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은 시작됐죠
너와 함께 사계절을 보냈던 찰나의 감동들 속에서 더욱이 나의 가슴을 아리게 하는 것은, 이따금씩 빤히 바라보며 짓는 진심어린 미소도 아니고, 화창한 봄날에 바라본 햇살을 가린 너의 빨갛게 물든 실루엣도 아니고, 이른 아침 아직 문 열지 않은 귀금속방이 즐비한 종로 시내를 산책하며 거니는 파란 하늘도 아니다.
그저 보면 볼수록 이러한 행복이 깨질까 두려움이 커져만 갔던 나의 모습이다.
너와 함께한 시간들은 나를 두렵게 했다.
너에게 선사했던 저릿한 마음들로부터 나는 바스라졌다.
결국은 나를 위해 있던 이 사랑이 세상에 알려짐과 동시에 너는 부담을 감수하지 못하고 떠나갔음을.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무인도에 표류한 채로 구조를 기다리는 한 사내를 떠올려 본 적 있는가. 그의 공허한 눈으로 바닷가를 바라보며 생의 마지막을 겸허히 안는.
그런 시간들이 있었다.
그리고 사랑은 그렇게 시작이 되고 있었다. 그 전엔 시작조차 되지 못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너무도 알맞을 지도 모르겠다.
우두커니.
그러나 담대하게 피어나는 꿈처럼.
그리고 아스라이 솟아나는 꽃처럼
먼지를 후 불어내고 툭툭 털어내고 갓 태어난 사랑을 집어든다.
그 사랑의 기원은 후회이다.
나는 너에게 조금 더 따뜻하지 못했다.
나는 지금 이 순간 느끼는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다.
나는 항상 계획했고, 무작정 너에게 달려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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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후, 선잠을 청하고 일어난 부스스한 사랑 속에 가물지 못한 슬픔.
슬픔은 사랑의 습도를 유지시켜 준다.
너무 건조하지도, 너무 질지도 않게.
거리로 나가면 세상 사람들은 나를 째려보는 듯 하다.
아니 째려본다.
나는 네 앞에서 죄인이 되어도 너와 함께한 순간을 떠올리며 견딜 수 있다.
나를 가리키는 손가락들,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짙게 칠해진 외로움으로 나의 사랑을 움켜쥔다.
행여 터질세라 너무 강하게 움켜쥐지 않는다.
행여 흐를세라 너무 느슨하게 부여잡지 않는다.
보고싶던 사람들과 함께 후회를 맞선다.
빛이 덕지덕지 묻은 미래를 떠올릴 때 나는 당신의 사랑이 끝났음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다.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나의 사랑은 시작되었다.
이제 세상은 우리를 비웃지 못한다,
나는 그저 꼿꼿이 허리를 펴고 나의 시작된 사랑을 지켜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