과 고소한 내장까지 더해 한입에 랍스터 한 마리를 통째로 먹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빠르게 사라진 내장의 고소함에 비해 조금 비릿하면서도 담백한 살의 향은 입안에 길게 남는다. 살짝 남은 그 향은 다시 와인의 달고 청량한 와인에 씻겨 내려간다. 남아있는 향이 씻겨 내려가며 느끼는 짜릿함이 또 다음 안주와 다음 와인 한 모금을 끊임없이 찾게 했다.


“근데 성준호 넌 그렇게까지 조사를 해놓고 폐장 시간은 왜 몰랐냐?”

“알았지. 그래서 원래 점심에 가려고 넣어놨는데, 그래서 폐장 시간은 신경을 안 써서 잊어버렸다.”

“그럴 만했네, 뭐. 넌 그 계획표대로 안 되는 게 그렇게까지 우울할 일이야? 거기서 못 먹으면 숙소에서 먹으면 되지 뭘 그렇게까지 잿빛이 되냐.”


“이게 내 컨셉이야. 계획대로 착착 들어맞는 여행. 이 일정이 준비한 대로 완벽하게 들어맞으면 그 카타르시스가 또 있다니까? 내일부터는 제대로 들어맞는 거 보여줄게.”

“길 가다가 아이스 와인을 마주친 카타르시스는 없는 거냐.”

“아니, 좋지. 좋은데 이게 느낌이 다르다고. 내일 계획표 봤지? 머리로만 생각한 게 현실에서 딱 떨어지게 구현되면 기분 좋잖아. 뭔지 몰라?”

“태영, 맥주나 꺼낼까?”

“좋지. 파스타 먹자.”


준호가 늘어놓는 말들에 전혀 공감하지 못한 형일과 태영은 다음 안주와 술을 준비하며 준호의 화제를 돌렸다. 두 번째 안주는 라비올리와 라자냐, 그리고 피자 3조각이다. 동그란 도시락 뚜껑을 열자 고소한 치즈와 토마토소스의 향이 퍼진다. 이 강렬한 향에서 상상할 수 있는 진득한 맛에 또 맥주를 빼놓을 수 없어 세 사람은 새로운 잔에 2차를 시작한다. 와인은 행여나 못 느끼고 넘기는 향이라도 있을까 봐 신중하게 맛을 보던 세 사람이었지만, 맥주는 멈출 줄 모르고 들이켰다.


“와, 난 이게 좀 내 스타일인 것 같기도 해 그치?”

“그러니까. 망나니는 막걸리를 마셔야 하는 건가 봐. 아우 시원해.”

“파스타도 맛있다. 푹푹 떠먹으니까 속은 좀 후련하네. 배고팠나 우리?”


아주 작은 조각으로 길게 즐기던 랍스터와는 달리, 파스타는 입안 가득 면과 소스를 넣고 즐겼다. 피자는 한입에 한 조각을 다 해치울 기세였다.


“준호, 근데 내일 일정 생각보다 타이트하진 않던데? 그 정도만 지켜도 기분이 좋아지는 거 맞아?”

“아니? 꽤 바쁠걸? 저대로 딱 하면 하루 끝날 텐데.”

“그래?”


형일이 다시 한번 준호가 보내준 일정표를 훑어본다.

스크린샷 2025-06-08 오후 12.32.08.png 준호의 토론토 2일차 일정(수정본)

단호한 준호의 말에 일정표를 보며 잠시 뜸 들이던 형일이 생각을 마친 듯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야 그럼, 진짜 이틀 동안 마음먹고 일정 딱 맞춰서 해볼까? 우리? 저기서 얼마나 지키나 해보기. 진짜 토 안 달고 제대로 협조할게, 어때.”

“뭐야. 불안하게 왜 이래.”

“해준대도 난리야. 아무튼, 근데 요 일정에서 삐끗하면 뭐 하기. 벌칙이든 뭐 밥을 사든.”

“오 그래볼까? 재밌겠는데? 오 형일 아이디어 좀 괜찮았다.”


목소리가 커진 형일과 마음이 동해 눈이 반짝거리는 태영이 작당모의를 시작했다. 준호가 만들어온 빡빡하고 빈틈없는 일정에 점점 다른 색이 입혀져 간다. 벌칙과 이벤트, 심지어 자신들의 즉흥 일정을 끼워 넣을 방법까지 고안하고 있었다. 잠깐 흥미가 일어 가만히 듣고 있던 준호가 잠시 생각하다 두 사람에게 물었다.


“근데, 원래 내 일정 컨셉이 그건데 협조를 당연히 해줘야 했던 거 아니냐? 왜 해준다고 생색내는 느낌이냐, 너네?”

“야야, 넘어가 넘어가. 재밌으면 됐지. 다 그런 거 아니겠어?”


분하지만 결국 또 넘어가 주는 준호였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