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하레께(보께떼 산간지방에 내리는 안개비)가 산잔등을 타고 내려와 계곡마을까지 축축하게 적셨다. 커튼을 젖히고 하늘색을 감별하니 산속에는 더 많은 비가 내리고 있는 것을 확률 99퍼센트. 오늘 계획했던 산행은 물려야겠다. 등산복을 벗고 청바지로 갈아입었다. 갑자기 갈 길을 잃은 기분. 산에 가지 못하는 보께떼에서 뭘 할 수 있을까. 이놈 비야, 야속허다.
오늘은 센트로 구경을 하자. 새로 생긴 다리도 좀 걷고, 이전에 가고 싶었던 식당이랑 커피숍도 가보자.
본디 즉흥적 스타일의 여행자인 두두가 어수선한 하루 일정을 갈무리했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지만, 여행에서 보내는 여유가 낭비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 여유를 방해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즐길 수 없는 걸까. 여행에서 만큼은 비우기가 되지 않는 나는 계획형 여행자.
비에 젖어 가닥진 털 결이 너무 귀엽다
구멍으로 나간 새는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기똥차게 사진 초점이 나갔네
동네를 조금 돌아다녔다. 꿀 파는 가게에 들러서 자스민+꿀 스프레드를 골랐다. 주차장 근처 나무엔 구멍이 뽕뽕 뚫려있었다. 나무 구멍 세입자가 외출을 나갔다. 우린 새가 제 둥지로 돌아오길 잠시 기다리는 듯하다가 이내 돌아섰다.
결국 딱히 할 거리를 못 찾고 두두가 가보자던 카페로 향했다.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대로 따라가니 센트로의 공원에서 멈춘다. 어수선한 갓길에 차를 댔다. 옷 가게 쇼윈도를 지나 왼쪽으로 돌았다. 바로 작은 카페가 나왔다. 카페의 활짝 열린 문과 창문 사이로 제각각 시간을 보내는 외지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버클 팁 커피숍이라는 이름의 카페는 밖에서 보이는 모습 그것이 다였다. 열 평 남짓한 공간에 커피를 만드는 카운터와 높낮이 다른 네 개의 테이블과 의자가 어수선하게 있었다. 손님은 몇 없었지만 거리유지를 하며 앉을 만한 자리는 마땅치 않아 보인다. 나가야 되나, 잠시 주저하는 틈에 젊은 카페 스탭이 활기찬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안녕! 좋은 아침이야! 나는 로베르토야, 여기는 아르뚜로, 여기는 사라야. 너희 이름은 뭐니?
그 친구의 인사 한 번에 낯선 장소에 대한 경계가 씻긴 듯 사라졌다.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있던 아저씨가 옆 테이블로 옮기며 자리를 내준다.
허름함이 매력이 되는 조건은?
막 메뉴를 읽어보려는 우리에게 로베르토는 뭘 마시겠느냐 물었다. 많게 봐도 삼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그는 야무진 자세로 손님의 대답을 주의 깊게 기다렸다. 하지만 메뉴를 공부할 시간이 필요하다. 물음에 괜히 조급해졌다. 나는 입간판에 적혀있던 플랫 화이트를 잠시 떠올렸다가, '비 오는 날의 진리' 카페라테로 마시기로 한다. 두두는 언제나처럼 드립 커피를 주문했다.
주문을 하고 이제 자리에 좀 앉으려는데 로베르토가 등 뒤에서 다시 질문했다.
어떤 커피콩으로 내려줄까?
원두 세 종류를 보여준다. 판매 포장된 두 봉지,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마대자루에서 찾아냈다. 자루 속엣것들이 흩어졌다. 로스팅된 커피콩들이 알 수 없는 분류로 작게 포장되어 있었다. 로베르토는 봉지를 들고 커피의 종류와 맛을 소개했다. 외국어이기도 하고 속사포 같은 그의 언변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는 포장지 지퍼를 열고 직접 냄새를 맡았다.자기한텐 붉은 베리, 카카오 그리고 무엇과 무엇의 향이 난다고 나열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향 맡아볼래?
봉지에서 신선한 콩의 향이 물씬 피어올랐다.
그는 다시 어떤 콩으로 마셔볼 텐지 물어본다.
두두는 잠시 고민하다가 가볍게 볶아진 콩을 골랐다.
바리스타의 세레모니
우리는 자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바리스타 로베르토의 커피쇼를 관람하기 위해 카운터 앞 1열에 자리 잡았다. 그는 기꺼이 관객을 환영했다. 집중한 듯 고정된 눈빛과 리드미컬하고 정성스런 손동작으로 기구들을 다뤘다. 그리고 자신이 보이고 있는 드립의 방법이 어떻게 커피의 잠재된 맛과 향을 추출해 내는지 설명했다. 틈틈이 잘 갈린 커피가루를 보여주고, 필터 위 커피가 달라지는 장면을 보도록 손짓하는 그. 말을 하면서도 동작이 엉키지도 않다니, 신기합니다요.
타이머의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의 바리스타는 핸드폰에 저장된 농장 사진을 보여줬다. 이 원두가 자라난 농장이었다. 그는 밭의 아름다운 경치에 대해, 농장에 심긴 로즈마리와 오렌지 나무, 바하레께가 이 커피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알려줬다. 로베르토의 이야기 속 안개비, 물기 머금은 비옥한 토양, 열매 맺은 나무와 향긋한 허브들의 향취가 뜨거운 물줄기를 타고 방울 방울, 드립 서버에 모였다.
어디선가 본 '농장에서 컵까지 신선한 커피'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떠올랐다. 작은 카페에서 우리는 마치 산 중턱의 농장투어를 마친 듯 감흥에 찼다. 무엇보다 커피 생산지라는 강력한 이점을 십 분 활용해 버클 팁 커피숍은 그들의 '파나마 커피 스페셜티'를 소개한다. 그의 스토리텔링은 누구보다 친근하다.
- 그는 심지어 이 커피 농가에서 10분 거리에 산다고 했다. 심리적 거리감 10분. 이거 말이야, 내 친구의 친구가 만든 커피란 말이지!
가끔 기억에 남는 커피 한 잔이 있다
오늘의 커피는 어떤 맛?
나는 작은 수첩에 메모를 하며 공부하는 직원, 한 곳에서는 일정하지 않은 커피콩을 손으로 고르는 소년, 열린 문으로 커피용품이나 커피콩에 대해 용무가 있는 사람들이 오가는 소탈한 분위기에 매력을 느꼈다. 가장 비싸게 입찰된 원두, 거대한 로스팅 기계와 값비싼 에스프레소 머신, 고급스러운 외관이 표현해 내지 못하는 사람의 품과 열정이 있다. 필터 안의 커피가 고르게 펴지도록 다지는 손동작, 주전자를 원형을 그리며 물을 붓는 팔의 움직임, 물을 다 통과시길 기다리는 두 손의 가지런함, '다 됐어'라며 탄성 있게 드리퍼를 들어내는 그의 모습. 그 일련의 동작들은 이 바리스타가 커피를 사랑하는 몸의 표현일 것이다.
자리에 앉아 아르뚜로가 만든 카페라테를 한 모금 넘겼다. 우유가 남기는 진득한 감촉이나 잡스러운 맛이 없다. 당연한 얘기지만 카페라떼는 커피였다! 커피음료가 아니야. 부드러운 목 넘김이 지나고 깔끔한 커피의 맛이 전해졌다. 한 모금 마시고 드는 생각. 이거야, 내가 바라던 건 이런 맛이었어.
한편 '커피쇼'에서 완성된 드립커피를 받아 든 두두는 내 옆에서 짤막한 감탄을 연발하고 있었다. 좋다, 맛있다! 이거지 이거! 휘휘도 한번 마셔봐, 최고다.
바하레께가 내려서 아무것도 할 수 없던 그 날은 커피를 마시기에 너무나 좋은 날이었다. 정오가 다됐지만 공기는 데워지지 않았다. 도자기 잔에 든 따뜻한 카페라떼가 꿀꺽 꿀꺽 들어간다. 속이 뜨끈해졌다. 오늘 마신 커피를 커핑 cupping 해본다.붉은 베리, 카카오.. 새콤한 맛 끝에 단맛, 그리고 바리스타의 열정의 맛.