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ronto Island
형일이 파라솔 아래에서 마음을 추스리는 동안, 그리고 준비한 점심 겸 간식을 처리하는 동안 준호는 틈틈이 시간을 확인했다. 그러다 생각한 시간이 되었는지 다음 장소로 이동할 준비를 시작했다.
“자, 이제 일어나자. 지금 정리하고 가면 딱 맞을듯.”
“옙. 이동하시죠.”
갑자기 빠릿해진 형일이 자리에 있던 쓰레기들을 치우며 일어난다. 준호는 낯설면서도 뿌듯한 표정으로 형일을 보다 지도 어플을 켜고 길을 찾는다.
“이야, 이런 거 자주 해야겠다. 얘가 이렇게 말을 잘듣다니.”
“효과가 있긴 하다 준호. 이제 스케쥴대로 딱 움직일듯.”
“뿌듯하구만.”
아직 정신이 없는지 형일은 두 사람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세 사람은 채비를 마치고 다음 장소로 출발했다. 도착한 장소는 토론토 아일랜드로 이동할 수 있는 택시 승강장. 물론 호수 위에 떠있는 섬을 가야 하니 타야하는 택시는 수상 택시였다.
“Water taxi~ to the island~”
특이한 노래로 시선을 사로잡는 택시 승강장에서 준호는 미리 준비한 돈을 지불하고 택시에 올랐고, 탑승한 지 1분이 지난 4시 30분에 정확하게 택시가 출발한다. 하버프론트에서도 제법 멀리 보이던 토론토 아일랜드였지만, 실제로 택시를 타고 가니 10분이 되지 않아 도착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배에서 육지에 내리는 기분은 육로나 비행기를 이용할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을 선사한다. 거기다 빌딩이 가득한 도시의 아스팔트에서 출발해 풀내음 가득한 숲의 흙길에 발을 내딛는다면, 마치 순간이동을 한 것과도 같은 기분좋은 착각을 느낄 수 있었다.
“오, 여긴 진짜 숲이네 숲? 공원 수준이 아닌데?”
“그러게, 그냥 공원 수준이 아니다.”
“그거 내가 한 말이잖아, 오태영.”
“어쩌라고. 민형일이 살아났네? 고새를 못참고 멀미를 하더니?”
“어, 너한테 토하고 살아나야 했는데 아쉽다.”
표정 하나 안변하고 치고 받는 두 사람을 신경도 안쓰고 준호는 다음 이동할 장소를 찾는다. 오늘 하루종일 준호의 휴대폰에 띄워져 있던 지도 어플은 이번엔 또 새로운 곳을 가리키고 있다.
“야, 가서 싸워 가서. 이번에 늦으면 진짜 춤추는 거야. 아까 그 자리 그대로.”
“어디 가는데? 그냥 걸어서 돌아다니는 거 아니야?”
“그냥 쫓아다녀. 다 생각이 있겠지.”
“아니 궁금할 수도 있지….”
토론토 아일랜드는 호수에 떠있는 섬이지만, 한 바퀴를 다 돌아보기 위해서는 수km를 걸어야 했다. 둘러보기 위해서만 1시간도 넘는 시간이 필요한 이 곳을 모두 둘러보고 가장 좋은 곳을 고르기 위해 준호가 선택한 방법은 자전거를 타고 빠르게 한 바퀴를 둘러보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토론토 아일랜드에 도착하자마자 자전거 대여소를 찾았다.
“아 이거 타고 도는 거야?”
“응. 길 타고 쭉 한바퀴 돌아보고. 제일 괜찮은 데에서 자리를 깔 거야. 어때.”
“오, 괜찮은데? 근데, 셋 다 자전거 타면 카메라는 어떻게 들어?”
“자, 이거.”
준호가 카메라에 연결하는 바디캠 스트랩을 꺼냈다. 바디캠을 연결하는 걸 보는 형일은 정말로 놀란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야? 언제 챙겼어 이걸?”
“셋 다 자전거를 타면 어떻게 촬영을 하겠냐. 그리고 지금 말고도 이런 타이밍이 있겠다 싶었지.”
준호의 말에 태영이 이때다 싶어서 형일에게 말했다.
“와, 형일. 곰 서식지에 그냥 들어간 너랑 진짜 다르지 않냐.”
“뭐 인마. 살아 나왔으면 됐지.”
“진짜 곰을 보기라도 했어야 이런 말을 못할 텐데 이거.”
형일이 지겹다는 듯이 반박했다. 이미 지나간 일은 형일의 머릿속에 더이상 중요하지 않은 듯 했다. 자전거 바구니에 짐을 넣고, 촬영 준비까지 마친 세 사람은 본격적으로 토론토 아일랜드라는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섰다.
토론토 아일랜드는 택시 승강장 앞에는 숲이 늘어서있지만 조금씩 이동할 때마다 새로움이 가득한 곳이다. 어느새 숲길이 끝나고 해변이 테마파크와 같은 공원이 나오고, 그 너머에는 모래사장이 자리한다. 하지만 바닷가는 아닌 지라 호수가 들어오는 물길은 강이 된다. 그 옆에는 요트 선착장인 곳도 있고, 숲이 늘어선 곳도 있다. 책이나 미디어에서만 보던 그런 공간을 조금씩 이동할 때마다 마주칠 수 있어, 순간순간마다 눈을 떼지 못하고 감격하며 움직여야 하는 곳이었다.
“와 준호, 자리 못 정하면 어떡하지. 다 좋은데 진짜. 당장 저기 내려서 그냥 누워버리고 싶어.”
“그래도 한 바퀴는 돌고 오자. 한 바퀴 돌면서 자리 정하고, 자전거 반납한 다음에 걸어서 올 거야.”
“예엡.”
걸어서는 꽤 오래 걸릴 일이지만, 자전거를 타니 토론토 아일랜드 한 바퀴가 채 2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중간중간 내려서 영상도 찍고 사진도 많이 찍었지만 그럼에도 대여시간이 2시간을 넘기지 않고 반납할 수 있었다. 그렇게 눈에 담아온 토론토 아일랜드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을 골랐을 때, 세 사람은 숲속의 잔디밭을 선택했다.
“거기 아예 책상에 의자가 있던데. 피크닉하라고 딱 해놨더만.”
“그래 피크닉은 아무래도 초록색이지. 파란색보단.”
“오 웬일로 마음이 맞네. 그럼 가서 자리를 깔아보자.”
세 사람의 의견이 딱 맞아떨어지는 건 흔치 않은 일 중 하나였다. 하지만 토론토 아일랜드의 가장 좋은 피크닉 스팟은 세 사람 모두 숲속의 잔디밭으로 선택했다. 세 사람이 도착한 곳은, 숲이라고는 하지만 나무가 빽빽하게 심겨 있지는 않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 한 그루씩 심어진 나무들은 이 공간의 개방감을 주었다. 거기다 반대편에는 호수와 나무 넘어 토론토의 빌딩들이 얼핏 보이는 곳이다. 이렇게 상반되는 공간이 주는 신비로운 자극에, 세 사람은 자리를 깔고 카메라를 설치한 다음 여지없이 준비한 맥주를 꺼내 들었다.
“근데 여기서는 밖에서 술 안되는 거 아니었어?”
“글쎄? 후기 보니까 다들 마시던데? 관리하는 사람이 없나 봐.”
“그럼 되는 거야?”
“안 들키면 되는 거지 뭐. 좀 그러면 마시지 마, 너는.”
준호의 단호한 말에 형일이 잽싸게 자기 몫의 맥주를 챙긴다. 가벼운 건배로 정을 나눈 세 사람은 각자 자리 주변을 둘러본다. 미술관 그림에서나 볼 것 같은 풍경을 사방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다. 벤프의 로키산맥은 저 멀리 있는 웅장함을 마주하는 느낌이었다면, 토론토 아일랜드는 이색적이고 조금은 비현실적인 공간에 직접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다.
“근데 이게 좀 괜찮긴 하다.”
“뭐가?”
“준호가 준비한 거 쫓아다니기. 이게 편하긴 하네. 얘가 다 준비하고, 난 그냥 쫓아다니면 되더라고? 이래서 사람들이 패키지여행 하는 건가. 아까 아침에도 그냥 말 좀 들을걸.”
“와, 드디어 내 노고를 좀 알겠냐? 어제부터 진짜 도움 하나도 안 되더니 아까 쇼 한번 하고 사람 됐네?”
준호가 감격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형일에게 말했다. 준호가 열심히 준비한 3일 치 일정 중 2일 차가 지난 오늘, 정확하게 지켜진 일정은 오늘 오후뿐이었다. 어제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오늘 오전은 형일의 공이 컸다고 볼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오늘 오후가 모두 예상대로 돌아간 준호는 드디어 만족스러운 여행을 즐길 수 있었는데, 형일이 이렇게 말해주니 한층 기분이 좋아졌다.
“생각해 보니까 뭐, 이런 거 다 찾아다가 시간이랑 동선 다 맞춰서 싹 계획해 놓은 거잖아? 좀 고생이긴 하겠더라고. 보니까. 인정한다. 이번엔.”
“아침엔 진짜 꼭대기에서 밀어버리고 싶었는데, 사람 됐으니까 봐준다, 형일. 자, 한잔해.”
“그래그래, 내일도 열심히 하고, 가이드 씨”
흔치 않게 훈훈해진 분위기에 잔을, 아니 캔을 부딪쳤다. 오래간만에 만족스러운 여행, 형일의 인정과 초록초록한 이 피크닉 분위기에 준호는 답지 않게 갑작스럽고 충동적인 생각이 들었다.
“야, 노고를 알겠으면, 내일 일정은 너네 둘이 해볼래?”
“아니요. 네가 계획표 다 만들어 놨을 텐데 굳이?”
“그래. 그거 알아본다고 또 얼마나 조사를 했을 텐데. 우리가 협조 잘 할 게, 준호.”
준호의 말에 두 사람이 기겁하며 반대했다. 하지만 준호의 생각은 확고했다.
“내 노고는 내가 아니까 됐고, 너네도 이런 뿌듯함을 한번 느껴봐야 하지 않겠냐? 일정이 계획대로 착착 흘러갔을 때의 그 쾌감이라고 해야 하나. 어제 얘기했잖아. 그런 게 있다고. 내가 지금 그걸 느끼고 있거든? 너네도 꼭 느껴봤으면 좋겠다.”
“아니 네가 계획한 걸로 충분히 느꼈어. 우리도.”
“그래, 우리도 오후에 되게 기분 좋았다니까?”
“직접 만든 계획대로 움직이면, 지금 느낀 그 편하고 좋은 기분의 10배는 기분이 좋을걸? 야, 이것도 뭔가 유튜브 영상 하나 만들기 괜찮을 것 같지 않냐? 그냥 내가 준비한 대로 다니면 무슨 재미가 있겠어. 영상이. 이 기분파들이 계획하고 만드는 일정이 더 재밌지 않겠냐? 유튜브 스타 안 할 거야? 이대로면 조회수 안 나와! 태영! 형일!”
쏟아지는 준호의 말에, 태영과 형일은 당황스러우면서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니기에 계속 완강하게 거절하기엔 명분이 부족했다. 그렇게 눈동자를 굴리다 태영과 형일의 눈이 마주쳤다. 서로 인상을 찌푸리며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어떻게 좀 해봐, 태영.’
‘아, 뭐라고 하지. 민형일 또 쓸데없는 말 해가지고 준호 신났잖아.’
‘그걸 또 내 탓을 하냐. 빨리 핑계나 좀 생각해 봐.’
그러다 무언가 떠오른 듯 태영이 말했다.
“근데 우리 준비할 시간이 너무 부족하지 않을까? 당장 내일인데 시간이 부족해 너무.”
“괜찮아. 내가 여행지는 줄 테니까 시간이랑 교통편이랑 그런 거 너희가 하면 돼. 초보자 체험용으로 딱이네. 그렇지?”
태영은 기껏 떠올린 명분이 바로 가로막히자, 이번엔 형일도 간신히 무언가 떠올려 한마디를 보탰다.
“근데 우리가 계획한 건 재밌을까? 누가 계획하던 영상에서는 그냥 평범하게 토론토 여행하는 게 되는 거잖아. 그럼 계획한 사람이 누구인 건 상관없는 거 아니야?”
“아니지. 영상에 풍경이나 장소만 나가는 게 아니잖아. 지금 우리 말하는 것도 다 영상에 쓸 거고. 그럼 스토리가 생기는 거지. 이런 스토리가 또 재미 아니겠어?”
‘안되네. 안될까? 안 되는 일일까? 형일?’
‘안 될 것 같은데. 아, 망했다.’
“난 이 기쁨을 너희한테도 알려줄 수 있다는 게 너무 기쁘다. 걱정하지 마. 오늘 이제 저녁만 먹고 집에 가면 되니까, 시간은 충분해! 그러고 보니 이제 일어나야겠네. 저녁 먹으러 가자. 식당 예약 해놔서 지금 가야 해.”
유례없이 신나버린 준호가 명분까지 손에 쥐자, 형일과 태영은 손 쓸 도리가 없이 준호의 계획에 동참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