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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다리별 May 16. 2020

사람보다 더 휴머니스트 같은 댕댕이의 소중한 일상이야기

[도서] '진이의 일기'를 읽고

                                                                                                                                                             #Episode 1


30년도 넘은, 국민학교(요즘은 초등학교)때 우리집에서 3년 정도 강아지를 기른적이 있었다. 아버지께서 우리들을 기쁘게 해주겠다고 시장에서 사오셨던 작은 강아지. 어린 나와 내 동생들은 그 강아지를 정성껏 돌보고 즐겁게 동네를  뛰어다니곤 했었다. 


딱히 목줄 같은 매어 놓지 않았던지라, 우리가 낮잠을 자고 있으면, 밖에 있던 녀석이 어느새 집안으로 들어와서 우리 옆에서 잠들어 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늦은 저녁 자기 혼자 동네를 돌아다닌다고 없어지면, 우리 가족이 밤까지 그 녀석을 찾아다닌적인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가끔가다 혼날짓을 해서 부모님한테 꾸짖음을 듣고 울적해지면, 그 녀석 집(개집) 옆에서 훌쩍거리면서 그 녀석하고 대화를 한 적도 있었더랬다. 사람이 아닌 개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 녀석은 나에게는 또 다른 동생이었고, 우리집의 식구였다. 그리고 그 녀석이 나와 우리 가족을 바라보는 초롱초롱한 눈에는 항상 우리와 함께 해서 느끼는 즐거움의 감정과 우리가 자기를 저버리지 않고 자기와 함께 할 것이라는 믿음이 가득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 녀석이 몇일 동안 사라진 후,  비틀거리면서 상처가 가득한 모습으로 돌아왔었고, 몇 일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었다. 몇년동안 정을 쏟고, 많은 추억을 공유했었던 강아지의 죽음은 어린시절 13살의 나에게 어마어마한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우리집 강아지가 세상을 떠났던 그날, TV에서는 버스의 사고로 수십명의 사람이 사상을 당했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많은 사람의 죽음. 그리고 한마리 강아지의 죽음. 객관적으로 두 사건의 크기는 비교할 수 없다. 다만, 후자의 사건은 나에게 있어서는 가족과의 영원한 이별이요, 어린 시절 공유했던 추억의 커다란 부분이 무너지는 거대한 슬픔이었다. 우리가족과 3년여의 세월을 같이 하며 온갖 정성을 쏟았던 강아지는 분명 동물이 아닌 하나의 가족이었었다. 


#Episode 2
처갓집에서는 10년도 넘게 반려견을 실내에서 키우고 있었다. 그 반려견은 어릴때 처갓집에 입양되고 온갖 이쁨을 받으면서 컸었고, 사람으로 치자면 75~80세 정도 까지 되는 나이까지 먹었더랬다. 그런 그도 나이를 먹으면서 눈이 멀고, 대소변 활동 제어가 안되면서 처갓집에 온갓 배설물을 질질 흘리고 다니면서 급기야 뒷다리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정도면, 안락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처갓집 식구들. 장인어른, 장모님, 큰 딸인 와이프, 작은 딸인 처제...어느 누구도 그럴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그는 아주 오래된, 사랑과 추억을 공유했던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안락사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족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나서지 못했다. 아니 나서고 싶지 않았던 것이이라. 하지만, 그 반려견은 10년이 넘는 기간동안 정을 쌓아왔던 처가집 식구들에게는 가족이었지만, 그러한 관계가 없었던 나와 손아래 동서에게는 한낱 죽어가는 동물에 지나지 않았었다. 


결국,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나와 손아래 동서는 그 반려견을 담요에 잘 덮고 안아서 동물병원을 통해서 안락사를 시켰었다. 그 당시 처갓집 식구들의 눈물과 탄식은 30여년전 어린 나와 내 가족들이 우리 강아지와 작별할 때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처갓집의 반려견은 나에게는 가족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은 하나의 동물에 지나지 않았었다는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두 사건을 직접적으로 경험하면서, 경험의 공유, 생활터전의 공유, 희노애락의 공유 유무에 따라 반려동물이 진한 가족애를 갖는 구성원이 될수도 있음을, 그리고 그러한 공유가 없으면 한낱 동물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절실히 느꼈었다. 


# 책이야기

서설이 너무 길었다. 여기, 타자, 아니 타견의 눈으로 일상생활의 희노애락을 서술한 책 한권이 있다. 말이 반려견이지, 저자가 이 반려견(이하, '댕댕이'라 한다)의 입장으로 이입하여 쓴 댕댕이의 감정의 기복, 천방지축의 행동, 자기를 돌봐주는 주인들에 대한 마음은 통상 사람들이 자신의 가족들에 대해서 갖는 그것과 큰 차이가 없다. 

섬진강 근처에서 사는 주인은 섬진강의 '섬'과 '진'이라는 글자를 따서, 자그마한 암컷에게는 '섬이'라는 이름을, 큼지막한 수컷에게는 '진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정성스럽게 키웠었고, 가족 구성원으로서 십오륙년간을 함께 살다가 세상을 떠난 두 마리의 반려견, 아니 가족을 그리워하고, 그들을 추억한다. 주인이 '진이'의 입장에서 바라본,  '진이'를 둘러싼 많은 일상적 해프닝 또는 에피소드들에 대한 '진이'의 행동과 생각이 '진이'의 입을 빌어서 한페이지 한페이지를 장식한다. 


철부지, 천방지축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간간히 속이 깊은 행동이나 생각을 하는 '진이'는 자신만의 철학과 기준을 가지고 이 책을 통해서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가족들, 그리고 일상의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평범하게 보일 수 있는 따분한 일상이, '진이'의 눈과 말을 통해서 역동적이고 재미있는 이야기들로 변신을 한다. 이걸 '진이의 마법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마치 알라딘의 등장인물인 '지니'의 마법처럼 말이다. 

우리는 흔히 '개팔자가 상팔자'라는 말을 한다. 배가 고프면, 주인이 주는 밥을 먹으면 되고, 졸리면, 잠을 자면되고,  낯선 사람이 오면 짖으면 되고, 그러다 가끔 주인한테 아양이나 귀여운 짓을 하면 되는 개를 보면서, 하루하루의 복잡하고 일상에 치이는 인생을 살면서 희노애락의 감정적 기복에 지친 사람들이 그러한 평면적 또는 수동적 일상을 살아가는 개를 부러움 반, 비아냥 반의 마음을 가지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화자인 '진이'의 입장은 복잡다단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설레이는 마음을 안고 매력적인 여인을 사모하는 두근 거리는 남자의 마음. 가족과 조직를 위해 무엇인가에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가 신통지 않았을 때 느끼는 실망감과 어려움에 찌든 남자의 마음. 외부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내 마누라와 내 새끼를 어떻게든 지켜내야 하는 어깨가 무거운 아버지의 마음. 무언가를 해내었을때 뿌듯하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 


자신의 일상 속의 다양한 에피소드를 다각도로 서술하는 '진이'의 이야기를 따라가면, 반려견의 모습을 한 '진이'는 사라지고, 어느덧 독자와 함께 웃음, 슬픔, 즐거움, 어려움을 공명하고 있는 또다른 인격체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래와 같은 '진이'의 독백을 보는 어떤 사람이 '진이'를 한낱 반려견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희미하게 밝아오는 이른 새벽의 신선한 공기 속에 섞여 있는 나무와 꽃과 풀들의 향기, 그리고 간질이는 쬐그만 새들의 쉴 새 없는 조잘거림과  내 사랑 섬이의 냄새까지, 날 미치게 하는 걸요..."(사랑할때, p. 14)


" 내 연인의 귀여운 새끼들은 분명 가슴이 따뜻한 사람들의 삶 속으로 안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새끼티를 완전히 벗어버린 성숙한 모습으로 엄마를 만나보기 위해 하나둘씩 이곳 빨강 지붕집에 나타날 것이다"(헤어짐의 자리, p.38)


"그런 날 보면 영락없는 연극배우다. 그것도 아주 능란한 배우란 생각이 든다. 지금 내 어조가 자조적으로 들린다면 그건 오해다. 왜냐면 난 순간을 영원으로 살기 때문이다. 내 운명은 어슬프게 조금의 여지를 남겨두는 삶이 아니라 매 순간순간을 남김없이 모조리 살아내는 것이다"(카페의 고독, p. 145)

"내 새끼들은 나의 긴털과 늘어진 귀 인자를 물려받았는데, 꼭 털실 뭉치가 굴러다니는 것만 같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몸통에 입혀진 긴 털은 섬이의 동그란 눈 인자와 함께 귀여움을 더한다. 고슴도치도 지 새끼가 제일 곱다고 하듯 나도 예외는 아니다"(이별 준비, p. 130)


장난기 많은 철부지 같은 남자 아이의 모습을 보였다가도, 어떨때는 주인과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의식으로 똘똘 뭉친 든든한 남성의 모습을 보였다가도, 어떨때는 자신의 삶과 환경에 대해서 관조와 심사숙고를 바탕으로 비극시인이 아닌 희극 시인처럼 무한 긍정의 행복론을 펼치는 '진이'의 다양한 모습에서 자신을 둘러싼 일상을 수동적으로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살아가고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디오게네스의 모습이 보인다고 하면 오버일까? 


평범하고 뭔가 대단한 것이 없는 일상, 그저 그렇게 재미없이 지나간다고 생각하는 일상에 대해서 '진이'는 나름대로의 기준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의 구슬들을 자신의 삶이라는 실에 꿰어서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어 간다. 그리고 그 의미의 구슬의 중심에는 자기 자신, 자기의 연인, 자기의 자식, 진이를 가족처럼 생각하는 주인들이 있다. 그런 '진이'를 보면서 최근에 종영된 드라마의 한 대사가 떠오른다.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소중한 사람과 함께인 대단하지 않은 날" 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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